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정치적으로 상당한 열세에 있는 쪽은 그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서 적극적인 이슈 메이킹을 시도한다. 그리고 그 이슈를 적극적으로 부각시키고 ‘개조론’을 언급하면서, 다시 거기에 참여하지 않거나 적극적이지 않은 젊은 층을 사회적 참여와 의무의 이름으로 비판하며, 자신들에 대한 지지를 호소한다.
이상의 인용된 문단을 읽어보면 – 2002년 대선 정국 이래, ‘참여하는 시민 및 촛불소녀’ 등의 이미지를 만들고 청년 및 젊은 층의 정치참여와 투표율 상승을 독려하면서, 거기에 응하지 않는 이들을 “20대-대학생 개새끼론”이라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혹독히 비판하던 2007년 이후의 정국을 상상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오늘날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보다 오래된 시절, 즉 1930년대의 이야기이다.
‘청년’의 탄생
전근대 사회에서는 ‘어른 이하의 존재’가 ‘작은 어른’일지언정 어떤 특별한 의미를 가진 주체로서 인식되지는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여서 1920년대 이전에는 ‘청년(靑年)’이라는 말이 있긴 했으나 그것은 전통적인 ‘자제(子弟)’의 개념과 함께 사용되는 것이었다. 즉 ‘자식과 동생들’처럼 교육을 받아서 소양과 능력을 갖추어야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수동적인 이들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1920년대의 조류는 ‘청년’의 개념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3.1운동 뿐만 아니라 러시아 혁명, 신문화운동, 동구권의 독립 등등 국제적인 정세는 조선도 뭔가 할 수 있으리라는 상당한 기대감을 주었다. 조선에서는 이러한 기대가 사회진화론적 감수성과 결합하였다. 즉 실력양성운동의 전통적인 맥락을 계승하면서도, 국권을 상실하고 완전한 근대화에 실패한 선배세대들을 대신해 민족을 ‘개조’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새로운 세대와 청년에게 투영되었던 것이다. 특히 3.1운동에서 학생의 참여-주도는 이들이 그러한 자격을 가지고 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는 확신을 보장해주는 것이었다.
이에 이광수, 송진우, 장덕수, 진학문, 장덕준 등 우파 민족주의 계열은 종래의 실력양성론의 과정을 ‘사회개조’와 결합하면서 『동아일보(東亞日報)』,『학지광(學之光)』, 『개벽(開闢)』등의 신문-잡지를 통해 자신들의 ‘청년 담론’을 펴나가기 시작했다. 이들은 “구(舊)한 현상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노인파(老人派)와 신(新)한 현상을 음미하는 청년파(靑年派)의 사상충돌”로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설명하였고, 조선에서 과거와 급격히 단절하면서 새로운 생명을 불러일으키는 사명을 달성할 사람들은 “용감하고 지혜롭고 고결한 청년”밖에 없다고 강조하기에 이른다.
그렇다면 명시적으로는 정치적 참여가 제한된 조선사회에서, 과연 어떤 사회활동을 통해서 청년들의 참여를 요구할 것인가? 이에 거시적으로는 ‘문화운동’이 강조되고, 조선인의 대부분이 농민이고 문맹이라는 점에 착안해 이들에 대한 교육운동, 계몽운동이 구체적인 방안으로 제시되었다. 특히 1930년대에는 농촌계몽운동이 『동아일보』계열 스스로의 주도로 인해 활성화되면서 더욱 결합되게 된다.
이러한 『동아일보』계열의 우파민족주의자들의 이슈 메이킹은 상당히 성공적이어서 당시 신문들은 적어도 3~4면에는 반드시 청년 및 청년회 관련 기사를 게재할 정도였고, 지역 유지들의 협찬과 자금지원으로 청년회 역시 1920년에는 694개이던 것이 1922년에는 2004개로 두 배 가량 증가했다. 청년회는 “사회혁신의 도리오 사회경신의 생명”이자 “사회활동의 근원이오 사회 전진의 세력”으로 칭송되면서 사회변혁의 ‘전위’로 강조되기에 이르는데 이는 식민통치국 일본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성격의 것이었다.
