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에게 있어서 먹는 것은 그저 행위만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가 먹는 이유는 생존을 위해서가 1순위지만 ‘먹다’는 그것만으로 완벽하게 풀이되지 않습니다. 먹는 것에는 감정과 이성이 동시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소박하지만 사랑이 담뿍 담겨있던 외할머니의 시골밥상은 돌아가신 외할머니와 손자를 연결해줍니다. 팍팍한 일상을 홀로 살아가는 직장인에게 어릴 적 어머니의 김이 모락모락 나는 집밥은 힘든 현실을 살아가게 만드는 큰 힘이 됩니다. “우리 헤어져”라며 당장에라도 헤어질 것처럼 큰소리를 쳤지만, 문득 떠오른 과거 남자친구의 다소 부족하지만 사랑 넘치던 음식을 떠올리며 “미안하다”라는 말을 전하려 전화기를 듭니다.
먹는 행위를 하기 위한 음식에는 우리의 추억이 담겨있습니다. 좋은 날, 특별한 날, 무언가를 기념하기 위해서 반드시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음식입니다.
과거에 비해 현재의 음식은 매우 풍성합니다. 『빵 와인 초콜릿』의 저자인 심란 세티는 책을 통해서 생물 다양성이 사라지고 있다고 경고하고 있지만, 음식의 종류만 봐서는 풍족 그 자체입니다. 아무 노력 없이 음식을 맛보기도 좋고, 직접 만들어서 먹더라도 참 편리한 세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샐러드를 먹기 위해 다양한 채소를 사서 다듬지 않아도 되고, 드레싱을 만들기 위해서 과일을 갈고 여러 오일을 사지 않아도 되는 시대입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인류는 먹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먹히고 있는 것인지 의문점이 듭니다. 아마도 먹히고 있다는 것이 더 맞을 듯합니다. 먹기 위해서는 우선 내 몸이 원해야 합니다. 배고프다는 몸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뇌의 메시지를 더 받고 있습니다.
“오늘 나 너무 스트레스받았어. 음식으로 풀어줘!”
“다이어트를 하고 있지만, 오늘은 월급날이니까 날 위해서 달달한 디저트를 먹어야겠어!”
“아 배불러. 근데 기름진 걸 먹었으니 이를 달래줄 단짠 단짠한 음식을 먹어야 해!”
이렇게 우리는 몸의 메시지를 무시하고 욕망에 때문에 먹고 있습니다. 식물이 죽는 이유는 말라 죽는 것보다 물을 너무 많이 먹어서 죽는 이유가 더 많습니다. 부족한 것보다 과한 것이 더 위험합니다. 이는 인류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류에게 위협적인 것은 북핵보다 에볼라 바이러스보다 내 손에 있는 음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너무 많은 음식으로 인해 생겨나는 각종 병이 우리에게 더 위험합니다.
자본주의 세상 속에서 음식은 우리를 끊임없이 유혹합니다. 계속해서 먹으라고 시그널을 줍니다. 이런 시그널을 탈탈 털어낼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현대사회는 광고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고 있고, 이곳저곳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으며, 후각을 자극하는 다양한 음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먹는 것이 아니라 먹히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내면에 있습니다. 우리의 행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면의 목소리입니다. 외부의 자극이나 어떤 메시지에 유혹당하기보다 내 안의 목소리에 집중한다면 우리는 먹히지 않고 먹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음식 하나를 먹더라도 나를 위해 건강한 음식을 먹습니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과식을 하면 혹사당한 내장들로 인해 스트레스를 더 받습니다. 먹히지 말고, 먹는 것. 현대를 살아가는 작은 지혜입니다.
원문: 뻔뻔한 지성들의 르네상스&비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