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사랑한 문구의 파란만장한 연대기 『문구의 모험』
김연수는 『소설가의 일』에서 이렇게 말한다.
일단 한 문장이라도 써라. 컴퓨터가 있다면 거기에 쓰고, 노트라면 노트에 쓰고, 냅킨밖에 없다면 냅킨에다 쓰고, 흙바닥뿐이라면 돌멩이나 나뭇가지를 집어서 흙바닥에 쓰고, 우주 공간 속을 유영하고 있다면, 머릿속에다 문장을 쓰자.
일단 그게 뭐든 써보라는 거다. 다음은? 매일 쓰는 거다. 소설가는 매일 쓰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소설을 쓰는 일은 몇 년이 걸리기도 하고, 십 년을 넘기기도 하고, 때로 평생을 다 바치기도 하는 것이다. 그게 바로 구스타브 플로베르나 레오 톨스토이나 제임스 조이스가 한 일, 그러니까 소설가의 일이다.
지우개가 가장 중요한 발명품이라고?
가끔 생각날 때 쓰는 사람이라면 몰라도 매일 쓰는 사람에게는 고도의 집중력과 창의력이 필요하다. 그것은 대단한 곳에서 오지 않는다.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매일 달리면서 그것을 얻는 작가도 있다. 카프카는 매일 헤엄쳤다. 철저한 채식주의자이기도 했던 그는 여름이면 몰다우 강에서 하루 1마일(1,600m) 씩 수영하고 날마다 시간을 들여 체조했다.
아주 사소한 것으로부터 집중력과 창의력을 얻기도 한다. 이를테면 매일 사용하는 필기도구나 노트 같은 것.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작가 로알드 달은 매일 아침 ‘딕슨 타이콘데로가’ 연필 여섯 자루를 뾰족하게 깎은 다음에야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분노의 포도』를 쓴 존 스타인벡은 글을 쓰는 내내 완벽한 연필을 찾아다녔다(그는 마침내 ‘종이 위에서 활강하며 미끄러지는’ 블랙윙 602에 정착했다).
헤밍웨이와 피카소는 몰스킨 노트를 고집했다. 기행문학 작가 브루스 채트윈은 몰스킨 생산이 중단된다는 소식을 접하고 평생 쓸 노트 100권을 주문하기도 했다. 제임스 워드는 색인 카드에 짧은 글을 쓰고 마치 퍼즐을 맞추듯 소설을 완성해나갔다.
사례는 수없이 많다. 노란색 리걸패드(메모장)에 작품을 쓴 노벨상 수상작가도 있었고, 포스트잇에 소설을 구상하고 완성한 이후에도 이것을 빠짐없이 보관한 작가도 있다. 이들은 문구를 사랑했다. 이들에게 문구는 단순히 적고 쓰고 지우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창의력의 샘물이자 마음을 가라앉히는 명장의 수단이었다. 전투에 나서며 갈고 닦은 칼이다.
미국의 저명한 출판 기획자가 세계 석학들에게 “지난 2,000년 동안 가장 중요한 발명품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한 미디어 이론가가 “지우개”라고 답했다고 한다. 지우개는 단순히 틀린 글을 바로잡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실수를 바로잡고, 중요한 사고의 전환을 가져오는 중요한 매개체라는 의미다.
인문으로서의 문구, 과학으로서의 문구
문구에 이처럼 인문학적 상상력만 녹아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문구는 과학에 가깝다. 발명의 역사이기도 하다. 클립과 압정은 더 작고 강하면서도 유연한 강철 소재를 더 값싸게 공급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준 산물이다. 지금의 종이 클립과 나무에 꽂을 수 있는 압정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탄성을 가진 강철 철사를 만드는 기술이 필요했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클립의 모양이 탄생하기 전까지 수십 가지 모양의 클립이 명멸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만년필과 볼펜은 더욱 그렇다. 19세기까지 유럽에서는 주로 깃털 펜촉(우리나라는 붓?)을 사용했다. 잉크를 몸통에 담은 펜을 만들기 위한 시도는 16세기부터 이루어졌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드로잉에는 잉크가 새지 않게 마개를 막은 잉크 통을 탑재한 펜이 나온다.
19세기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가늘고 유연한 금속 펜촉이 등장했다. 금속 펜촉은 깃털보다 오래 사용할 수 있었고, 싼 가격으로, 대량생산할 수 있었다. 금속 펜촉을 ‘바늘(빅토르 위고)’, ‘악의 근원(쥘 자냉)’이라고 무시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1884년 루이스 에드슨 워터맨이라는 사람이 최초의 만년필(아이디얼 펜)을 개발했다. 워터맨의 아이디어는 단순했지만, 워터맨의 펜에는 화학과 소재, 물리학이 담겨 있다.