물론 이들에게 있어서 청년이라고 무조건적으로 이러한 사회적 위상을 부여받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앞서 말한대로 청년들은 문화운동과 그 구체적 방안으로서의 농촌계몽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사회에 본보기가 되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수양’을 다하여 민족의 ‘개조’에 공헌한 도덕적 인격-위상을 가져야만 비로소 인정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처럼 식민지 조선의 변혁과 ‘개조’를 ‘청년’들이 문화운동-농촌계몽을 통해서 이끌어가기를 바랬던 『동아일보』계열 우파들의 소망은 과연 실천되었을까?
환멸과 실망
1920년대 후반~1930년대가 되자 문화운동 및 교육활동, 농촌계몽의 담론은 ‘실제적으로 거둔 성과의 문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파 내부의 담론전개의 문제와 사회주의의 조합운동에 대응해 뭔가 하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문제로 발전하였다. 즉 민족주의 우파의 ‘이슈 파이팅’ 측면에서라도 운동은 계속 추진되어야 했으며, 이 과정에서 여전히 ‘청년’의 참여는 중요했다. 아니, 청년은 운동의 추진력이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정치세력의 미래 담보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이들의 소망과 달리 학생 및 청년들의 참여는 쉽지 않았다. 좌파의 영향을 받은 청년들의 경우 ‘수양’을 통한 청년의 지위라는 자체를 공공연히 비웃었고, 도시 출신 혹은 거기서 생활-성장한 청년들에게 농촌에의 귀농은 물론 농촌계몽운동 참여를 요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동아일보』 계열의 우파 이데올로그였던 이윤재가 스스로 “우리 조선사람은 (청년의) 수양은 아주 우스운 것으로 안다.”라는 탄식을 내뱉었던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이 같은 탄식이 곧장 환멸과 실망으로 이어지는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동아일보』계열이 새롭게 발간하던 잡지인 『신동아(新東亞)』에서는 「이론에서 실행으로 : 신년의 신서원」(1932년 1월 )을 통해 청년들이 이상론(즉 마르크스주의 등)만을 따르지 말고 실천(농촌계몽)에 참여하라고 주장했고, 「자타(自他)를 위하야 – 여름휴가를 이용하자」(1932년 7월호)에서는 다시 청년들에게 여름방학을 이용해 도시의 향락을 탈출하고 계몽운동에 참여하기를 호소하기도 했으며, 「청년에게 아뢰노라」(1932년 2월호, 이광수)에서는 청년들의 나태함과 쾌락향유를 규탄하면서 사회 참여를 요구하기도 했다. 이러한 개인주의 규탄의 분위기에서 나온 것이 바로 청년 문제론. 즉 “1930년대의 20대-대학생 개새끼론”이라고 불릴만한 성질의 것이었다.
『신동아』1933년 7월호에 게재된 박병철(朴炳哲)의 「계몽운동의 실적과 금년의 준비」라는 기고문은 이러한 시각의 전이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개별 학생들의 가정적 사정이 있으리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1년에 10여일을 베어내어 남을 위하는 것이 과중한 희생이오 못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라고 규탄하면서, “전문학교생(당시의 대학급)과 여학생은 왜 동원하지 않는가?”라며 이를 문제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조선의 전문학교 학생, 즉 20대 대학생이라고 할 만한 이들 중에서 계몽운동에 참여하는 이들은 총 140여명밖에 되지 않는다는 통계를 제시하면서, 정작 이 운동에서 선두가 되어야 할 ‘청년’들의 참여가 저조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 원인을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학생은 개인의 향락과 이기에 눈이 밝아져서 발을 벗고 팔을 걷어 나서기를 꺼려하는 듯 싶다. 그들 중에는 입으로는 위대한 인물, 위대한 사업을 부르짖으나 그들의 마음속에는 적고 큰 것의 판별력이 마비되었으며, 그 그릇된 자존심과 궤도를 벗어난 허영시의 지배를 받아 하기방학을 헛되이 보낼 뿐만 아니라 학창생활을 또한 그렇게 허송하고 마는 것이다.
기고문은 문제의 핵심 원인을 학생 개인의 이기주의와 (도시생활에서의) 향락에 돌리면서도, 또한 당시에 상당수 존재하던 ‘맑스뽀이’들에 대한 비판도 내비치는데, 이는 “입으로만 위대한 인물(마르크스, 레닌)과 위대한 사업(혁명)을 부르짖는 학생”들에 대한 비판으로 구체화되었다. 물론 필자는 단순히 학생들에 대한 비판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당시 도시적 향락 생활의 대표를 달리는 것으로 간주되던 ‘모단껄’ 즉 여학생에 대한 비판도 결코 빼놓고 있지 않다.
