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수고만 더해드렸지 별로 재미도 없던 1부 한국 동인지 시장의 역사와 개요는 2부를 위한 전초전 내지는 사전지식 체득 정도로 생각하시고, 이번 글은 나름 재밌게 읽으실 수 있을 것 같다. 예고했던 대로 이제 BL판, 즉 남성 동성애 컨텐츠를 다루는 동인판에 대해서 이야기를 풀어보려고 한다.
BL은 Boys Love 의 약자다. 대부분 미형 남자나 미소년이 등장해서 서로 감정을 나누다가 성적인 교류를 나누는 쪽으로 진행되곤 하는데, BL 판의 역사와 규모는 생각보다 깊고 커서 그 나름의 높은 문학적 완성도와 서사적 완결성을 가진 수작들이 많다.
알 만한 사람은 아는 어떤 BL 판타지 소설의 경우, 내용은 거의 그대로 둔 채 주인공들의 성별만 치환해서 정식으로 출판한 적도 있다. 남성 동성애에 딱히 큰 거부감이 없다면, 이미 정식으로 번역 출판되어 있는 작품 중에서도 수위가 그렇게 높지 않은 작품이 많으니 한 번 정도는 읽어보는 것도 선입견을 깨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자, 이제 진짜 이야기 시작.
성인동에서 펼쳐지는 음지 문학, BL
옛날에 비해 꽤 메이저로 올라온 편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BL 소설은 아직까지도 음지 문학에 속한다. PC 통신이 태동하던 그 오랜 옛날 시절에도 각종 서브 컬쳐 컨텐츠에서 BL 떡밥을 찾아 2차 창작을 하는 사람의 수는 적지 않았고, PC 통신이 쇠락하고 인터넷으로 다들 옮겨 온 뒤에도 BL 애호가들은 포털 사이트 등에 커뮤니티를 만들어 그 나름의 생태계를 만들어 왔다.
이 커뮤니티들은 대부분이 미성년자의 가입이 불가하며, 그 특성상 매우 폐쇄적으로 운영된다. 이런 커뮤니티들을 가리켜 ‘성인동’ 이라고 하는데, 유명한 곳들만 꼽아봐도 키스동, 탐미동, 금지동, 남월동, 낭만동, 야밤동 등 그 수는 결코 적지 않으며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왕성한 창작욕과 소비욕을 가진 채 아낌없는 지출을 하고 있어 생태계는 무난하게 돌아간다.
성인동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의 수는 결코 적지 않다. 나름대로 이 판에서 연관을 가지고 오랫동안 굴러 본 나조차도 정확한 수는 추산이 불가능하나, 역사가 오래되었으나 지금은 문을 닫은 모 성인동의 경우 누적 회원의 수가 수십만명에 달했다는 것으로 이 판의 규모를 대강 짐작할 수 있으리라 본다.
여기서는 흔히들 말하는 ‘네임드’. 즉 유명 작가들만이 아니라 그 나름의 창작욕을 가진 사람들이 글을 생산하고 소비하는데, 웹에 연재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창작지 혹은 동인지의 판매전에서 개인지를 내서 판매하기도 한다.
이런 성인동들은 주소를 찾기도 쉽지 않다. 공개적인 게시판이나 SNS 같은 데서 주소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것 자체가 금지일 뿐만 아니라, 마치 토렌트 비공개 트래커들마냥 별도의 가입용 사이트를 따로 만드는 안전장치를 구축하는 등 극단적으로 접근성이 떨어진다. 게다가 가입 가능 기간 또한 비정기적이며, 성인동 안에 아는 사람이 없을 경우 그 안에 들어가기란 정말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렵다.
가끔은 이런 성인동에 가입해 있다는 것 때문에 성인동 ‘부심’을 부리는 사람들도 넷상에서 종종 발견되긴 하는데, 이런 사람들이 가끔 정보를 흘리기도 한다. 가입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정말 열심히 찾으면 아주 못 찾을 정도까지는 아니고. 시간은 많이 걸리겠지만.(그 외에도 가입 성공에 이르기까지는 수많은 난관들이 존재하고 있지만, 이 글에서 사실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 적당히 넘어가기로 하고…)
성인동의 기형적 구매 시스템
성인동으로 지칭되는 이 BL 동인지판에는 기형적 구매 시스템이 존재한다.
기본적으로 대부분의 거래는 성인동 안에서 이루어지고, 구매 및 판매, 그리고 중고 구매 등이 그 안에서 해결되어 성인동 밖으로 이 거래가 나오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아주 없진 않다. 그런데 그 가격이라는 게 놀랄 만한 수준. 유명 작가들이 집필한 동인지들에 붙는 프리미엄은 좀 너무하다 싶을 정도다.
