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덕후와 취존, 그리고 애국과 오덕질
‘취존’이라는 말이 있다. 취향존중, 즉 남이 어떤 취향을 갖고 있든, 어떤 캐릭터를 흠모하든, 어떤 조합(?)에 열광하든 그건 그들 나름의 선택이라는 것이고, 여기에 대해 존중하라는 것이 동인계를 비롯한 일본 문화상품 핵심 향유층, 즉 ‘덕후’들의 세계에선 불문율이 되어 있다.
이 ‘존중’을 하지 못하는 자들은 ‘취좆’, 즉 취향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마구 얻어맞는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국가 사랑’에 관해선 개인의 취향, 선택의 자유가 인정되지 않는 것 같다. 광복절이 다가옴에 따라 하루만이라도 덕질 (여기서 말하는 덕질은 물론 일본 문화상품 덕질이다)을 자제하고 소중한 우리 나라와 광복절의 의미를 되내이자는, ‘애국 장려’의 목소리가 떠돌아다닌다.
그러나 거의 매년 이런 주장을 접할 때마다 드는 의문이 있다. 첫째는 “왜 ‘덕질’을 자제해야 하는가?” 즉 덕질(혹은 덕후)과 광복절 혹은 애국의 관계는 대체 무엇인가 하는 점이고, 둘째는 “내가 왜 애국을 해야 하는가?”라는 보다 근본적인 부분이다. 미리 답 비스무리한 걸 내놓자면, 오덕질을 한다고 해서 그게 비애국적 행위가 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애국을 안 한다고 해서 그게 문제가 되는 것 또한 아니다.
1. 덕질은 비애국적? 그것이야말로 국가주의, 전체주의적 사고
평소에 일본의 문화상품을 한껏 소비하고 즐기던 사람들이, 애국을 논하며 하루만이라도 이를 자제해야 하지 않겠냐는 말을 하는 것을 볼 때면 대단한 위화감이 든다. 만약 ‘덕질’이 ‘비애국’적인 일이라면, 이런 주장이 하필이면 광복절과 같은 시점에만 나오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평소에는 덕질하면서 죄책감에 안 시달리는 것인가? 혹은 그런 죄책감을 이겨내면서까지 덕질을 해왔던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던, 일본의 문화상품을 소비하는 행위가, 일본의 과거사를 성토하는 자리에선 이상하게도 연좌제 처벌의 대상이 된다. ‘덕후’들의 이런 과민반응은 그들이 평소에 머글덕후가 아닌 사람들에게 받아왔던 대우에서 비롯한 일종의 자기방어기제라고 해석해볼 수도 있다. 애국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일본 문화를 향유하는 덕후들은 쉽사리 매국노 취급을 받고, 비애국자 소리를 듣는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공격’을 받을 때마다 (이런 부조리한 사회 분위기에 대해 의문을 품는 것과는 별개로) 필사적으로 그렇지 않다, 나는 비록 일본 문화를 향유하고 있긴 하지만 나라를 배신할 파렴치한은 아니다 라고 스스로를 변호했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머리는 반일, 하반신은 친일’이라는 우스갯소리마저 나오고 만다.
일본 문화를 향유하는 것으로 비롯되는 이런 외부의 공격을 막고, 매국노의 이미지를 상쇄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보다 한층 더 강하게 애국심을 ‘보일’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이런 가운데 ‘비난의 대상이 될만한 행동을 하는’ 다른 구성원, 즉 이런 애국심의 표현을 거부하는 다른 덕후들에 대해서는, 더욱 강한 내부적 제재와 배제가 필연적으로 가해지게 된다.
이는 남성우월주의자들의 주장에 편승해 ‘된장녀’를 비난하는 여성들이나, 기성세대의 ‘20대 개새끼론’에 편승해 같은 세대를 까는 20대들의 모습과 대단히 닮아 있다.
2. 신성불가침 국가주의: 성찰은 일본뿐 아니라 한국에도 필요하다
사실 이런 현상은, 앞서 말했듯 덕후들만의 문제도 아니고, 그들만의 탓도 아니다. 국가를 마치 신성불가침한 절대적 가치처럼 포장하고, 나라를 위해 충성하고 몸 바칠 것을 요구하며, 일본과 관련된 뭔가만 나오면 아무리 작은 것에도 광기를 일으키며 거부감을 보이는 사회 전반의 문제이다.
하지만, 일본 애니메이션을 즐겨본다고 해서, 그게 국가와 민족 혹은 ‘애국지사’들에 대한 모독이 될 수는 없는 것이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대체 일본 애니좀 보는 게 애국이니 뭐니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런 사회적 피해망상 내지는 과민증 내지는 전체주의적 사고를, 덕후들조차 아무 비판 없이 그대로 답습하고, 재생산하고 있다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일제강점이나 위안부와 같은 역사에 대한 평가는 반드시 필요하다. 제국주의적 침략, 수탈, 그리고 이 싸움에서 무참히 희생되어간 많은 사람들, 그리고 농락당한 여성들의 권리에 대한 문제제기는 물론 중요하고, 이런 과거에 대한 성찰을, 그들의 과거를 정당화하고자 하는 일부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는 내셔널리즘의 관점이 아니라, ‘인간 보편의 권리’라는 관점에서 접근하고, 성찰해야 할 문제이다. 이렇게 접근하다보면, 이런 성찰의 과제가 비단 일본에게만 주어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왜 세계 2차 대전이 시작되었는가?
