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제대로 성공한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우리는 언제 자기 자신이 ‘성공했다’라고 느낄까? 혹은 반대로 우리는 언제 내 인생은 실패이고 무의미하다고 느낄까? 이러한 질문들의 답은, 우리가 어떤 것을 보고 자랐는가와 큰 관련이 있다.
고래등 같은 집에서 많은 노예들을 거느리고 사는 사람을 성공한 사람이라고 보고 자란 사람은 자기 자신도 고래등같은 집과 노예들을 원할 것이다. 화려한 밍크코트를 입고 다니는 여성을 성공한 사람으로 보고 자란 사람은 자기도 언젠가는 밍크코트를 입고야 말 것이며 그때야말로 자기가 성공했다고 느낄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견해가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내가 노예를 거느리고 싶다는 것은 누군가를 노예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내가 밍크코트를 입고 싶다는 것은 수많은 밍크들을 죽여서 그 가죽으로 코트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내가 더 큰 땅을 가지고 싶어 하는 것도 대개는 남이 가질 땅을 빼앗아야 한다는 뜻이 되기 마련이다.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성공에 대해서 구질구질한 견해가 퍼져있다. 그것은 ‘내가 법과 절차를 어겨도 무슨 일이 안 생기고 다른 사람들을 주눅 들게 하고 명령을 내릴 수 있게 되는 것이 곧 성공’이라는 견해다.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새치기를 해도 되는 사람, 돈을 횡령해도 문제가 안 생기는 사람, 갑질과 성추행을 해도 문제가 안생 기는 사람이 되는 것을 성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세상에 많다.
이것도 우리가 제대로 성공한 사람을 보고 자라지 못한 이유가 크다. 성공한 사람들이 그렇게 사는 것만을 봤기 때문에 그런 것을 성공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또한 이것도 사회적 문제를 만든다. 갑질과 추행이 성공의 증표가 되는 사회가 불행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은 뻔한 일이 아니겠는가.
성공에 대한 낡은 견해는 역사적인 맥락도 크다. 나무가 많을 때는 그 나무 좀 베어다가 집도 짓고 땔감으로 쓰는 것은 그다지 큰 사치가 아닐 수 있다. 그런데 나무가 없으면 같은 일을 해도 그 일은 지나친 사치가 되고 거의 범죄가 될 수 있다.
수십 년 전에, 혹은 수백 년 전에 성공한 사람들이 누렸던 사회적 특권과 삶의 방식은 그때는 그래도 큰일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심지어 그런 관습은 사회적으로 이익이 되는 측면도 있었을 수 있다. 하지만 같은 행위가 현대에는 말도 안 되는 범죄일 수도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낡은 가치관을 바꾸는 것
한국이 가진 문제는 사회의 외형은 엄청나게 변했지만 사람들의 관습과 가치관은 그렇게 빨리 변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왕과 대통령을 구분하지 못하고, 판서와 장관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니까 자연히 시민들은 백성으로 인식되고 직원들은 머슴으로 인식되고,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여자들은 기생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봉건제에 대한 진보란, 좋은 왕을 뽑는 게 아니다. 진보란 공화정을 하는 것이다. 진정한 진보는 지금 있는 가치관 위에서 공정한 세상을 만드는게 아니다. 애초에 그런 가치관이 허구라는 것을 밝히고 새로운 가치관 위에서 세상을 보게 되는 것이고 그 결과 더 행복해지는 것이다.
노동자의 권익 운운하면 진보라고 말하면서 정규직 직원들이 비정규직 직원들을 외면하면 그것이 진보인가? 그건 머슴이 머슴 따위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하는 게 아니라 머슴도 머슴을 거느릴 수 있는 좋은 세상을 만들어 보자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중요한 것은 낡고 구질구질한 가치관을 바꾸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열심히 공부해서? 그것도 한 방법이겠지만 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열심히 하는 게 아니다. 왜냐면 내가 뭔가를 열심히 한다는 것은 지금의 가치관 위에서 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노력도 중요하지만, 노력만으로는 안 된다. 뭔가를 얻으려고 하는 치열한 노력은, 오히려 가장 치열하게 지금의 관점에서 뭘 받아들일까를 선택하는 일이 되고 만다. 이래서는 정답이 코앞에서 소리를 질러대고 있는데도 그 정답에게 좀 조용히 하라고 윽박지르면서 정답을 찾아 헤매는 일처럼 되기 쉽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래서 오히려 그냥 왠지 한번 해보고 싶어서 하는 것 중에서 나온다. 노력을 하는 게 아니라, 재미있으니까 그냥 한번 해보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진보는 여가 시간이나 취미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들이 자기가 생각한 대로 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관습대로 사회적 통념대로 산다. 그렇게 학교를 다니고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며 사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회적 통념은 낡은 성공의 가치가 뿌리 깊게 스며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이 온전히 그저 성적을 내기 위해 학교 다니고 먹고 살기 위해 돈을 버는 것뿐이라면 우리는 낡은 보수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삶이 우리를 그렇게 만든다. 월급봉투만을 위해 사는 사람은 오직 더 큰 월급봉투만이 삶의 목적이라는 가치관에 점점 더 빠져들게 된다.
