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여인들>이라는 거창한 제목의 이 영화는 마이크 밀스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올해 골든글로브 작품상,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고, 아카데미 각본상에도 노미네이트되었습니다.
영화는 1979년 캘리포니아 산타 바바라를 배경으로 합니다. 등장인물은 세 명의 여인들과 두 명의 남자입니다. 세 여인들은 1920년대에 태어난 엄마, 1950년대생인 세입자, 1960년대에 태어난 여자친구입니다. 이 관계들은 모두 15세 제이미(루카스 제이드 주만)를 기준으로 한 것입니다. 그의 엄마는 하숙집을 운영하는 도로시아(아네트 베닝)로 40살에 제이미를 낳았고, 애비(그레타 거윅)와 윌리엄(빌리 크루덥)이 하숙을 하며 한 집에 살고, 어릴 때부터 친했던 줄리(엘르 패닝)가 자주 놀러옵니다.
인물들을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도로시아는 싱글맘입니다. 대공황 시대에 태어나 세계대전 때 파일럿이 되고 싶었지만 전쟁이 끝나는 바람에 포기하고 남자들만 가득한 회사에 취직했습니다. 그곳에서 남편을 만나 마흔 살 늦은 나이에 제이미를 낳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혼하죠. 내면은 자유로워도 겉으로는 절제된 삶을 사는 여성입니다. 제이미가 사춘기를 겪으면서 점점 아들과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 그녀는 초조해합니다. 도로시아는 이렇게 읊조립니다.
네가 태어났을 때 나는 네게 인생은 매우 크고 알 수 없는 거라고 말했지. 동물들, 도시들, 음악… 너는 사랑에 빠질 거고, 열정을 가질 거고, 의미들을 갖게 될 거라고 말이야. 하지만 지금 1979년엔 아무것도 의미 있지 않아. 나는 너를 매일 점점 적게 알아가고 있지.
도로시아는 애비와 줄리에게 제이미가 좋은 남자가 될 수 있도록 돌봐달라고 부탁합니다. 다른 남자에게 부탁하는 게 낫지 않겠냐는 애비에게 도로시아는 남자보다는 여자가 더 도움이 될 거라고 말합니다. 이 영화를 굳이 몇 가지 코드로 분류하자면 1979년의 시대, 소년의 성장기, 페미니즘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페미니스트인 애비는 이후 제이미에게 큰 영향을 끼칩니다.
애비는 뉴욕에서 펑크클럽 죽순이 생활을 하다가 자궁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안 뒤 새 삶을 살게 된 20대 후반의 여성입니다. 그녀의 엄마는 애비를 낳기 전 유산한 경험이 있어 DES라는 약을 복용했는데 이 약이 딸에게 자궁암을 유발했다는 의사를 설명을 듣고 괴로워합니다. 애비는 엄마의 자책을 견디지 못해 엄마에게서 멀리 떨어지기로 결심하고 산타 바바라로 옵니다.
염색한 빨간색 머리가 트레이드마크인 애비는 사진 작가입니다. 자신 주변에서 발생한 모든 것을 찍습니다. 사는 곳, 주변 사람들, 소지품 등이 그 사람을 말해줄 수 있다고 믿고 작품을 만들어 갑니다. 그녀는 한때 히피 생활을 하던 또다른 하숙생 윌리엄을 좋아하지만 그가 도로시아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는 제이미와 줄리에게 산타 바바라를 떠나라고 말합니다.
줄리는 하숙생은 아니지만 이 집에 매일 찾아오는 소녀입니다. 제이미의 어릴 적 단짝 친구이기도 한 그녀는 제이미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와 친구 이상으로 가까워지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제이미를 좋아하고 의지해 매일 밤 몰래 2층 제이미의 방 창문으로 들어와 그와 같은 침대에서 자고 갑니다. 섹스는 하지 않고 대화하고 잠만 잡니다.
