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는, 내가 좀 씹덕이던 (비하의 의미 전혀 없음) 시절의 추억담이다. 발 뺀지 좀 되어서 요즘도 판이 이런 식으로 돌아가고 있는지는 확실하게는 모르겠고, 어쨌든 ‘예전엔 이런 식이었다’ 는 정도로만 읽어주면 더 바랄 바가 없다. 나한테는 너무 당연하고 익숙한 세계의 이야기인데, 나름 덕후 문화를 이해하고 있을 리승환 수령이 듣고서 깜짝 놀라길래 한 번은 소개해 보는 게 좋겠다 싶어서.
세상엔 많은 종류의 오덕이 있다. 요즘은 ‘덕’이라고 하던데, 오타쿠나 오덕이라고 하면 거의 욕이나 다름없던 옛날에 비해 최근에는 단어를 사용하는 허들이 많이 낮아진 느낌이다. 뭔가 자신의 취미를 열정적으로 좋아한다는 의미 정도로 순화되지 않았나 싶고. 비주류 취미를 향유하던 사람들 입장에서는 기분이 묘할 수 밖에 없는 변화라고 해야 하나.
나는 꽤 하드코어하게 덕질 (덕후적 취미생활)을 하던 사람이었다. 어릴 적부터 적지 않은 금액을 만화와 애니메이션 VHS나 DVD, 영화, 라이트 노벨 등을 사 모으는데 썼었고, 가끔은 생활비까지 투자해가며 덕질을 하는 바람에 밥 먹을 돈도 없었던 시절도 있을 정도였으니까. 물론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지만.
그리고 그런 내 소비에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한 부분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동인지 관련이었다. 그리고 오늘 내가 해 보려는 이야기는, 이 동인지에 관련된 이야기들이다.
엄청난 규모의 일본 동인지 시장
동인지(同人誌)는 기본적으로 취미, 경향 따위가 같은 사람들끼리 모여 기획/집필/편집/발행하는 잡지 혹은 도서출판물을 이르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아마추어들이 출판하며, 실험적인 작품들이 많이 나오는 경향이 있다. 이런 작품을 내는 사람들을 동인이라 부르는데, 이미 영미권에서는 18세기에 동인잡지가 발간되기도 했을 만큼 동인의 역사는 생각보다 그리 짧지 않다.
일본의 서브컬쳐가 발달하고 확산되기 시작하면서 동인지라는 단어의 용례 또한 다양해지기 시작했다. 바로 위에서 정의한 것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던 동인지라는 단어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원작의 등장 인물과 설정을 차용하여 만든, 2차 창작 서적’에 더욱 가까워진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원작이 없는 순수한 동인지에 ‘창작 동인지’라는 표현을 굳이 가져다 붙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그러니, 이 글에서는 ‘동인지’ 라는 단어를 ‘2차 창작 서적’의 의미로 사용하려고 한다.
일본의 동인지 시장은 실로 방대하다. 일본에서는 도쿄 빅사이트를 빌려 여름과 겨울, 그러니까 1년에 두 번 코미케(코믹 마켓)이 열리는데, 코미케의 규모는 실로 어마어마하다.
3일간 진행되는 이 행사에 참가하는 서클의 수만 해도 3만개 이상에 달하며, 무료 입장인 이 대규모 동인지 판매전의 입장객 수는 최하 50만명을 상회한다. 오오테 서클(おおて(大手) circle, 큰 손의 서클이라는 뜻)의 경우, 어느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1년에 두 번 열리는 코미케에서 동인지를 판매한 수익만으로도 먹고 살기에 충분하고도 남을 만큼의 큰 돈을 벌어들인다. 왜? 그야 물론, 사 주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건 일본의 이야기이고, 나는 한국의 동인지 시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소개해 보려고 한다. 나도 한 때 그쪽 계열에 몸담은 바 있고, 대강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를 기본적으로 소개할 정도로는 알고 있으니까. 그냥 이런 세계도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서.
한국 동인 시장의 역사
우선, 한국의 동인 시장의 규모는 그렇게 크지는 않다. 트위터나 인터넷 상에서야 많아 보이지만, 그거야 까놓고 말해서 오덕들이 인터넷을 더 많이 하니까 그렇게 보이는 것 뿐이다. 다만 최근 들어 비덕(덕후가 아닌 사람들)들도 <진격의 거인>같은 작품을 보기도 하고, <무한도전> 같은 공중파 TV 프로그램이나 <장도리> 같은 시사 만화에서도 패러디 될 만큼 유명해지긴 했지만, 이것이 동인 시장 저변의 확대로 연결 되기에는 아직까지는 사실 무리가 있다고 본다.