또한 조선 여자의 최고학부인 여자전문학교에는 이 운동, 아니 촌 어린이들에게 ‘가갸’를 가르치는 일에 한 사람도 참가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 원인이 너무나 명백하다. 특히 조선 어린 여성의 전부가 문맹으로 일생을 보낸다는 조선 현실을 살피고 고향의 어린 동생들을 불쌍이 여기는 마음이 추호라도 있다면 그들에게 ‘가갸’, ‘123’을 십여일 가르치는 것이 무엇이 못할 과중한 부담이랴. 차라리 이러한 자각이 없는 여성은 우리 순진한 농촌에 허영의 씨를 뿌리고 그들에게 물을 들일까 염려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이러한 언급을 통해 필자는 여학생들이 참여하지 않은 것을 전적으로 그들의 개인적인 참여정신 부족으로 돌리면서 그들을 최소한의 긍휼조차도 가지지 못하는 이들로 간주한다. 특히 이들의 참여 부재는 ‘모단껄’의 문제점, 즉 도시생활에 오염된 허영심과 사치의 문제로 간주되기에 ‘순수한 농촌’에 물이나 들이지 않으면 다행이라는 식의 서술도 마다하지 않는다.
하지만 필자는 여학생들에 대한 ‘여우의 신포도’를 연상시킬 정도의 자기위안적 서술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가 희망을 찾는 새로운 대상은 따로 있기 때문이다.
중등학교(고보 등)에는 배재나 휘문, 중앙같은 학교는 다수 참가하여 그 실(實)함을 얻었다. 우리는 이 지식의 대중화-일반화를 위하여 노력하는 중등교생들의 노력을 재삼 감사하는 동시에 금년에도 어린 동생들에게 ‘가갸’를 가르쳐주려고 다투어 먼저하기를[爭先]하여 나오기를 바라는 바이다.
즉 ’20대 전문학교 학생들에게는 실망과 비판을 할 수밖에 없지만 10대의 중등학교 학생들은 열심히 계몽운동에 참여해주고 있으니 감사할 뿐’이라는 서술을 통해, 10대가 실망한 20대의 새로운 대안이자 희망으로 주목되고 있다. 여기서 1930년대 우파 이데올로그들의 다급함과 당혹감, 실망을 읽을 수 있겠다. 하지만 과연 필자(박병철)가 주장하는 것과 같이 이것이 모두 ‘참여정신’의 부재 문제에서 기인되는 문제였을까?
실상
이처럼 학생 탓을 하며 절규하였지만, 얼마 뒤인 1933년 10월에도 고작 남자 전문학교생이 153명, 여자전문학교생이 26명이 참여하였을 뿐이다. 큰 폭의 증가인지도 논쟁의 소지가 있을 뿐더러 운동의 대상이 될 전국을 상정하면 턱도 없는 숫자이다. 더욱이 여전히 운동 전체에서는 남성 중등학생이 70%를 구성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었을까? 이는 개인 탓으로 돌리기에는 실제적인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1930년대는 세계대공황의 여파로 사회-경제에 전반적인 충격이 가해졌던 시기였다. 『동아일보』나 『신동아』스스로가 ‘취업난, 구직난’의 시대라고 부를 정도였던 당시의 시대 상황이, 학생 개인에게는 전술한 글의 필자가 언급한 ‘개인 가정의 사정’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생업에 종사하는 학생이 속출하고 전문학교 졸업생들에게 취직이 눈앞의 문제인 와중에서, ‘지식인의 의무’에만 호소하는 담론이 성공할 수는 없는 것이기도 했다.
또한 여학생의 경우 필자는 1년에 10여일도 참여하기 힘드냐고 절규(?)했지만, 지금도 어른이 거의 다 된 여학생이 10여일을 부모 곁을 떨어져 외지에서 지낸다고 하면 꺼리는 부모들이 많다. 당시는 어떠했겠는가? 특히 농촌계몽운동의 사회적 성행과는 별개로 거기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열악한 조건과 환경-시설에서 분투해야 했고 여학생의 참여를 유도하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중등학생의 참여가 많다고 경탄했던 사정도, 당시의 중등학교(그나마도 남학교)는 농촌계몽운동을 형식만 자발로 하였을 뿐이지, 이를 사실상 방학 중 필수봉사활동처럼 운영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중등학교 참여율이 높은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전문학교 학생 정도가 되면 이미 사실상 성인으로서 이를 ‘강제’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 사실상 소수의 사명의식을 가진 이들만 남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을 뿐이다. 이러한 사정을 알기에 『동아일보』계열의 영향력 하에 있던 보성전문학교조차도 ‘계몽운동’에 강제로 동원될 수 없었던 것이다. 주도하는 이들조차도 실제로는 이런 현실을 잘 알고 있었던 까닭이다.
