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우스의 후손이자 아마존의 전사로 지구를 지켜온 원더우먼이 돌아왔다. 윌리엄 몰튼 마스턴이 마가렛 생어의 페미니즘 이론과 그리스 신화를 참조해 그린 만화를 DC코믹스에서 연재하기 시작한 것이 1941년, TV시리즈로 제작돼 큰 인기를 얻은 것이 1975~1979년이니 대략 40년만의 컴백이다.
원더우먼이 극장판 실사 영화로 제작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DC필름스는 배트맨, 슈퍼맨과 함께 왕년에 DC코믹스 세계를 주름잡던 슈퍼히어로들을 차례로 스크린에 부활시키고 있다. ‘원더우먼’은 DCEU(DC Extended Universe)의 네 번째 영화다.
1. 슈퍼히어로 첫 여성 단독 주연 영화
‘원더우먼’은 DC와 마블의 슈퍼히어로 영화를 통틀어 여성을 단독 주연으로 한 첫 작품이다. ‘어벤져스’의 블랙 위도우, ‘엑스맨’의 스톰 등 그동안 여성 슈퍼히어로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남성들 사이에 홍일점으로 끼어 있는 정도였다.
‘고스트버스터즈’ ‘스타워즈 에피소드 7’ 등 그동안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프랜차이즈 영화에서 매력을 뽐낸 여성 주인공들이 인기를 끌면서 1억 2,000만 달러 제작비를 들인 대작 ‘원더우먼’이 탄생할 수 있었다.
‘원더우먼’에 자극받은 마블도 브리 라슨을 주연으로 여성 슈퍼히어로 영화 ‘캡틴 마블’을 준비 중이다.
2. 여성 감독이 만든 여성 히어로
원더우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성조기를 본뜬 빨간색과 파란색 알록달록한 전투복을 입고 채찍을 휘두르며 남자들을 쓰러눕히던 모습이다. 1974년 처음 제작된 TV 영화에선 캐시 리 크로스비가 당시 유행하던 스판덱스 소재의 재킷과 긴바지를 입고 나와 이런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이듬해부터 3개의 시즌으로 제작된 TV시리즈 ‘뉴 어드벤처 오브 원더우먼’은 만화 속 원더우먼의 모습을 고스란히 재현했다. 린다 카터가 몸매를 드러내는 의상으로 시선을 잡아끌어 성 상품화 논란도 불거졌다.
2017년판 원더우먼은 이런 우려를 고려해 여성 감독에게 프로젝트를 맡겼다. 미국 최초의 여성 연쇄살인범을 영화화한 ‘몬스터’(2003)를 만든 패티 젠킨스 감독은 원더우먼의 성적인 매력보다 육체적, 지적 능력을 강조해 캐릭터를 만들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남자들이 슈퍼맨을 불필요하게 거대한 근육질 몸집을 가진 남자로 생각하는 것처럼, 원더우먼을 긴 다리에 큰 몸을 가진 여성 영웅으로 만들고 싶었다.”
갤 가돗이 연기한 원더우먼은 건장한 체구로 남자들을 압도하고 지구상의 모든 언어를 구사할 정도로 머리도 좋다. 그러면서도 남자들과 팀웍을 이뤄 전쟁에 나선다. 페미니즘 영화로 낙인찍히는 것을 원하지 않은 감독의 영리한 전략이다.
원래 DC코믹스 만화에서 원더우먼은 바이섹슈얼한 성적 취향을 갖고 있지만 TV시리즈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는 스티브라는 남성하고만 사랑에 빠진다.
3. 영화화 시도 21년만의 결실
원더우먼의 영화화 시도는 21년 전부터 있었다. 컴퓨터그래픽을 이용한 시각효과가 궤도에 오른 1996년, 코미디 영화를 주로 만들어온 이반 라이트만 감독은 산드라 불록을 원더우먼으로 만들려고 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유명 제작자 조엘 실버에게 프로젝트가 넘어가 2001년 안젤리나 졸리, 비욘세, 메간 폭스, 엘리자 더쉬쿠, 캐서린 제타존스 등이 물망에 올랐으나 각본이 계속해서 퇴짜를 맞으며 지연됐다.
2005년 실버는 시나리오 작가 조스 훼던에게 아예 감독까지 맡겼지만 그는 스스로 마음에 드는 각본을 완성하지 못하고 2007년 손을 뗀다. 원더우먼의 과거사를 다루고 싶어한 각본가들과 달리 실버는 원더우먼을 현대극에 등장시키고 싶어해 마찰을 빚은 것도 제작이 계속 중단된 원인으로 꼽힌다.
이후 허공을 떠돌던 원더우먼 프로젝트는 저스티스 리그를 부활시키려는 DC의 기획 중 하나로 다시 가동된다. 패티 젠킨스 감독이 합류하면서 1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지금의 이야기가 다시 쓰여졌다.