국내 동인지 판매전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90년대 후반 아마추어리즘을 내세운 동인 행사‘ACA’와, 코미케를 본따 만든 ‘코믹월드’ 가 실질적으로 인정받는 첫 판매전이었다. 현재 프로 작가로 활동하는 만화가 중에서는 ACA 출신이 상당히 많은데, 강경옥, 박희정, 이태행, 유시진, 권교정, 이빈, 유현, 이유정 등 만화 좀 봤다면 익숙할 수 밖에 없는 만화가들 중 상당수가 ACA 출신으로서 잡지 공모전 등을 통해 데뷔한 바 있다.
그 외에는 ‘서드 플레이스’ 라는 행사가 있었지만 어른의 사정으로 인해 중단되었고, ACA는 세월이 흘러 여러 가지 이유로 행사 자체가 더 이상 진행되지 않게 되었으며, 지금은 두 달에 한번 열리는 ‘코믹월드’가 국내의 유일한 대형 동인지 판매전이다.
서울에서는 양재역 AT 센터와 학여울역 SETEC 두 곳에서 번갈아가며 열리고 있으며, 부산에서는 보통 BEXCO 에서만 열리고, 한 때 열리던 대구 코믹월드는 적자 운영을 이유로 더 이상은 열리지 않게 되었다. 코믹월드는 기업이 운영하는 동인지 판매전이다. 반면, 정말로 동인들끼리만 모여서 여는 동인지 판매전도 있다. 이른바 ‘온리전’ 이라는 것인데, 이 쪽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적기로 한다.
어쨌든 무료 입장인 코미케와는 달리, 코믹월드는 입장료를 받는다. 그리고 코미케와 코믹월드 모두 서클들에게 일정액의 참가비를 받는데, 코믹월드의 참가비는 그렇게 싼 편은 아니라 의미 있는 수익을 거두는 서클의 수는 그리 많지 않다. 대다수는 동인지를 제작하는데 들어간 비용과 참가비, 그리고 정말 약간의 수익 정도를 내는데 그치는 정도다. 들어간 수고를 생각하면 사실 딱히 돈 벌려고 하는 짓은 아닌 셈이다. 하지만 물론 코믹월드에도 오오테 서클은 있다(…). 일본의 오오테 서클만큼 크진 않지만.
그리고 동인지는 만화만 있는 것은 아니다. 참가자의 수는 적고, 소비자의 수도 적긴 마찬가지지만 소설이나 비평집을 내는 경우도 간간히 있다.
동인지 시장의 흐름
좌우간, 간단하게 정리해 보면 이렇다.
좋아하는 원작 만화나 애니메이션의 동인지를 쓴다/그린다 → 인쇄소에서 동인지를 인쇄 제작한다 → 동인지 판매전에 들고 와서 판다.
정말 간단하기 그지없는 흐름인데, 국내에 동인지가 거래되는 시장이 크지 않지만 존재한다는 것 자체를 모르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너무 적어서 일부러 다소 지루하지만 상세하게 풀어서 써 봤다. 남들도 다 아는 이야기를 왜 이렇게 쓸데없이 길게 썼냐고 생각하시는 분도 있겠지만, 그거 생각만큼 ‘남들도 다 아는 이야기’ 아니다.
한편, 코믹월드에서 판매하는 동인지들은 다종다양한 원작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반면에 위에서 잠깐 언급한 온리전(Only + 展)은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한 가지 주제만을 바탕으로 열리는 동인지 판매전이다. 모임 장소 대관부터 시작해서 모든 절차를 아마추어들이 진행하기 때문에, 사실 큰 수익을 기대하고 여는 행사는 아니다.
나 역시도 온리전을 한 차례 주최하고 진행해 본 바 있는데, 몇 달간을 여기저기 홍보하고 반쯤은 사정하다시피 하면서 서클들을 끌어들여 간신히 유치하는데 성공한 이 온리전에서 내 앞으로 떨어진 순수익은 10만원이 될까 말까한 수준이었다. 사실 온리전 유치는 돈 보고 하면 못한다. 자신과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만나서 서로 교류하는 자리를 갖고 싶은 것이지. 사실 이게 이런 동인 행사의 가장 근본적인 존재 의의라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가 오프라인에서 진행되는 좀 건전한 동인지 판매전 이야기였고… 동인 시장에도 뒷골목은 있다. BL 혹은 야오이라고 불리는 남성 동성애 장르를 다루는 판은 생각 이상으로 거대한 한편, 그 특성상 폐쇄적이면서 기형적으로 비틀린 구조를 가지고 있다.
글이 쓸데없이 길어지는 것 같아 이 글은 이 정도에서 적당히 마무리하도록 하고, 조만간 기형적으로 비틀린 BL 판의 이야기를 다시 들고 돌아오려 한다. 물론 욕 먹을 각오는 하고 써 내려가고 있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욕 먹는걸로 상처받으면 키워짓 어떻게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