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팀을 꼽으라면 아마 10명의 9명은 ‘해태 타이거즈’를 꼽을 것이다. 한국시리즈 9회 우승 기록은 아직까지도 깨어지지 않고 있으며, 아마 20년 이내에는 깨어지기 힘든 기록으로 보인다.
불세출의 투수 선동열을 필두로 이름만 거론해도 쉽게 떠올릴 수 있는 화려한 스타들의 집합소였다. 개성 강한 스타들이 한 곳에 모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일사불란한 조직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김응용 감독의 강력한 카리스마 리더십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타이거즈의 가장 인상적인 시즌을 꼽는다는 것은 옥석을 가려내는 것만큼이나 힘든 일일 수도 있다. 역대 한국시리즈에서 한 번도 물러나 본 적이 없는 강력한 지배력을 보여준 이 팀의 플레이는 눈에 보이는 수치 그 이상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객관적인 기록이나 팀 개개인의 능력 면으로 볼 때 전혀 뒤질 것이 없었던 라이온즈, 이글스, 트윈스도 결국 타이거즈의 벽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까지 타이거즈는 선동열을 앞세운 강력한 투수진과 김성한, 김종모, 한대화, 이순철 등의 막강한 공격력을 앞세우며 리그를 지배하였다. 그러나 국내에서 이룰 것은 다 이룬 선동열이 마침내 해외 진출에 대한 강력한 의사를 내비쳤고 당시 메이저리그에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진출한 박찬호 선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여론도 변하기 시작했다. 결국 강력한 여론의 지지를 등에 업은 선동열은 34세의 나이에 일본 프로야구 무대에 입성한다.
또한 한 시대를 풍미하였던 김성한도 95시즌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하게 된다. 이름만 들어도 화려했던 타이거즈의 중심 타선을 이끌었던 주역들이 하나둘씩 빠져나가면서 세대교체의 필요성이 대두되기 시작한다. 결국 95시즌 포스트 시즌 진출에 실패한 타이거즈에게 96시즌은 새로운 시험대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당시 94-95 두 시즌에 걸쳐 서울 연고팀인 LG와 OB가 나란히 한국시리즈를 제패하며, 바야흐로 서울 구단 전성시대를 열어젖힌 상황이었다. 영원한 지역 라이벌 롯데도 세대교체에 성공하며 더욱 탄탄해진 전력으로 96시즌을 맞이하게 되었고, 또한 아마 공룡 현대 피닉스를 모태로 아마야구의 주력 선수들을 싹쓸이하며 태풍의 눈으로 급부상한 현대 유니콘스의 등장 등은 선동열과 김성한이 없는 타이거즈에게 위협적인 요소가 되었다. 더욱이 96시즌 최대 신인이었던 박재홍에 대한 연고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현대 피닉스에게 선점당하며 ‘울며 겨자먹기’로 최상덕을 받아야 하는 등 뚜렷한 전력보강조차 이루어지지 못하며 암울하게 출발해야만 했다.
아니나 다를까 시즌이 시작하자마자 타이거즈는 그야말로 동네북 신세가 되었다.
‘포스트 선동열’은 다름 아닌 AMAZING 이종범
시즌 초반 내내 하위권에 맴돌던 타이거즈는 투, 타의 핵 이종범과 이대진이 각각 방위복무를 마치고 팀에 풀타임으로 합류하게 되면서 서서히 반격의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다. 결국 7월에 파죽의 12연승을 내달으며 시즌 초반부터 1위를 달리던 현대 유니콘스를 밀어내며 마침내 7월 31일 리그 1위 자리에 올라서게 된다.
타이거즈를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선동렬의 타이거즈 시대’와 ‘이종범의 타이거즈 시대’로 감히 분류해도 좋을 만큼 이종범의 활약은 타이거즈 공, 수의 모든 것이었다. 역대 최강의 1번 타자로서 타율 0.332, 홈런 25개, 타점 76점, 도루 57개라는 1번 타자인지, 4번 타자의 성적인지 헷갈릴 만큼 그는 팀의 공격을 앞장서서 이끌었다.