4. 원더우먼의 시작을 담은 영화
‘원더우먼’은 원더우먼 캐릭터를 설명하기 위한 영화다. 배트맨이 인간, 슈퍼맨이 외계인인데 반해 원더우먼은 반인반신이다. 아마존 데미스키라 왕국의 여왕이 흙으로 빚어 만든 딸로 태어난다. 수천 년간 여성들만 사는 이 왕국은 마치 여성판 ‘300’처럼 전쟁을 대비한 훈련이 일상화되어 있는데 다이애나도 전사가 되기 위해 혹독한 훈련을 받는다.
총알을 튕겨내는 건틀렛, 부러지지 않는 검 갓킬러, 진실을 말하게 하는 올가미, 기관총도 막아내는 방패, 혜안을 갖게 해주는 왕관 등 원더우먼만의 스타일링 아이템도 하나씩 성능을 시전하며 선보인다. 방패를 디딤돌 삼아 점프하고, 말에 거꾸로 매달려 활 쏘고, 손가락으로 돌담을 파내며 성벽을 오르는 등 선굵은 액션이 펼쳐진다.
어느날 독일군에 스파이로 잠입해 첩보를 빼낸 영국군 스티브 트레버 대위(크리스 파인)가 섬 앞바다에 불시착하고, 그를 통해 인간 세계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다이애나는 인간을 전쟁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18년 영국으로 모험을 떠난다.
순백의 여성에게 교양을 가르치는 ‘마이 페어 레이디’처럼 런던으로 간 세상 물정 모르는 다이애나는 스티브를 통해 인간 사회를 알아간다. 드레스를 입어보고 런던 여인의 행동을 따라해보기도 한다. 하지만 곧 그런 행동들이 스스로를 속여 자신을 더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여성의 투표권도 없던 시대에 다이애나는 당당하게 남성들만 가득한 군사령부 회의에서 사이다 발언을 날린 뒤 스티브와 팀을 꾸려 전장으로 향한다. 원더우먼은 어떤 상황에서도 들러리 취급을 거부하는 엄청난 결단력과 믿는 것을 과감하게 행동하는 용기를 갖춘 인물이다.
영화의 후반부는 그가 왜 아마존을 떠나 인간의 세상으로 왔는지를 설명하는 과정과 연관돼 있다. 이는 속편이 현대에서 벌어질 원더우먼의 활약상이 될 것임을 예고한다. 11월 개봉 예정인 ‘저스티스 리그’에서 원더우먼은 배트맨, 슈퍼맨, 아쿠아맨, 플래시, 사이보그 등과 함께 다시 한 번 등장할 예정이다. 역시 갤 가돗이 연기한다.
5. 이스라엘에서 온 여신 갤 가돗
갤 가돗은 원더우먼의 시작이자 끝이다. 그가 없었다면 원더우먼은 지금처럼 매력적으로 부활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시원하게 뻗은 각선미로 펼치는 우아한 액션 동작, 엉뚱하지만 밝고 낙천적인 성격, 지적이면서 순수한 얼굴 표정 등은 선의 수호자로서 원더우먼의 등장을 관객에게 제대로 각인시킨다.
가돗은 이스라엘에서 태어난 유태인으로 조부모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다. 178cm의 훤칠한 키에 한때는 농구 선수를 꿈꾸기도 했다. 2004년 미스 이스라엘에 선발돼 미스 유니버스에 출전한 적 있고, 스무 살 때인 2005년엔 군에 징집돼 2년간 교관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제대 후 로스쿨에 진학해 법을 공부하던 중 오디션에 합격해 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얼굴을 알린 것은 ‘분노의 질주: 더 오리지널’(2009)에 지셀 역으로 출연하면서부터다.
그의 데뷔작이 ‘007 퀀텀 오브 솔라스’가 아닌 이유는 우크라이나 출신 올가 쿠릴렌코가 배역을 차지해 가돗의 출연이 무산됐기 때문이다. 미안해진 캐스팅 디렉터는 대신 ‘패스트 앤 퓨리어스’ 시리즈에 가돗을 캐스팅했다.
이후 그는 이스라엘 드라마와 할리우드 영화를 오가다가 2016년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2016)을 시작으로 원더우먼의 커리어를 시작했다.
사실 DC와의 인연은 원더우먼이 처음은 아니다. 가돗은 22살 때인 2008년부터 이스라엘의 부동산 개발업자 야론 바르사노와 결혼해 두 딸을 키우고 있으며, ‘맨 오브 스틸’(2013)에도 출연을 제안 받았으나 당시 임신 중이어서 거절했다. 출산 후 원더우먼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원더우먼 역을 놓고 이번에도 올가 쿠릴렌코와 경합을 벌였다는 것이다. 가돗은 원더우먼 역을 소화하기 위해 검도, 쿵푸 킥복싱, 카포에이라, 브라질 주짓수 등을 연마했고, 2016년엔 여성권리 명예대사로 선정돼 ‘원더우먼’으로서 유엔에서 연설을 하기도 했다.
원문: 유창의 무비믹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