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먹고 오랜만에 정연주 전 KBS 사장과 전화통화를 했다. 방배동 성당에서 열린 아드님 결혼식 때 뵌 이후 근 5년 만이다. 자주 연락드리지 못한 것은 분명 후배인 나의 잘못이다. 그래서 백배 사죄드렸다.
그러나 여기에도 구차한 핑곗거리는 있다. 미루어 추측건대 박근혜 정권이 들어선 이후로는 그나마 있던 언론계 선후배 모임마저 와해하다시피 했다. 모임이 없다 보니 뵐 기회조차 줄어든 셈이다. 근황을 여쭈었더니 해마다 이맘때면 꽃 알레르기 때문에 고역이라고 하셔서 내달 중순에나 몇이 한번 찾아뵙기로 했다.
‘조중동’은 정연주 사장의 ‘작품’이다. 한겨레 논설주간 시절이던 2000년 10월 24일 자 한겨레 ‘정연주칼럼’(‘한국신문의 조폭적 행태2’)에서 ‘조중동’을 처음으로 작명하여 언급하였다. (칼럼 중 “한국신문의 60% 이상을 장악하고 있는 ‘조중동’(조선 중앙 동아)은 모두 이런 제왕적 권력을 휘두르는 세습 사주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에서 처음으로 ‘조중동’이 등장하였다.)
조중동은 그간 한국사회에서 패권적 수구 언론(주로 신문)의 상징어로 통용돼 왔으며 지금도 그 잔상은 여전히 남아 있는 실정이다.
2000년대 초반 ‘조중동’에 상응하는 말이 생겨났다. ‘한경대’였다. 한겨레, 경향신문, 대한매일의 첫 글자를 딴 말이다. ‘대한매일’은 90년대 후반부터 한동안 불린 서울신문의 옛 이름이다. 김대중 정부 출범 후인 1998년 봄 서울신문 주필(상무)로 취임한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서울신문의 뿌리 찾기 일환으로 제호를 대한매일로 바꾸었다. 서울신문의 전신은 일제 때 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이며, 매일신보는 다시 구한말 민족지 대한매일신보에서 유래하였으니 나름으로는 근거가 있는 셈이다. (김 주필이 물러난 뒤 대한매일은 다시 종래의 서울신문으로 제호를 환원하였다)
김 주필의 권유로 98년 8월 중앙일보에서 서울신문으로 옮긴 나는 특집부에서 친일파 연재를 근 반년 가까이하였다. 연재가 끝난 후 나는 내가 제안하여 신설된 미디어 면을 맡아 혼자서 꾸려나갔다. 그때 내가 지어낸 말이 ‘한경대’였다. 신문사 사세로 본다면 비교가 되지 않았지만 당시 ‘한경대’는 ‘조중동’에 맞서 보수언론의 수구적 행태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상징어처럼 여겨졌다. 바로 그 ‘한경대’가 지금은 ‘한경오’로 바뀌었다. 대한매일 자리에 오마이뉴스가 들어갔다.
적어도 언론계 안팎에서 진보언론의 상징처럼 여겨져 온 ‘한경오’가 지금 세간의 따가운 비난에 직면해 있다. 연일 예리한 칼날에 베이고 날카로운 화살을 맞고 있다. ‘한경대’의 작명자이자 오마이뉴스 편집책임자를 지낸 인연으로 요즘 나는 착잡한 심정을 부인하기 어렵다.
한경오는 태생적으로 야성(野性)을 가졌다. 한겨레는 87년 6월 항쟁의 옥동자로 세상에 선을 보였다. 경향신문은 이승만 시절 폐간사태를 겪는 등 야당언론으로 시작했으나 박정희-전두환 시절 순치돼 어용언론 시절을 보낸 후 한화그룹 시절을 거쳐 종업원 지주제 회사로 거듭나면서 비판적 언론으로 탈바꿈했다. 2000년에 창간된 오마이뉴스는 출발부터 대안언론을 표방했다.
작금의 사정과는 별개로 한경오 3형제는 이 땅에 참언론과 진보적 가치 실현을 위해 노력해온 사실을 그 누구도 부인할 순 없다. 보수정권하에서 한경오는 더없이 빛을 발했으나 진보·민주정권이 들어서면서 입장(혹은 언론의 정체성)에 일부 혼란이 온 것도 부인할 수 없다.
특히 노무현 정권 들어 한경오는 ‘시대적 불화’와 조우하게 됐다. 참여 정부 시절 가없는 언론자유를 구가하였음에도 한경오는 정권과 갈등관계를 빚게 됐다. 한 예로 요 며칠 페북 등에 오르내리고 있는 ‘노무현 정부 정책에 대한 입장 비교’라는 표가 그것이다. 표에는 경향신문 하나만 언급돼 있는데 사실은 한경오 셋 모두 비슷한 형국이다. 노무현 정권이 힘주어 추진했던 몇몇 사안, 즉 이라크 파병, 한미 FTA 체결, 스크린쿼터 축소, 새만금 간척사업, 평택 대추리 대집행, 대연정 등을 놓고 참여정부와 한경오 3형제는 갈등을 빚었다.
지금에 와서 결과를 두고 보자면 참여정부의 판단이 옳았던 것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그러나 당시 상황에서 한경오 3형제는 적어도 진보적 가치, 공동체적 가치에서 볼 때 반대 입장에 설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되는 측면이 많았다고 본다. 이는 비단 한경오 뿐만이 아니라 범 진보진영, 심지어 노사모 일각에서도 동조했던 사안이었다.