이제까지 보수정치세력을 지지한 사람의 절대적 다수가 오히려 여유가 없는 사람, 바쁜 사람들 사이에서 나왔던 것은 이런 이유다. 이들은 ‘엘리트 코스를 벗어나면 죽는다’라든가 ‘사람이 아끼고 절약하면서 살아야지 낭비하면 길바닥에 나서게 된다’든가 ‘회사가 나의 삶 전부이니 직장을 그만두는 것은 죽음과도 같다’든가 하는 식의 사고를 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에 여가시간을 가지고 그것을 즐길 수 있는 정신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그 시간에 무엇을 할까? 하고 싶은 것을 한다. 만화책을 볼 수도 있고 산책을 하거나 산에 갈 수도 있고 영화관에 가거나 클럽에 갈 수도 있으며 술을 마실 수도 있다. 촛불 집회나 공부 모임에 갈 수도 있다.
뭘 하던 하고 싶은 것을 한다. 하고 싶을 것을 하는 가운데 그들은 서서히 낡은 성공의 가치관에서 빠져나오게 된다.
돈이 성공의 증거라고 믿었지만 여가 시간을 가지다 보니 값싼 짜장면도 행복을 주고, 그저 강가를 산책하거나 벤치에 앉아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읽는 것도 행복을 주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값비싼 해외여행이나 화려한 리조트에 가는 게 아니라 집 앞에서 텐트를 쳐도 나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또 그러다 보면 돈이 있어도 너무 바빠서 혹은 정신적 여유가 없어서 가진 것을 행복을 위해 쓸 수 없는 사람도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여유를 가지고 세상을 보니 자신이 성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구질구질하게 보이게 되는지에 놀랄 때도 있다.
출세하기 위해서 돈을 더 벌고 유명해지기 위해서 어떤 구질구질한 일을 하고 거짓을 숨기고 양심의 가책을 받고… 그렇게 사는 것을 보면 저게 정말 성공일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심지어 성공한 정치인들에서도 그런 모습들을 흔히 보게 되지 않는가?
‘최소한의 물질적 여유’의 가치
그래서 나는 진보를 위해서는 최소한의 물질적 여유가 필요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물론 그것은 최소한이며, 세상에는 그 최소한의 물질적 여유를 훨씬 넘겨서 가진 사람들이 정신적 여유가 없어서 자기 삶을 낭비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그들은 이미 너무나 가진 것이 많은데도 더 많이 가지기 위해서 기회주의적으로 행동하고 범죄를 저지른다. 가진 것을 지킨다고 싸우기 바쁘다. 그 결과 가진 것을 즐긴다는 시간은 사실상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구질구질한 가치관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게다가 안타깝게도 이런 사람들은 대개 선입견에 빠져서 기회와 에너지와 돈과 시간을 낭비하는 경우가 많다. 가끔 멈춰 서서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를 돌아볼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바쁘기만 하고 효율도 좋지 않다.
진보는 옳은 일을 하기 위한 게 아니다. 인간이 행복한 게 진보다. 그러니까 진보주의자는 행복한 사람, 멋진 사람이어야 한다.
물론 인간이 왜 고민이 없고 고통이 없겠는가. 나는 하나도 없다고 말하면서 득도한 고승을 흉내 내는 것은 진보를 종교로 만들고 만다. 그건 옳지 않다. 나의 방식이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거나 나와 다르게 살던 사람이 갑자기 나와 똑같이 살 수 있다고 말하는 것, 이렇게만 살면 세상의 모든 고민과 불행이 사라진다고 말하는 것은 진보가 아니라 사이비종교에 가깝다.
진보가 되기 위해 복잡한 책들을 읽고 어려운 이야기를 하면서 골머리를 싸매야 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세상에서 가장 착한 사람이나 가장 성스런 사람이 되는 게 진보가 아니다. 그건 대개 어떤 이데올로기의 노예가 되고 만 것으로, 오히려 보수에 가깝다. 완성된 형태의 이데올로기가 존재한다는 것은 이미 그런 사상이 낡은 것이라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신선한 생각은 언제나 좀 부실하고 엉성하다. 신선하니까 그렇다. 신선한 생각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약간의 상식과 감수성뿐이다.
크고 복잡한 체계를 가진 사고는 사실 이미 죽고 없는 사람들의 보수적 생각이다. 우리는 그걸 존중하고 기꺼이 그들의 친구가 되어야 하지만 그들의 노예가 될 필요는 없다.
진보는 게으르고 뻔뻔한 사람의 철학이다. 진보는 여유를 가지고 행복을 추구한다. 그리고 남에게 “나는 이렇게 해보니 괜찮던데, 너도 해볼래?”라고 말할 뿐이다. 그런 권유가 성공이 뭔지에 대한 사회적 시각을 바꿀 때, 그때가 진보가 성공하는 때다.
우리는 이제 투사 이상으로 ‘매니아’나 ‘오타쿠’가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다. 도시에서 텃밭을 가꾸며 사회적 개혁가인 척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당신은 그저 텃밭 매니아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게 진보다.
원문: 나를 지키는 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