그들이 무슨 논리로 그렇게 참혹하게 다른 나라의 국민들을 학살할 수 있었는가?
그들이 어떻게 그들의 목숨을 희생해가며 전쟁에 가담했는가?
그 중심엔 국가를 위해서라면 개인은 얼마든지 희생되어도 괜찮다는 국가주의적 사고방식이 있었고, 국가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하지 않는 것은 곧 죄악이라는 사회 규범이 있었다. 그런데 광복절을 대하는 한국인들, 심지어 어디까지나 개인의 선택인 ‘덕질’마저도 ‘국가를 생각해서’ 자제하자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이와 과연 무엇이 다른가?
3. 애국은 ‘취향’일 뿐, 애국의 강제는 군국주의 국가를 낳는다
국가는 목적이 아닌 수단이다. 국가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가 될 수 없다. 오히려 국가가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하지만 이 사실은 너무나도 쉽게 망각되며, 국가는 인간에 우선하는 ‘목적’의 자리로 너무 쉽게 기어오른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으로서의 가치, 인간으로서의 권리, 인간의 자유의 확보는 뒤로 미뤄지며, 때로 국가를 위해서 희생될 수도 있는 것이라는 취급을 받는다.
국가를 위해 인간이 희생되는 현상은 우리 주변에서 너무 쉽게 볼 수 있다. 국가에 비판적인 국민들을, 국익에 거스른다는 이유로 잡아넣어 형사재판을 진행한다. 국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외국인들을 탄압하고, 구타하고, 쫓아내며, 때로는 대량학살까지 진행한다. 전쟁은 국가를 위해 인간이 희생되는 대표적인 예이다. 일본에서 재특회 등의 보수집단에 의해 온갖 위협을 다 받는 재일조선인들도, 마찬가지로 ‘일본이라는 국가를 위한’ 희생양이 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국가와 국민은 종속의 관계에 있지 않다. 국민은 국가를 위해 충성하거나, 맹목적인 사랑을 해야만 하는 존재들이 아니며, 그것이 결코 국민의 의무가 될 수도 없다. 국가와 국민은 일방적이고 수직적인 관계에 위치하지 않는다. 국민은 국민으로서의 최소한의 의무, 즉 납세와 병역과 근로와 환경보전과 교육과 적절한 재산권 행사와 준법 등의 의무만 수행하면 된다. 국가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 인간다운 삶, 자유, 안전, 공공복리를 제공할 의무를 수행해야만 한다.
이는 마치 거래와 같다. 국민은 인격체가 아닌 국가를 사랑할 필요가 없다. 그저 국가와 국민간에 존재하는 헌법상의 의무들을 수행하면 그것으로 족할 뿐이다. 애국은 의무가 될 수 없고, 따라서 국가를 사랑하지 않는 게 죄가 될 수도 없는 것이다. 물론 애국을 할 수도 있다. 국가를 사랑하는 건 개인의 자유이다. 하지만, 애국은 어디까지나 ‘취향’이다. 즉, 그 사랑을 남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당연히, 국가를 사랑하지 않는 자를 두고 죄인 취급하는 것도 안 될 일이다.
취향이 강요되는 순간, 이 취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나쁜놈이 되어버리고, 그 가운데, 국가보안법으로 인해, 애국자법(Patriot Act)으로 인해 무고한 피해자들이 생겨난다. 국가 권력에 대한 비판은 힘을 잃는다. 위안부 등의 희생자를 낳았던, ‘피해자로서의 한국’이 너무나도 잘 아는, 바로 그 참혹한 시대가 재현될 수도 있다.
4. 그 누구의 취향도 간섭하지 말라
정리해보자. 당신이 나라를 사랑하는 덕후라면, 당신의 덕질이 행여 애국에 상처가 되지는 않을까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당신이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덕후라면, 혹은 나라를 사랑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덕후라면, 그냥 그대로 살면 된다. 중요한 건 ‘덕질’과 ‘애국’ 모두 어디까지나 개인의 ‘취향’이며, 개개인은 이 취향을 존중받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 또한 (이미 잘 알겠지만) 이 취향을 서로 존중해줘야 한다.
내가 리바이X에렌을 밀라고 모두에게 강요할 수 없는 것처럼, 내가 핑키파이와 플러터샤이를 좋아한다고 해서 레인보우대쉬를 미는 친구녀석을 손가락질하지 않는 것처럼, 내가 덕질을 한다고 해서 누군가에게 비애국자라는 말을 들을 이유도 없으며, 내가 비애국자라고 해서 누군가에게 비난을 들을 이유도 없는 것이다.
취향이란 그런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