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읽지 못하는 건지, 메뉴판을 멀쩡히 앞에 두고도 이것저것 가격을 물어보던 남자는 결국 가장 싼, 아메리카노를 시키곤 꼬깃꼬깃 손안에 쥐고 있던 2천 원을 내밀었다. 내가 두 손을 뻗어 돈을 받는 순간, 그 남자는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서둘러 내 손을 빼고, 눈앞이 새하얘진 채로 커피를 내렸다. 그가 몇 마디 말을 걸었지만 대충 네네, 대답만 했다. 잔을 그에게 내미는 순간, 또 그의 두 손이 내 손을 잡았다. 하얀 그의 손은 아기 손처럼 부드러워서, 더욱더 소름이 끼쳤다.
다음날, 그 남자는 비슷한 시간에 다시 왔다. 또 내 손을 잡았다. 나는 몸서리를 치며 돈을 받았고, 다행히 늦게까지 있던 아르바이트생이 있어 커피를 내줄 때의 봉변은 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원래 그 시간에는 아르바이트생이 없는 날이기 때문에 나는 오후부터 안절부절못하였다. 그의 부드러운 손의 감촉이 내 손등에 계속해서 남아 있었다.
엄마가 내 눈을 똑바로 보라며 연습을 시켰다. “돈 거기 놓으세요!”라고 단호하게 말해봐. 불안해하는 나를 보고 아르바이트생은 고무장갑을 끼고 응대하는 것은 어떠냐고 했다. 그러겠노라고 했다. 다행히, 다행히도 그는 오지 않았다.
하루가 지나서야, 그제야 욕지기가 올라왔다. 씨발, 저리 가! 라고 하면 될걸. 카페 바로 옆에 붙어있는 부동산에는 아버지가 계셨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전화로 아빠를 부르면 되었다. 나는 위험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하루 종일 불안했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나를 어떻게든 할 수 있는 ‘남자’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실만으로도 나는 며칠 동안 불안하고 무서워해야 했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아주 어릴 때 일이다. 언덕 위의 아파트에 으레 있는, 놀이터에 산길과 통하는 개구멍이 있었다. 그런 길이 으레 그렇듯, 재미있는 데다 지름길이었기에 아이들끼리는 항상 그리로 다녔다. 어느 날, 친구 한 명과 동생 손을 잡고 산길을 타고 올라와 개구멍으로 들어오자, 경비아저씨가 멀리서부터 우리를 불러 세웠다.
지금 생각하면 별일 아니지만, 나는 내가 엄청난 잘못을 했다고 생각했다. 아저씨는 같이 있던 친구와 나를 같이 놀이터의 공용 화장실 빈칸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벌이라며 팬티를 벗으라고 했다. 내 음부를 만지작거리며 아프냐고 물었다. 나는 아프지 않았지만, 벌이니까 아프다고 해야 할 것 같았다.
평범하게 제사를 지내는 유교 집안에서 자라났다. 우리 부모님은 나를 당연히 ‘남자 없이’ 자립해서 살아갈 수 있는 멀쩡한 아이로 키우셨기 때문에, 나는 어릴 때부터 ‘시집 잘 가야 한다’는 사촌 언니들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명절날 어른들이 엄숙하게 절을 하며 제사를 지낼 때, 왜 사촌 오빠와 남동생만 불려 가서 같이 절을 하고, 사촌 언니들은 방 안에 앉아 티브이를 보고 있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제사를 지냈던 넓은 상에는 남자들끼리만 밥을 먹고 여자들끼리는 좁은 상에 불편하게 끼어 앉아야만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린 마음에 화가 나서 엉엉 울었다가 되려 아빠에게 혼이 났다.
어릴 때의 성희롱도, 집안 어른들에게 당하는 성차별도, 이 정도는 안 받아본 여자가 대한민국에 하나도 없다는 데 내 두 손모가지를 건다. 하지만 사실 가장 무서운 건 내가 어른이 된 뒤, 평범한 어른 집단에서다. 민감하다, 예민하다며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일이 두려웠다.
공대를 졸업했고 이후에는 반도체 회사에 다녔기에 10년 넘게 내 주변엔 90%가 남자들이었다. 다리가 굵다고, 화장을 안 했다고, 살이 쪘다느니 빠졌다느니 하는 외모 품평은 기본이었고, ‘여자가~’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걱정과 충고들은 애정으로 생각해야 했다.
실제로 여혐이란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는 아저씨들이 대부분이었다. 마음은 착하니까, 진짜 내 생각해서 하는 말이니까. 나는 안 그래도 화를 잘 내고 이 사람 저 사람과 싸움 많기로 유명했다. 그 수많은 ‘사소한’ 언어적인 폭력과 희롱에 일일이 대응하며 학교와 회사에 다니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온라인의 페미니스트들이 불편했다. 나도 기득 남성들의 횡포가 싫지만, 나에게 그건 현실이었다. 나는 그냥 적당히 화내고 적당히 이해하며 적당한 행복을 느끼면서 살고 싶었다. 고요한 나 대신 화를 내주는 그들이 오히려 불편했다. 나를 흔드는 게 싫었으니까.
어느 순간 천천히, 페이스북에 페미니스트 친구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카페가 한가할 때마다 그들의 글을 읽었다. 불편하지 않은 나를 발견한 건 회사를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와서 생긴 변화임을 깨달았다. 멀리멀리 이사 온 탓에 이전 인간관계들이 많이도 끊겼다. 만나고 싶지 않은 이들은 연락하지 않으면 되었고, 억지로 대화해야 하는 상대가 없어졌다. 나는 이제 불편함을 불편해하지 않아도 되었다. 자유인이 된 것이다.
낙성대 사건 기사를 읽다가 맞고 도망간 여자에게 감사할 줄 모른다며 비난하는 댓글들에 화를 냈더니 가계정을 ‘조인성’으로 만든 자가 내 담벼락에까지 나타나서 똘페미라며 욕을 해댔다. 나는 이상하게도 약간 기뻤다. 더 이상 눈치 보지 않아도 되는 존재로 인정받은 것만 같았다. 똘페미가 그런 것이라면, 욕을 해준 그에게 감사하다.
원문: 김장군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