펜촉에 잉크가 안정적이고 균일하게 흘러내리도록 디자인해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펜이 고무 배럴, 중력과 모세관 현상의 복합 작용 때문에 잉크를 끌어당기도록 펜촉에 일련의 틈이나 균열을 만들어야 했다. 지금은 간단해 보여도 당시로써는 상당한 수준의 정밀가공 기술이 필요했다. 이후 1913년 파커 펜 회사는 버튼 필러 시스템을 적용한 만년필을 개발했다. 펜촉을 잉크병에 담그고 꼭지에 달린 버튼을 눌러 잉크를 빨아올리는 방식이다.
얼마 후 만년필의 강력한 적수가 등장한다. 바로 볼펜이다. 신문사 기자로 일하고 있던 라슬로 비로라는 발명가는 신문을 찍는 인쇄기의 회전식 롤러를 보면서 비슷한 작동 방식으로 잉크를 담은 펜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인쇄기에 쓰이는 것과 같은 원통형은 한 방향으로만 움직인다. 펜은 어떤 방향으로도 굴러가야 한다.
카페에 앉아 이 메커니즘을 고민하던 라슬로의 눈에 구슬놀이를 하는 아이들이 눈에 띄었다.
머릿속에서 해결책이 번개 치듯 번뜩였다. 구형(求刑)이야!
지금의 볼펜이 그렇듯 펜촉 끝에 작은 쇠구슬이 달린 최초의 볼펜이 탄생한 순간이다. 1936년의 일이다.
실험실과 작업실에서 탄생한 문구의 뒷이야기
상당수의 문구는 실험실과 작업실에서 우연히 탄생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문구의 기능과 디자인은 엉뚱한 사연을 담고 있다.
형광펜의 납작한 모양은 계속되는 반복 작업에 화가 난 한 디자이너가 주먹으로 모형을 뭉개버리는 바람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 납작 눌린 모형에서 영감을 얻은 회사는 그대로 제품을 출시했다.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타빌로 보스(BOSS) 형광펜은 그렇게 탄생했다.
포스트잇은 접착력이 약해 창고에 보관했던 접착제가 우연히 메모지와 만나 탄생한 발명품이다. 1980년 3M은 1980년 광고와 함께 미국 전역에 이 제품을 출시했다. 그다음 얘기는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우리는 지금도 거의 매일 그 문구를 쓰고 있으니까.
‘런던 문구 클럽’의 창설자인 제임스 워드가 쓴 『문구의 모험』은 단순한 문구 책이 아니다. 문구류의 탄생과 흥망성쇠를 통해 ‘아주 사소한 물건’에 담긴 역사와 문화, 과학과 인문의 세계를 담았다. 무심코 쓰고 버리는 연필 한 자루, 클립 하나, 테이프, 메모지 한 장에도 실패와 성공, 환희와 좌절의 도전사가 교차한다. 조금 더 편하고, 값싸고, 오래가는 문구를 개발하기 위한 발명가와 기술자, 과학자들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곳에서 혼자 “유레카”를 외치고, 혼자 분루를 삼키기도 했다.
스마트폰과 노트북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시대, 사람들은 여전히 만년필과 연필과 다이어리를 사용한다. 글을 쓰고 적는 일은 항상 있을 것이고, 그럴 일이 줄어들기는 해도 그 기회는 오히려 더 소중히 여겨진다.
필기구가 사멸할 것이라는 예측과 달리 73만 달러에 달하는 만년필이 등장하기도 했다. 취향이 부의 상징이 되는 시대다. 나치 점령 당시 노르웨이 사람들은 클립을 꽂고 다녔다. 종이를 묶어주는 클립의 기능이 점령군에 대항하기 위해 단결하자는 저항의 상징이 된 것이다. 이처럼 문구는 인문학과 과학을 넘어 역사이기도 하다.
예술가들에게는 창조와 영감의 도구, 공부하고 일하는 사람에게는 일상의 무기이기도 한 ‘조용한 공로자’ 문구를 재발견하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책을 덮으면서 읽는 동안 밑줄을 그었던 연필을 다시 보게 되었다.
앞으로 조금 더 정성을 들여 깎아줄 생각이다. 내가 문구에 표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로.
원문: 책방아저씨의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