수비에서도 신인 김종국과 키스톤 콤비를 이루어 8개 구단 중 최강의 내야진을 구축하였다. 타이거즈 공격진 중에서 이종범을 지원사격한 선수들로는 홍현우(0.332 홈런 17개, 타점 67점)와 이호성(타율 0.258 홈런 9개, 타점 63점), 김종국 (타율 0.215, 홈련 11개, 타점 51점) 등이 있는데, 특히 고려대를 졸업하고 당시 타이거즈 역대 신인 중 최고 계약금을 받고 입단한 김종국은 시즌 타율은 0.215에 불과하였으나 홈런을 11개나 쳐내는 장타력을 과시하며 타점도 하위 타순치고는 상당히 많은 51점을 뽑아내며 알토란 같은 활약을 펼쳤다.
선동열이라는 우산이 없어도 비에 젖지 않은 그들
선동열이라는 투수는 최동원과 더불어 5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거물이었기에 타이거즈의 다른 투수들은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선동열이 특 A급이었다면, 다른 투수들은 A급에 속하는 수준급의 투수들이었다. 선동열이 없어도 타이거즈의 투수진은 리그 최강의 위용을 한껏 과시하였다.
선발진에선 이대진 (16승 8패, 평균자책 2.37), 조계현 (16승 7패, 평균자책 2.07), 이강철 (10승 9패, 평균자책 2.46)과 신인 김상진 (9승 5패, 평균자책 4.29) 등이 마운드를 이끌었으며, 허리는 임창용 (7승 7패, 평균자책 3.22)과 강태원 (4승 3패, 평균자책 2.78)이 착실하게 뒷받침하였다. 그러나 선동열이 빠진 자리를 과연 누가 메울 것인가에 대해 관심이 몰렸던 뒷문은 다름 아닌 ‘까치’ 김정수의 몫이었다.
시즌 초에는 아무도 예상 못 한 일이었다. 페넌트 레이스 보다는 포스트 시즌에서 더 좋은 활약을 펼치던 터라 ‘가을의 사나이’라는 닉네임도 지녔던 김정수는 페넌트레이스에서 마무리 경험이 전무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특유의 배짱투를 앞세워 6승 3패 18세이브 평균자책 2.01이라는 놀라운 활약을 펼친다.
86시즌 입단한 그가 공교롭게도 입단 후 처음으로 풀타임 활약을 펼쳤던 시즌은 다름아닌 선동열이 시즌 초반 부상으로 개점휴업한 92시즌으로서 당시에도 14승 8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3.16의 활약으로 이강철에 이어 팀내 최다승 2위를 기록하였다.
눈에 보이는 그 이상의 힘, 타이거즈 SPIRITS
한국시리즈에서 현대의 정명원에게 사상 최초 노히트 노런 게임을 당하는 수모를 겪으면서도 마침내 8번째 한국시리즈 타이틀을 거머쥔 타이거즈의 96시즌은 시즌 초반 전문가들의 예상을 보기 좋게 뒤엎은 것이었다. 당시 팀 타율 0.245 는 전체 5위에 불과한 것이었으며 팀 평균자책점은 3.14로 상당히 좋았지만 역시 1위가 아닌 전체 2위였다. 팀 내에서도 3할 타자는 이종범과 홍현우에 불과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뛰어난 집중력을 발휘하는 힘은 타 팀을 압도하기에 충분하였다.
눈에 보이는 수치 그 이상을 뛰어넘는 타이거즈의 강력한 힘은 김응용 감독을 필두로 일사불란하게 다져진 바로 ‘타이거즈 SPIRITS’에서 비롯된 것이다. 96시즌 타이거즈는 선동열이라는 대형 스타의 부재 속에서도 468,922명의 관중이 광주구장을 찾아와 역대 팀 최고 관중기록을 세웠다.
낙후된 시설로 악명을 떨쳤던 무등구장 시절을 뒤로하고 2014시즌부터 타이거즈는 광주 KIA 챔피언스 필드라는 메이저리그급 신식 야구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 시즌까지 챔피언스필드에서 포스트시즌이 치러진 적은 없었다. 무등야구장 시절 포스트시즌이 연례행사처럼 펼쳐졌던 시절에 비하면 상당히 낯선 풍경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올 시즌 타이거즈는 90년대 빨간 상의와 검은 하의만으로도 상대에게 공포감을 안겨줬던 해태 시절의 영광을 재현하고 있다. 압도적인 승률로 리그를 지배하는 타이거즈의 부활에 챔피언스필드의 20500석은 벌써 11차례나 매진을 기록했다.
2017시즌의 KIA 타이거즈가 1996시즌의 해태 타이거즈를 넘어서는 인상적인 시즌을 보내게 될 지 계속 관심이 모아진다.
원문: 나루세의 不老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