하여튼 첫 창작집의 인세를 받아가지고 그날로 들어갔더라면 나는 그런대로 괜찮은 가장이었을 것이다. 악우들에게 잡혀서 받았던 인세를 다 털리며 며칠을 어울려 다니다가 청진동에서 해장하고 초췌한 얼굴로 창비 사무실에 들렀더니 백낙청이 딱하다는 듯이 핀잔을 주었다.
“가서 부인 해산시키라고 어렵사리 돈 구해다 주었더니 집에는 안 들어가고 어디서 오는 길이오?”
내가 약간 후회하는 심정으로 이놈 저놈 원망할 이름들을 떠올리며 앉았는데 그가 다시 물었다.
“몰랐어? 부인이 지금 애 낳고 병원에 있다는데. 빨리 들어가 봐야지.”
그는 앞으로 찍게 될 재판 인세를 미리 준다며 다시 돈을 쥐여주었다. 그는 아무래도 마음이 안 놓이는지 마지막으로 오금을 박았다.
“가다가 악의 꼬임에 빠지지 말고 집으로 직행해요.”
- 황석영, 『수인』, 문학동네, 306-307쪽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불쑥 말했다. “그러니 자료비를 미리 좀 많이 주시지요.” 옆에서 듣고 있던 부장이 다리로 나를 건드리며 주의를 주었지만 모른 척했다. “일 년 안에 독자들 반응이 신통치 않으면 제가 다 물어내지요.” 그 말에 장기영은 얼굴이 벌게지도록 웃었다. “자료비라, 그게 미처 생각 못 했는데……?” “저는 아직 젊고 가난한 작가니까 국민주택 한 채라야 얼마 안 됩니다. 서가에 책이 가득해야 좋은 글이 나오겠지요.” 장기영은 그때부터 껄껄대며 웃기 시작했다. “좋소, 좋아요. 집 한 채는 소설 써서 지가 알아서 하고. 나는 서재를 책으로 가득 채울 만큼 내지.”
그 자리에서 비서실장을 시켜 수표를 끊어 내주었는데 나중에 보니 누구 말마따나 생각했던 것보다는 동그라미 하나가 더 있었다. 과장해서 집 반 채 값 정도는 되었으리라. 내달부터 당장에 시작하자는 것을 내가 육 개월 뒤로 미루자 장기영은 그것을 절반 뚝 잘라서 삼 개월로 줄였다. (중략) 그로부터 일주일 동안 패거리를 바꾸어가며 퍼마셨다. (중략) 이렇게 자료비 조로 받은 것을 거의 거덜 내고 조금 남은 것은 그나마 가장의 체면은 남아 있어서 원고료랍시고 아내에게 갖다 주었다. 이제부터 그야말로 자료비를 마련할 걱정이 태산처럼 짓눌러왔다. ‘에잇 까짓거. 생각보다 희귀본들이 비싸더라고 해야지.’
- 앞의 책, 309-311쪽
황석영의 자전 『수인』에 나오는 이야기다. 황석영의 첫 번째 소설집 『객지』는 ‘창비신서’ 3번으로 출간됐다. ‘창비신서’ 10번까지는 소설집이 5권이나 차지했다. 방영웅의 『살아가는 이야기』, 이문구의 『객지』 『해벽』, 김정한의 『제3병동』, 송영의 『선생과 황태자』. 창비신서는 단행본 시대를 본격적으로 열어간 책들이었다. 내가 창비에 입사한 1983년에도 거의 모든 책이 해마다 중쇄를 찍었다. 특히『문학과 예술의 사회사』(하우저)와 『객지』는 무척 잘 나갔다. 『전환시대의 논리』(리영희)와 『신동엽전집』은 판매금지를 당해서 팔 수 없었다.
『수인』을 읽으면서 과거 출판사의 역할을 생각했다. 출판사가 작가들에게는 은행의 역할을 했다. 출판사가 책을 찍을 때마다 인세를 주는 것은 당연했지만 미리 선금을 주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문인들의 부고를 접할 때마다 선금을 준 목록을 보면서 결손처리를 할 돈을 가늠해본 적도 있었다.
