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알 수 없다. 돌이켜 보면 생각했던 것과 반대되는 길을 걷고 있다. 정의로운 검사가 되려고 공부 열심히 했는데, 웬걸 잘 나가는 대형 로펌에서 가장 악독한 죄를 저지른 권력자들을 온 힘 다해 변호해 주고 있지 않은가. 역설이다.
역설(paradox)에 대해선 엄격한 정의가 존재하지만 읽어 볼수록 어렵다. 하여 경제학자로서 만난 다양한 역설들로부터 내 나름대로 정의해 보자. 경제학에는 다양한 역설이 등장한다. 예컨대, 케인스의 ‘저축의 역설’, 무역과 기술의 관계에 관한 ‘레온티에프 역설’, 자본재와 생산성에 관한 솔로우의 ‘생산성 역설’ 등등 수없이 많다.
이런 중요한 발견은 주류 경제학자들이 모르거나 알아도 외면하는 내용이다. 내용을 종합해 정리하면 역설이란 경제학자들에겐 이렇게 이해된다. 어떤 하나의 원인으로부터 완전히 상반된 두 가지 결과가 나타날 때 하나의 결론(A)에 대해 다른 결과(B)는 역설이 된다.
신고전학파 경제학과 마르크스 경제학으로 세뇌된 대한민국 경제학 문화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생산성 역설(productivity paradox)’을 가지고 설명해 보자. 경제성장론으로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신고전학파 경제학자 로버트 솔로(Robert Solow)의 발견인데, 희한하게 신고전학파 경제학자보다 오히려 ‘제도 경제학자’들이 실증연구를 통해 발전시킨 역설이다.
무언고 하면, 솔로 교수는 1987년 한 기고문에서 컴퓨터 설비는 곳곳에서 증가하지만 생산성이 그만큼 높아지지 않는 현실을 지적했다. 일반적으로 컴퓨터 도입이 확대되면 생산성이 증가한다고 주장하나 그 예상과 다른 결과가 현실로 드러난 것이다. 동일한 인풋에 대한 상이한 아웃풋!
이런 역설이 발생하면 한쪽은 기존의 명제에 집착하지만 다른 한쪽은 그런 역설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그 원인을 밝히고자 노력한다. 이럴 때 언젠가 소개한 ‘제도 경제학 방법’에 따라 결과에 선행되는 단계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겠다. 결과를 유발한 의도(purpose), 그리고 의도가 처리되는 과정(process)이 두 가지 선행 단계다.
의도는 사람, 곧 행위자의 고유성이다. 인간을 없애고 물리학적 관계로 환원하는 신고전학파와 달리 제도 경제학은 ‘행위자’를 중시한다는 점에도 유의하자. 신고전학파 경제학은 ‘과정’을 중시하지 않기 때문에 역설을 절대 설명할 수 없다. 그러니 기존의 결론을 고집스럽게 사수한다. 꼰대가 될 수밖에 없는 사고구조다.
반면 제도 경제학자들은 과정을 들여다보면서 역설을 설명한다. 생산성 역설이 일어난 이유는 ‘제도’가 구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육제도와 노동조직 등이 적절하게 준비되지 않으면 컴퓨터를 아무리 많이 설치하더라도 생산성은 정체된다. 기술과 제도는 공진화(co-evolution)한다. 따라서 컴퓨터 시설에 맞는 제도를 마련하자.
‘최후에 웃는 자가 진정한 승자다.’
‘죽 쒀서 개 준다.’
자주 쓰는 말이다. 회심의 미소를 선사하는 전자(A명제)와 황당무계한 ‘멘붕’을 안겨주는 후자(B명제)의 관계를 들여다보자. 제도 경제학에 따라 인간의 동기, 과정, 결과 사이의 관계에 주목하자. 첫 번째 명제는 어떤 일을 해나가는 과정에서 아무리 고난과 실패를 많이 겪고 포기의 순간을 수없이 마주하더라도 절망하지 않고, 끝까지 참고 노력하여 마침내 성공을 쟁취하는 자만이 웃을 수 있고 또 그런 사람만이 진정한 승자임을 의미한다.
패배가 승리로 이어지는 과정을 살펴보면 두 가지 원인이 드러난다. 첫째는 실패를 거울삼아 꾸준히 실력을 배양했다는 점이고, 둘째는 노력의 과정을 거친 사람과 그 결과를 쟁취하는 사람이 동일하다는 점이다. 힘이 들었지만 웃을 만하다.
‘죽 쒀서 개 주는’ 경우는 좀 다르다. 숱한 고난과 패배를 겪으면서 역량을 향상시키는 과정은 앞의 경우와 다르지 않다. 맛있는 죽을 쑤기 위해 재료를 이리저리 바꿔보고, 온도 조절에도 실패했을 수 있다. 죽을 쒀 본 적이 없는 나 같은 사람은 냄비 바닥을 몇 번 태웠으리라.