그밖에도 신문사 차원에서 추진한 것은 아니었으나 간헐적으로 돌출적인 기사나 칼럼이 나와 논란이 됐던 적도 있었다. 논란의 칼럼을 쓴 필자는 한동안 배신자 비슷한 소리를 들으며 진보인사들 입에 거칠게 오르내리기도 했다.
칼럼니스트들은 자기 이름을 걸고 쓴 글로 평가받는다. 물론 매체의 지향점과 정반대되는 글이 실리는 경우는 흔치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100% 한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점도 없지 않다. 따라서 이를 두고 특정신문 전체를 도매금으로 매도하거나 구석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과도한 것이다. 한겨레 없이 인권, 노동문제를 얘기할 수 있을 것이며, 오마이뉴스 없이 생생한 현장 생중계와 파격적인 뉴스(주제, 형식 등에서)를 얘기할 수 있을 것인가.
열에 한 둘이 아쉬움이 있다고 해서 나머지 여덟, 아홉을 한데 묶어서 탓을 하는 것은 온당한 비판은 못 된다. 한경오 3형제가 한국사회, 특히 언론발전을 위해 이바지한 공로를 절대로 가벼이 여겨선 안 될 것이다.
작금의 한경오 사태도 좀 큰 시각에서 봐주면 어떨까 싶다. 한겨레 안수찬 기자의 도발성 발언, 오마이뉴스 손병관 기자의 ‘김정숙 씨’ 건, 경향신문의 ‘퍼 먹다’ 등은 적어도 내 판단으로는 모두 다 신중하지 못한 처사였다고 본다. 설사 그것이 내부방침이나 언론계 관행에서 기인된 것이라고 해도 말이다.
언론 소비자인 국민 대다수가 공감하지 못한다면 그건 옳지 못한 것이다. 해명이나 변명으로 납득시킬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이를 거대하고도 조직적인 음모에서 비롯한 것인 양 바라보는 시각 또한 옳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따라서 당사자나 회사 차원의 진솔한 해명이나 사과에 대해서는 품어주는 아량도 필요한 것이다. 만에 하나 문재인 지지자들이 너무 과민했거나 지나친 점은 없었는지도 한번쯤 되돌아볼 일이다.
설사 실수를 연발했고, 미숙함과 그로 인해 생겨난 불만이 상당수 있다고 쳐도 이것 하나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한경오는 조중동은 아니다. 굳이 피아를 가린다면 피(彼)가 아니라 아(我), 즉 우군이라는 점이다. 그 점을 혼동하거나 오인해서는 곤란하다.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출신의 이봉렬 씨는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돈 생각했다면 열두 번도 조중동에 갔을 테지만 기자라는 자부심 하나 때문에 한경오에서 끝내 “살아낸” 사람들에게 그러는 거 아니다”며 “예의까지는 아니더라도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격을 갖추길 바란다”라고 썼다. 그는 또 “(한경오) 기자들 옆에 있다면 위로와 존경을 담은 술 한 잔 받아주고 싶은 그런 날”이라고 덧붙였다.
‘사고’를 친 그들에게 잘했다고 칭찬해줄 것은 없다고 쳐도 앞으로는 잘하라고 토닥토닥 등 두드려주고 싶은 것이 지금 나의 심정이다.
조직은 그 나름의 정체성을 가진다. 한경오 같은 조직은 상대적으로 선명한 편이다. 그러나 그 속에도 일말의 의견 차이를 가진 구성원도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대다수 기자들은 열심히 취재하고 공감할만한 톤과 방향으로 주장을 펴기 마련이다. 한겨레 안수찬 기자의 취중 실언이 밉다고 해도 미르·K재단을 처음으로 보도해 ‘최순실 국정농단사태’를 세상에 밝혀낸 한겨레의 공로를 과소평가할 순 없다.
오늘로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지 일주일째다. 갓 태어난 아기가 첫걸음을 뗀 셈이다. 앞으로 5년, 갈 길은 멀다. 넘어야 할 산, 건너야 할 강이 부지기수다. 장차 그 먼 길을 서로 다독이며 어깨 걸고 가야 한다. 사소한 일로 네가 옳니, 내가 옳니, 이게 서운하니 저게 못마땅하니 하면서 길바닥에서 다툴 시간 없다. 원컨대 이제는 ‘통 큰 화해’가 절실하다.
끝으로, 양측에 한 마디 당부할 것이 있다. 먼저 언론에게. 언론은 언론다워야 한다. 흰 것은 희고 검은 것은 검다고 쓰고 논평해야 한다. 단기적 인기에 영합한 곡학아세나 시류에 편승한 부화뇌동은 독극물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런 와중에도 혹여 실수가 나오면 즉시 경위를 해명하고 진솔하게 사과해야 한다.
다음은 문재인 지지자들에게. 소비자에게도 예의와 품격은 있다. 이번처럼 돌출적이고 해프닝 류의 사안은 별개로 치더라도 언론의 정당한 비판 활동은 존중돼야 한다. 그것이 문재인 정권의 건강성을 담보하고 나아가 성공한 정권으로 이끄는 길임을 인식해야 한다. ‘문빠’란 말은 품격도 없고 그리 아름답지도 않아 보인다. ‘빠’가 아니라 건강한 지킴이요, 애정 어린 회초리를 자임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