어느날 줄리는 제이미에게 다른 남자와 카섹스를 했는데 임신했을까봐 두렵다고 털어놓습니다. 이에 제이미는 새로 나온 임신 테스터기를 사다 줍니다. 두 사람은 함께 여행을 떠나지만 줄리는 여전히 섹스를 거부하고 이를 견디지 못한 제이미는 결국 그녀를 떠납니다.
제이미는 이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15살 소년입니다. 그는 엄마가 자신을 과잉보호하려 한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 복잡한 소녀 줄리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애비의 영향을 받아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여기게 된 그는 학교 친구에겐 호모라고 놀림을 받습니다.
“남자들은 항상 여자들을 위해 무언가를 고쳐야 한다고 생각해. 하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지.”
“저는 그런 남자가 아니에요.”
“그래,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할 테지.”
도로시아와 제이미의 대화입니다. 엄마는 페미니스트가 되어가는 아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애비에게 더 이상 제이미를 급진적인 페미니스트로 만들지 말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애비는 그만둘 생각이 없습니다. 오히려 여성의 생리현상을 금기로 여기는 문화를 조롱합니다. 그녀는 병원까지 함께 가 준 제이미에게 암 후유증으로 자궁 막이 얇아져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털어놓고, 이후 두 사람은 더 가까워집니다.
<20세기 여인들>은 한 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영화입니다. 세 여성과 두 남성의 사연을 챕터별로 나눠 전개하며 그들이 여기까지 오게 된 사연과 현재 느끼는 감정을 보여줍니다. 마치 애비가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찍는 사진처럼, 긴 서사보다는 단편적인 여러 순간들이 모여 또렷한 잔상을 남기는 그런 영화입니다.
영화의 배경인 1979년은 미국 역사에서 보자면 20세기 자유로웠던 시대의 마지막 해입니다. 스매싱 펌킨스의 노래 ‘1979’처럼 아련하게 돌아가고 싶은 향수를 대변하는 시기이기도 한데요. 그해 지미 카터는 소비와 환락이 임계점에 달해 절제가 필요하다는 연설을 하며 사회를 조여가기 시작합니다. 이듬해 레이건 정부가 들어서며 자유로운 영혼의 시대는 막을 내립니다.
영화에는 여러 종류의 록 음악이 등장합니다. 대공황 시대에 태어난 도로시아는 록 음악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받아들이려 애쓰고, 미국 재건기에 태어난 애비와 히피들의 시대에 태어난 줄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록 음악을 즐깁니다. 영화 속에서 토킹 헤즈와 블랙 플랙으로 대표되는 펑크 록 음악은 세대를 구분 짓고, 또 같은 세대 내에서도 갈등을 만듭니다. 그만큼 20세기는 다양한 생각들이 분출되고, 또 융화되는 용광로 같은 시대였습니다.
영화의 후반부에 감독은 등장인물들이 이후 어떻게 성장해가는지 하나씩 보여줍니다. 임신 못 할 줄 알았던 애비는 결혼해 두 아이를 낳고, 삶을 불안해하던 줄리는 가정을 꾸립니다. 윌리암도 정착하고, 제이미도 결혼해 아들을 낳습니다. 그들은 모두 지금 우리처럼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베이비붐 세대에 속한 인물들입니다. 단 한 사람, 20세기 마지막 해에 폐암으로 죽은 도로시아를 제외하고 말이죠.
“엄마가 죽은 뒤 나는 결혼해서 아들을 낳았다. 하지만 아들에게 죽은 할머니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방법을 찾지 못했다.”
아마도 제이미의 이 마지막 내레이션이 감독이 영화를 만든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20세기를 살아보지 못한 세대에게 그 시절을 설명할 방법은 이처럼 직접 보여주는 것밖에 없으니까요. 시대에서 밀려나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늘 당당한 도로시아 역을 맡은 아네트 베닝의 연기가 영화를 더 생생하게 만들어줍니다.
20세기 여인들 ★★★★
- 1979년 마지막 자유의 시대의 자화상.
원문: 유창의 무비믹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