우여곡절 끝에 최고의 죽을 쒔는데 엎지르는 바람에 우리 집 팔복이한테 줄 수밖에 없었다. 매캐한 연기를 들이마시면서 죽 쑨 사람은 한성안이고, 그 죽을 맛있게 입에 넣은 녀석은 팔복이다. 노력한 행위자와 그 결과를 손에 넣은 행위자가 서로 다르다. 웃음이 나올 리 없다. A명제에 대한 진정한 역설이다.
왜 이런 역설이 일어날까? 신고전파경제학에서는 노력한 자와 결과수용자가 항상 같다. 나아가 노력과 결과 사이에 어떤 제도적 요인도 개입하지 않는다. 세상은 ‘제도적 진공상태’다. 노오~력하면 성공한다. 그건 법칙이다.
반면 제도 경제학에서는 의도자와 수용자가 반드시 같지 않다. 그리고 양자 사이, 곧 둘이 매개되는 ‘과정’에 다양한 요인 혹은 제도가 개입한다. 현실경제는 동질적인 행위자가 아니라 다양한 의도와 불평등한 권력을 소유한 ‘이질적인’ 사람들, 그리고 다양한 의도와 권력이 반영된 ‘제도’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노동자의 노동 결과를 수취하는 사람은 자본가다. 교촌치킨 지점장은 밤낮을 쉬지 않고 노력했지만 개그맨 박명수가 50%를 수취한다. 노력한 사람과 수취하는 사람 사이에 각각 임노동 관계와 하도급 관계라는 ‘제도’가 놓여있다. 자본주의 사회는 본래 죽 쒀서 개 주는 경제 체제다.
요즘 문재인 정부의 인사 청문회를 지켜보면서 슬픈 생각이 든다. 이러다 죽 쒀 개한테 주지는 않을까? 그런데 누가 개인가? 궁극적으로는 자유한국당을 염두에 두고 썼다. 하지만 내 생각은 좀 더 복잡하다. 장관후보자로 영입된 사람들 때문이다. 어떤 이는 문재인 대통령 지킨다고 이들의 흠결을 외면하자고 한다. 다른 이는 흠결을 ‘능력’과 비교해 판단하자고 제안한다.
‘출중한 능력에 비해 흠결은 새 발의 피 아닌가?’
정치는 전쟁이다. 전쟁에선 도덕만으로 승리할 수 없다. 비록 정의를 중시하지만 나는 도덕 절대주의자가 아니다. 거악을 제압하기 위해 권모술수와 작은 불의를 동원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본다. 전쟁이니 밀고 나가자는 견해에 동감하지 않는 바가 아니다. 하지만 전쟁과 다른 측면도 있다. 전쟁은 본래 총력전이다. 남겨진 사람 없이 모두가 두 편으로 갈라 싸운다.
‘정치’의 전쟁에는 ‘관객’이 존재하며, 이 관객들이 전사로 추가로 투입되는 전쟁이다. 도덕적 흠결이 반복되고 정의의 한계를 넘어서면 이 전쟁에서 진다. 왜 그런가? 관객으로부터 지원군이 더 이상 보충되지 않을 뿐 아니라, 최악의 경우 그들이 다른 쪽을 지원하기 때문이다. 정치로서의 전쟁에서는 불의와 권모술수가 너무 잦거나 일정 한계를 넘어 서면 안 된다.
처음부터 지나친 흠결을 가진 후보자들이 스스로 안 나왔으면 좋았겠다. 그리고 이런 흠결이 이제 더 이상 반복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싸우는 진보적 전사들도 피곤하다. 그리고 중원의 관객들이 지원을 거둘지도 모른다.
죽 쒀서 개 주는 사회는 멘붕을 야기하는 황당무계한 사회다. 반면 최후에 웃는 자가 승자가 되는 사회는 합리적이고 정상적인 사회다. 이 사회를 염원하며 많은 사람이 눈물과 피를 흘렸다. 일신의 영달을 뒤로하고 귀중한 청춘과 삶을 헌신한 민주투사들이 싸웠다. 1970~80년대 ‘운동권’의 벗들과 후배들이 기억나 눈물이 앞선다. 최근엔 1,000만 명 이상의 깨어있는 시민들이 엄동설한에 촛불을 들었다.
죽 쑨 작은 영웅들의 삶에는 이름도 빛도 없다. 심지어 일신의 영달만을 취하며 불의와 야합한 택도 아닌 새끼들로부터 운동권이라고 조롱당하고 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들이 마지막으로 웃는 사회, 이들이 궁극적으로 죽을 먹는 사회야말로 정의로운 사회리라. 이들이 웃도록 적절한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무튼 세상은 역설로 가득하구나. 이질적 행위자와 제도적 과정에 주목하는 제도 경제학이 맞다.
원문: 한성안 교수의 경제학 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