철학책을 펴내는 한 출판사는 1980년대에 한 유명작가에게 이사하는 데 보태라고 4,000만 원을 줬다가 몇 년 뒤에 받은 장편 소설 원고가 밀리언셀러가 되는 바람에 횡재를 했다는 이야기가 떠돌기도 했다. 이렇게 빛을 보는 경우가 없지 않았으나 형편이 어려운 출판사 입장에서는 문인들의 술값 때문에 심각한 곤란을 겪기도 했다.
이렇게 서른두 살(1974년)에 『장길산』을 쓰기 시작하여 마흔두 살(1984)에 끝냈으니 꼬박 십 년이 걸렸다. 시작할 때는 그렇게까지 오래 쓸 줄은 몰랐다. 훗날 친구들은 모두 한국일보 지면과 장기영이 없었다면 『장길산』은 완성할 수 없었을 거라고 얘기했다. 연재를 마치기도 전에 백상 장기영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선택했던 연재소설은 몇 번씩이나 중단되었다가도 그의 유훈처럼 지속되었다.
『수인』에서 작가는 이렇게 썼다. 당시 한국일보는 최고의 신문이었다. 게다가 일간신문들이 작가의 패트론 역할을 하던 시절이었다.
어제 6월의 지불을 모두 끝냈다. 늘 겨울에는 어렵지만 잡지의 정기구독료가 많이 들어오는 연초에는 버틸 만하다. 아직은 여름이니 잘 넘어갔다.
지불내역을 보니 원고료가 적지 않았다. 지난달에는 기획자가 『지그문트 바우만을 읽는 시간』의 원고명세서를 건네주면서 몇 필자의 이름에 동그라미를 쳐놓고는 ‘원고료가 바로 지급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어찌 몇 사람만 줄 수 있냐, 모두 지급하라’고 했다. 전체는 600만 원이었지만 개인에게는 몇십만 원에 불과했다.
이제 문학출판사나 일간지들이 작가의 패트론 역할을 해주지 못하고 있다. 연재소설을 게재하는 신문이 없고 우리 문학작품을 꾸준히 펴내는 출판사가 손가락을 꼽을 정도이니 문인들의 돈줄은 완전히 막혔다고 보아도 좋다. 박근혜 정부는 블랙리스트까지 만들어 작가들을 억압했으니 우리 문학은 초죽음의 상황으로 내몰렸던 것이다.
1991년이었다. 당시 창비에서는 『소설 동의보감』이 엄청나게 팔려나갔다. 노조에서는 30%의 임금 인상을 요구했다. 백낙청 선생이 회의를 참석했을 때였는데 간부 회의에서 간부들의 의견을 듣고는 흔쾌하게 이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다음 주 회의에서 백 선생은 직원들을 혼냈다.
“이 회사가 어찌 직원들만의 것이냐. 제 임금 인상은 요구하는 사람들이 필자들의 원고료를 올리자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잔잔한 목소리로 말씀하셨지만 내게는 청천벽력처럼 들렸다. 아마 원고료를 두 배로 올렸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동반해서 원고료를 올려야 했던 다른 출판사들로부터 비난의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때는 단행본 시장이 막 커져가던 시절이었으니 그런 ‘호기’가 통했다.
그때 3년에 걸쳐 30%, 25%, 20%의 임금이 인상되어 3년 만에 급여가 두 배로 인상되었을 뿐 아니라 해마다 연말에는 꽤 많은 특별 보너스를 받는 바람에 아내로부터 이제 살만하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월급 하루 늦추면 하늘이 무너지고 원고료 하루 늦추면 땅이 꺼진다”는 마음으로 살아왔다. 이것은 창비에서 배운 ‘도덕’이었을 것이다.
점점 규모가 커지면서 이제 급여나 원고료, 번역료, 선인세, 외주 디자인비 등이 예전에 비해 크게 늘어났다. 그러나 아직은 쥐꼬리만 하다. 원고료도 너무 열악하다. 늘 마음이 불편하다.
몇 신인 필자들에게 투자하는 마음으로 선인세를 준 것으로 겨우 위안 삼지만 사정이 좋아지면 제일 먼저 원고료부터 올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출판사와 일간신문이 작가의 후원자 노릇을 하던 시절이 매우 그립다.
원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