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해법으로 실시된 정책은 민간 부문의 부채를 국가 부채로 이전시켜 일단 위기를 넘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부채라는 건 어느 시점에서는 반드시 갚아야 하는 것이고 이 부채가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판단되는 순간 더 큰 위기가 시작되기 마련. 주요 선진국들이 이 급격하게 늘어난 국가부채를 갚을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로 제시되는 것이 바로 금융 억압(financial repression)이다.
Ⅰ. 급증한 국가부채
민간 부분의 부채를 국가 부채로 이전시키자 – 이 말을 풀이하면 정부 주도로 금융시장에 막대한 유동성을 공급하자는 뜻이다. 해서 일단 최악의 위기는 넘긴 것으로 평가되지만 이로 인해 주요 국가 중앙은행들의 자산 규모는 금융위기 직후 급격히 팽창하게 되었고 이 급격한 자산 팽창은 거의 다 국가 부채로 조달되고 말았다.
그러나 사실 인류가 이런 국가 부채의 급격한 팽창을 처음 경험하는 것은 물론 아니고, 그때그때 어떻게 해서든 해결은 해왔다. 아래 그래프를 보시면 2008년 금융위기 이전에도 제1차 세계대전, 경제 대공황, 제2차 세계대전 종전, 80년대 남미 국가들의 신용 위기 등을 전후해서 각국 국가 부채의 GDP대비 비율이 급격히 상승했다가 그 이후 감소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그리고 경제 대공황 당시의 국가 부채들은 주로 국가 부도사태와 해당 채무에 대한 채무 재조정 등으로 해결될 수 있었다. 물론 후폭풍은 상당했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 직후의 상황은 조금 달랐는데, 거의 30여년에 걸쳐 꾸준히 GDP대비 국가부채의 비율이 감소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경제학자들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을 비롯한 주요 국가들의 부채비율이 감소한 것에는 금융 억압(financial repression)이 상당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Ⅱ. 금융 억압(financial repression)이란 무엇인가?
금융억압으로 국가부채 비율을 낮추는 과정은 다음과 같다.
1. 지속적인 인플레이션 환경에서(급격한 하이퍼 인플레이션일 필요는 없다.) 정부는 명시적/암묵적 정책 및 자본시장 규제를 통해 민간 부문(금융기관들)이 국채를 보유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을 조성한다.
2. 여기에 현재처럼 풍부한 유동성 공급으로 인한 낮은 이자율 혹은 이자율 상한 제도를 통해 이자율 상승을 억업한다. 실질 금리는 ‘명목금리 – 인플레이션율’ 이므로 이 방법을 이용하면 국가 부채 발행으로 인한 이자부담을 상당히 줄일 수 있다.
3. 한발 더 나아가 실질 금리를 (-)로 유지시킬 수 있다면 부채 자체의 가치도 상당부분 줄여나갈 수 있을 것. 바로 이것이 2차 세계대전 이후 거의 30여년간 주요 선진국들이 사용한 국가 부채의 경감 방법이다.
Ⅲ. 금융 억압은 얼마나 효과적인 수단일까?
그렇다면 이 금융억압은 얼마나 효과적인 수단일까? 경제학자들은 여러 국가들의 경제지표를 장기간 시계열로 검토한 결과 그 효과는 상당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금융 억압을 실시하게 되면 대부분의 환경에서 연간 GDP의 3%에 해당하는 부채를 문자 그대로 증발시킬 수 있다고. 국가의 장기 정책 관점에서 볼때 이런 상황을 10년 정도만 유지해도 국가 부채의 약 반 정도를 경감시킬 수 있는 등, 효과가 엄청나다.
Ⅳ. 맺음말
현재 글로벌 차원에서 급증한 각국의 국가 부채를 경감시키기 위해서 정책 당국은 이 ‘금융 억압’을 꽤 매력적인 수단으로 보고 있다.
사실 금융억압의 실질은 세금이다. 왜냐하면 금융 억압을 통해서 국가 부채(국채)를 보유한 민간 부문의 부가 정부로 이전되는 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수단은 증세나 재정 긴축 같은 상대적으로 명시적인 정책 수단에 비해서 상당히 불투명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저항이 적은 편이고 잘 노출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불투명성이 각국 정책 입안자에게는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와, 실제로 이미 여러 나라에서 광범위하게 실시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런 금융 억압이 글로벌 차원에서 실시되고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시사점은 무엇일까? 아마 가장 중요한 점은 저금리 기조가 상당히 장기간 지속될 가능성이 매우 높고 어쩌면 실질금리가 (-)인 투자환경도 그 기간동안 상당한 빈도로 발생할 거라는 예측이다. 물론 풍부하게 풀린 유동성에 재갈을 못 물린다면 예상하지 못한 급격한 인플레이션과 동반한 금리 상승도 가능하다.
하지만 실질 금리를 낮게 유지하면서 민간 부문이 자국 국채를 보유하게 유도하는 ‘금융 억압’은 현재 급증한 국가 부채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정책 당국자들로부터 매우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있다는 점은 놓치지 말아야할 포인트다.
참조 자료
Carmen M. Reinhart and M. Belen Sbrancia, The Liquidation of Government Debt, NBER Working paper 16893
Financial Repression Back to Stay: Carmen M. Reinhart, Bloomberg View, 12 Mar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