예를 들어서 <ㅍㅍㅅㅅ> 이라는 네 권짜리 BL 무협지를, ‘오오테’라는 유명 작가가 집필했다고 하자. 그렇게 많은 부수를 발간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상태 좋은 중고에는 어느 정도의 프리미엄이 붙으리라는 것은 물론 예상할 수 있다. 그런데 중고나라에서 이 <ㅍㅍㅅㅅ>를 검색하면 나오는 중고 가격은 무려 60만원. “예, 알겠습니다.”하고 구입할 수 있는 가격이 아니다. 다소간의 차이는 있지만 소위 말하는 고 프리미엄 동인지들의 가격은 이와 대동소이하거나 종종 더 비쌀 때도 있는 수준. 뿐만 아니라 이런 고 프리미엄 동인지가 아닌 경우에도 적지 않은 수의 동인지들이 신간 구매 가격보다 높은 중고 구매 가격을 자랑한다.
많은 돈이 오가는 시장이다 보니, 이런 ‘업자’의 등장은 어찌 생각하면 예견된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분명 이런 업자의 난립을 막을 수 있는 시스템이 존재할텐데, 대부분의 성인동은 서로간의 교류조차 드문 편이다. 때문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협력이 이루어지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이런 극단적으로 폐쇄적인 운영 태도를 보이는 성인동들의 운영 태도가 업자의 등장을 낳았다고 해도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재주는 작가가 넘고 돈은 업자가 벌고…
거기다 또 하나 존재하는 불합리한 시스템 하나가 있다. 세트 구매다. 인기 작가라도 중고로 안 팔리고 인기가 없는 책은 있게 마련이고, 그렇게 아무도 안 살 재고들을 끼워 팔아서 높은 가격에 판매하는 경우가 잦다. 말하자면 인기작 몇 권에, 구매자가 원하지도 않는 비인기작 여러 권을 반드시 같이 사야만 하는 거다. 내가 이 판에서 발을 아주 빼기 전에는, 3~40권씩 끼워파는 경우도 있었다. 솔직히 너무하지 않나. 그냥 끼워주는 것도 아니고, 가격을 모두 지불해야 하는데.
보통 이런 일은 업자 혹은 평범한 성인동 회원들의 판매 모습인데, 필명을 밝힐 수 없는 모 작가의 경우 이런 세트 판매를 제 3자인양 직접 하다가 이야기가 나온 적도 있었다. ‘OO 작가님이 그러실 리가 없다’ 며 그냥 루머로 묻혔지만, 오프라인에서 당사자에게 직접 사실을 체크했으니 거짓은 아니라고 생각해도 된다. 그리고 사실, 마음만 먹으면 누가 못 하겠나? 이런 기형적인 판매 시스템이 일반적으로 통하는 판에서…
어쨌든 이런 판매 행태는 거의 공식적인 것이나 다름없고, 울며 겨자 먹기로 구매하는 사람들은 이 동인지를 다시 되팔 때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 비싼 가격을 받고 다른 구매자에게 넘긴다. 이게 몇 번만 반복되면, 대체 가격이 어디까지 올라갈지 대충 계산이 나오지 않나. 그러다 실패하면 그게 버블. 펑!
부녀자(腐女子,후죠시)라는 이름을 벗어날 수 있기를
BL 이라는 장르는 죄가 없다. 다만, 비틀려 있는 부분을 고치지 않으려는 집단 이기주의가 문제다. 합리적인 가격을 지불하고 구매할 수 있는 시스템을 충분히 만들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되는대로 계속해서 굴러오다 결국 지금과 같은 비합리적, 기형적 판이 형성되고 만 것이다.
작가들이 이런 시스템 개선에 의지가 없는 편인 것도 사실이다. 독재에 가까운 운영 행태를 보이는 성인동에서 눈 밖에 나서 제명당하기라도 하면, 당장 자신의 동인지를 사 줄 수많은 독자들을 잃게 되기 때문에 개혁의 선봉에 서기 쉽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어느 부분부터 먼저 뜯어 고쳐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을 정도로 이쪽 판은 복잡하게 얽혀있다. 일례로 유명 작가들의 경우 신간을 내고 나서 재판을 하지 않거나, 시간이 상당히 지난 다음에야 재판을 하는 경우도 잦다. 이유는 간단하다. 초판 구매자들의 프리미엄 때문이다. 재판이 쉽게 안 나오는 이유도 대부분 이 때문이다. 수십만원대 프리미엄이 붙어 중고시장에서 오가는 작가 정도 되면 저런 식으로 구매자들 눈치를 보지 않는게 더 힘들다. 논란을 만들면 짤릴 수도 있으니까.
BL 문화를 향유하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가리켜 부녀자(腐女子,후죠시)라고 자조적인 표현을 쓰곤 하는데, 여기서 ‘부’는 썩을 부 자다. 양지에서 당당하게 즐기는 사람에게는 그저 자학개그에 가까운 표현이겠지만, 이미 썩어들어갈 만큼 썩어들어간 성인동 판에는 이런 표현을 써도 괜찮지 않을까.
개인적으로는 이번 글이 널리 읽혀, 비틀리고 썩어들어간 이 끔찍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내부 논의의 신호탄이 된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그럼 다음 번 떡밥이 생각날 때 까지,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