또한 계몽운동은 그 자체의 딜레마에 빠져있었는데, 조직운영상으로 주도하던 『동아일보』조차 자금난을 겪어 지방 유지는 물론 참여학생 본인에게조차 비용 및 운영분담을 요구하는 상황에 있었고, 이에 따라 청년회 및 농촌계몽운동 조직의 운영도 사실상 힘들어졌다. 또한 총독부 권력을 염두에 둔 상황에서 단순한 기본지식의 전달 이상의 역할을 과연 넘어설 수 있는지의 문제, 계몽운동을 통해 학습자들에게 무엇을 지향하도록 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지향과 목표가 명확하지 않다는 문제 등이 대두되었다.
이에 이들이 주도하는 농촌계몽운동은 1930년대 말에 총독부 주도의 농촌운동에 비해 독자성을 가지지 못하게 되며, 그에 따라 총독부의 제한-탄압이 이루어지면서 추진력을 잃고 점차 흡수되어가기에 이른다. 위기의 원인을 젊은이들의 소명의식-참여의식 부재에서 찾고 거기에 여성혐오의 성향까지 덧붙였지만, 정작 자신들의 내재적 한계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며
식민지 조선에서 이러한 담론이 등장할 수 있던 것은, 몇몇 학자들에 의해 논의되는 것처럼 식민지 현실일지라도 조선에도 근대성이 공유되고 그 가운데서 근대적 담론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민 대다수가 문맹인 농민인 현실에서, 그런 ‘근대성’을 담지하고 실천해나갈 수 있는 사람의 수는 적었으며, 이에 약간의 근대적 지식이라도 갖춘 학생-청년들에게 과한 기대와 희망을 걸 수밖에 없던 것은 역사적으로 어쩔 수 없던 상황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러한 나름의 시대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청년 개개인의 책임과 참여의식에 의존한 담론은, 실질적인 조직기반의 문제와 거시적인 전망-전략의 부재로 인해서 스스로 무력화되어갔을 뿐이었다.
마찬가지로 근래의 한국사회에서도 ‘학생’에게 상당한 기대를 걸었던 정치담론이 있었고, 이들을 대변하는 언론들은 1920~30년대의 『동아일보』가 무색할 정도로 이슈 메이킹과 이슈 파이팅을 주도하였으며, 1920년대의 ‘민족개조론’을 연상시키는 ‘국민개조론’이 논의되기도 하였다. 그 와중에서 1933년의 박병철을 연상시키는 모 시사쟈키가 등장하기도 하였으며, 세간에서는 ‘20대-대학개새끼생론’이라고 불릴만한 인식이 회자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역시 1930년대의 근본적인 문제는 그대로 내재한다. 조직 측면에서도 종래의 운동권은 힘을 잃어가고 있으며, 저항의 단위로 기능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조직단위인 노조 역시 힘을 잃어가고 있고, NGO는 체제 내에 포섭되어가고 있다. 또한 보수세력에 대항한다는 이들조차도 작게는 ‘국민개조론’, ‘반MB’, 크게는 ‘반독재’의 담론을 넘어서지 못하고 새로운 거시적 상과 지향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경제 민주화’, ‘복지국가’ 등의 의제는 제시는 되었지만 그에 대해서 광범위한 공감과 합의는 물론 이해도 얻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12월 19일의 선택은, 현 상황에 구구히 의존하고 있는 민주화 세력의 ‘마지막 승부수’가 될 것이다. 승리한다면 이러한 정치적 담론은 약간의 휴식을 얻고 그 사이에 다른 대안과 전망의 형성을 준비할 시간이 있겠지만, 거기서 만일 패배한다면 이런 현 상태가 어떤 길을 걷게 될 것인가? ‘반성의 시간’을 가지고 새롭게 거듭날 것인가? 아니면 1930년대 말의 지식인들처럼 그 한계를 느끼고 실망 속에서 사회전반이 침잠하는 분위기로 나아갈 것인가? 알 수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