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6일 현충일을 맞아 경남에서도 추념식과 현충탑 참배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한은정 의원이 페이스북에 올린 사진을 보니 박진경 대령의 위패가 현충탑 중앙에 단독으로 서 있고 ‘경남도 대표’라고 적혀 있다. 깜짝 놀랐다. 현충일 경상남도 추념식에서 대표 인물로 내세운 위패가 박진경 대령이라니.
왜 하필 박진경이 경남 대표인가? 그는 1948년 제주 4·3사건 진압 사령관이었다. 그의 전임 9연대장 김익렬 대령은 시위대와 평화협정을 해야 한다는 온건파였다. 그러나 후임으로 부임한 박진경은 “우리나라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도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켜도 무방하다”며 무자비한 소탕 작전을 지휘한 학살 주범이다.
또 “양민과 폭도의 구별이 곤란하다”는 이유로 중산간 마을 주민들을 무조건 연행했다. 그런 강경 토벌 공로로 당초 중령으로 부임했던 그는 대령으로 진급했다. 제주도민, 특히 4·3사건 희생자 유족들에게는 원수 같은 인물이다. 결국 강경 진압에 불만을 품은 부하 군인들에게 살해됐다.
남해 출신인데, 고향 사람으로서 부끄러운 인물이기도 하다. 이런 자가 어떤 연유로 현충탑 앞에 대표 인물로 저렇게 서게 됐는지 궁금하다. 그를 현충일 ‘경남 대표’ 인물로 내세우는데 관여한 사람은 어떤 상징으로 박진경을 정했을까? 멋모르는 추모객들을 조롱하려는 의도는 없을까?
페이스북에 이 글을 올렸더니 오마이뉴스 윤성효 기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날 추념식을 준비한 창원시에 물어봤더니 “경남 출신 중 가장 계급이 높은 사람이어서 박진경을 내세웠다”고 대답하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제주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건 몰랐다. 잘 모르지만 혹시 동명이인이 있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단다.
경남 출신 중 가장 계급이 높은 사람이 박진경이라고? 우리 지역 역사에 정통한 박영주 형에게 전화를 해봤다. 그는 김성은 해병 중장을 추천했다. 김성은은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해병대, 아니 우리나라 군 역사상 신화적인 인물이다. 게다가 창원시 상남면 출신이다. 창원시 공무원의 변명이 무색해진다.
이런 자를 현충일 경남도 대표 인물로 내세웠다는 것은 뭔가 의미심장하다. 행사 준비 공무원 중에 ‘일베’가 있는 건 아닐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를 찾아보니 박진경은 일본 오사카외국어학교와 일본육군공병학교를 졸업한 일본군 출신이었다. 또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에 따르면 일제 말기 제주도에서 일본군 소위로 근무한 적이 있었다.
다음은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의 박진경에 대한 서술이다.
“박진경은 일본 오사카의 외국어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일제 말기에 제주도에서 일본군 소위로 근무한 적이 있었다. 해방 후 국방경비대 사령부 인사과장을 거쳐 남한 단독 정부수립 반대를 명분으로 발생한 4·3사건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48년 5월 6일 김익렬 중령에 이어 제9연대장에 임명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으로 제주도에 복무한 경험이 있어서 섬의 지형과 산악 요새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진경은 취임 인사에서 “우리나라 독립을 방해하는 제주도 폭동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고 천명할 정도로 미군정의 명령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러한 성격과 사상 때문에 전쟁도 아닌 시기에 제주도에 대한 초토화 작전을 펴려고 했다.
이런 초토화 작전의 공로로 제주 부임 한 달여 만에 대령으로 승진하게 되었다. 이 승진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된 술잔치를 마치고 제주농업학교에 있던 연대 본부 숙소로 돌아간 뒤 1948년 6월 18일 새벽 3시 15분 경 그의 무자비한 토벌 정책에 반기를 든 문상길 등 부하들에 의해 연대장 숙소에서 피살되었다.”
이밖에 박진경에 대한 자료로는 제주도 군경원호회가 주동이 되어 1952년 11월 7일에 세운 공적비가 있다. 제주 노형동에 있는 이 비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故) 육군대령(陸軍大領) 박진경(朴珍景) 추모비(追慕碑)
이 비(碑)는 당초(當初)에 세운 비(碑)의 비명마모(碑銘磨耗)로 내용식별(內容識別)이 어려워 서기(西紀) 1985년(一九八五年) 6월(六月) 일(日) 다시 세웠으며 원비(原碑)는 비(碑) 앞에 묻었음.
공(公)은 밀양박씨(密陽朴氏) 밀성대군(密城大君)의 후예(後裔)로서 생지(生地)는 경남(慶南) 남해군(南海君) 남면(南面) 홍현리(虹峴里) 36번지(三十六番地)에서 단기(檀紀) 4253년(四二五三年) 1월 22일(一月二十二日) 출생(出生)하셨다. 부인(婦人)은 남해군수(南海郡守)를 역임(歷任)한 진양정공(晉陽正公) 임환(任煥) 씨의 따님이다. 공(公)이 순직(殉職)하신 후(後) 양자(養子)로서 그 백형(伯兄)인 진용(珍鎔) 씨의 아들 익성(翊妵) 군을 입양(入養)하였다.
공(公)은 진주고보(晉州高普)를 졸업(卒業)하고 이어 일본(日本) 오오사카(大阪) 외국어대학교(外國語大學校) 영어과(英語科)를 졸업(卒業)한 후(後) 우리나라 광복(光復)과 더불어 국군(國軍) 창설(創設)의 주역(主役)으로 일익(日益)을 담당(擔當)하여 헌신(獻身)하고 국방예비대(國防警備隊) 총사령부(總司令部) 인사국장(人事局長)을 역임(歷任)한 후(後) 11연대장(十一聯隊長)으로 취임(就任)과 동시(同時)에 육군대령(陸軍大領)으로 승진(昇進)하여 제주도(濟州道) 공비소탕(共匪掃蕩)에 불철주야(不撤晝夜) 수도위민(守道爲民)의 충정(忠情)으로 선두(先頭)에서 지휘(指揮)하다가 불행(不幸)히도 단기(檀紀) 4281년(四二八一年) 6월18일(六月十八日) 장렬(壯烈)하게 산화(散華)하시다.
이에 우리 삼십만(三十萬) 도민(道民)과 군경원호회(軍警援護會)가 합동(合同)하여 그 공적(功績)을 기리기 위하여 단갈(短碣)을 세우고 추모(追慕)의 뜻을 천추(千秋)에 기리 전(傳)한다.
단기(檀紀) 4285년(四二八五年) 11월(十一月) 7일(七日)
제주도민(濟州道民) 급(及) 군경원호회(軍警援護會) 일동(一同)”
이 공적비에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은 ‘의의와 평가’라는 항목을 통해 이렇게 코멘트를 해놓았다.
“제주 4·3에 있어 박진경은 강경 진압 작전의 상징처럼 되어 있다. 그래서 제주도민들은 충혼묘지에 박진경의 추모비가 있다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심지어 철거해야 한다는 여론도 있다. 제주 4·3 진상 규명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재 박진경 추모비가 제주시 충혼묘지에 있어야 하는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