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지금까지 거쳐온 경험들을 돌아보며 정리한 두 가지 UX 디자이너 유형을 소개해보려 합니다. 브런치에서도 매우 유명하신 흔디 님의 ‘발산형 디자이너와 수렴형 디자이너’라는 글도 재미있게 읽었고 많은 맥락에서 공감했지만, 좀 더 개인적인 맥락에서 경험한 UX 디자이너 유형을 구분해보고 싶어 정리했습니다. 흔디 님의 글도 매우 추천합니다.
깊이 파는 UX 디자이너: 전문가형 UX 디자이너
사실 업계에서 상대적으로 더 익숙한 유형의 UX 디자이너인 것 같습니다. 한국이 대기업 중심의 산업구조라 대기업이 원하는 전문가형 인재들로부터 UX가 소개되어서 그런 건 아닐까 하고 개인적으로 생각해보긴 합니다. 신입사원으로서 전 직장에 처음 입사했을 때 저를 이끌어주셨던 디자이너 선배님들과 멘토님들이 바로 이 유형이었던 것 같습니다.
‘깊이 파는 UX 디자이너’는 말 그대로 소수의 전문분야에 대한 높은 집중력과 전문성으로 UX 하시는 분들을 일컫는 유형입니다. 대부분 시각적인 전문성을 바탕으로 일하며, 최근 그 영역도 점점 세분화되는 패턴을 보입니다. 개인적으로 한국에는 전문성을 기반으로 하는 UX 디자이너가 많아 기본적인 학습 수준을 요한다고 인지되는 디자인 혹은 프로토타이핑 툴도 수용도가 높은 건 아닐까 싶습니다.
‘깊이 파는 UX 디자이너’는 전문성을 기반으로 일하기 때문에 디테일에 강합니다. 그것이 화면의 픽셀이 되었든 마이크로 인터렉션 혹은 트랜지션이 되었든 화면 설계도의 기능 설명이 되었든 말이죠. 그래서 이런 분들에게 나오는 결과물은 완성도가 높습니다(그래서 우리나라에서 디자인 어워드를 그렇게 많이 받는 것일까요 ㅎㅎ;;).
단점이라고 한다면 각각 전문영역에 대한 집중력이 너무 높다 보니 다른 전문성을 지닌 동료들과 협업이 잘 안 된다는 점입니다. 개발자와 디자이너 간 소통 문제가 대표적인 예가 될 텐데요. 서로 각자의 관점에서 이야기하다 보니 소통의 문제가 야기됩니다. 최근 ‘디자이너도 코딩할 줄 알아야 한다’는 의견이 업계의 뜨거운 이슈가 된 이유도 개인적으로는 ‘깊이 파는 UX 디자이너’와 개발자 사이 소통의 문제를 극복해보려는 의지가 투영된 것은 아닐까 합니다.
넓게 보는 UX 디자이너: 매니저형 UX 디자이너
전문가형 ‘깊이 파는 UX 디자이너’가 있다면 매니저형 ‘넓게 보는 UX 디자이너’도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 오지랖형 혹은 매니저형이 되기에 처음엔 그냥 ‘오지랖형 UX 디자이너’라고 표현할까 했지만 우선은 저렇게 지칭했습니다.
‘넓게 보는 UX 디자이너’는 다양한 영역에 향한 관심을 기반으로 일하는 사람입니다. 한 가지 영역에 만족하기보다는 계속 새로운 영역에서 오는 자극을 즐기며 본인의 분야를 넓혀갑니다. 한국은 환경적인 요인 때문에 스타트업계에 이런 유형의 인재가 많은 것 같고, 다양성 교육이 보편화된 미국 혹은 유럽에서도 이런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유형의 UX 디자이너는 단점부터 이야기하겠습니다. 첫 번째, 집중력이 높지 못하다는 점입니다(제가 그렇습니다). 한 가지 영역에 집중해 깊게 파기보다는 새로운 자극을 즐기는 유형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딱히 이렇다 할 한 가지 전문성을 찾기가 힘들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실제 매니저형으로 진화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고 대부분 오지랖형으로 남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역시 제가 그런 것 같습니다). 커리어적으로 봤을 때도 고위험군의 유형이라 볼 수 있습니다.
매니저형으로 성장하는 사람은 본인이 관심 있는 다양한 영역의 동료에게 인정받기 시작할 때 그 역량이 발휘됩니다. 그 말인즉슨 각 영역의 전문가에게 인정받을 기본적인 수준 이상의 전문성은 보유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저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많은 디자이너가 동료도 힘들고 본인도 속상한 ‘오지랖형 UX 디자이너’로 전락하게 되는 듯합니다.
하지만 넓게 보는 UX 디자이너도 분명 장점은 있습니다. 첫 번째, 다양한 사람과 소통하기에 조직에서 인정받기 쉽습니다. 기획자 혹은 상사와는 KPI로 소통하고, 디자이너들과는 심미적인 관점에서 소통하며, 개발자와는 시스템적 관점에서 소통할 수 있기에 상대적으로 ‘말이 통하는 사람’으로 인정받습니다. 두 번째, 여러 관점에서 들어오는 인풋 덕분에 창의력이 높습니다. 다양한 정보를 새로운 조합으로 구상하는 것만으로도 전혀 새로운 무언가 나올 수 있습니다. ‘넓게 보는 UX 디자이너’는 종종 아이디어가 많다고 인정받습니다.
자신의 유형 구분하기
이렇게 다른 두 디자이너를 구분하기 어려운 이유는 시작점이 같기 때문입니다. 제 유형을 구분하라면 ‘넓게 보는 UX 디자이너’인데 이런 것도 최근에서야 분류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 오랜 시간 동안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고 싶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대부분의 선배님, 멘토님들이 위에서 언급했듯 전문가형 UX 디자이너였고, 그분들을 보며 성장하던 저는 자연스레 그 길을 걸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두 가지 유형 모두 주니어의 단계에서는 필수적으로 소수 영역의 전문성을 키워나가며 시작해야 하고요. 그래서 더 헷갈릴 수도 있습니다.
‘넓게 보는 UX 디자이너’는 생각보다 우리나라에서 찾기 힘든 유형이라 느낍니다. 전문가형 인재를 선호하는 대기업 중심의 산업구조를 탓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넓게 보는 UX 디자이너가 모험하면서 성장해야 하는 유형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도 대기업이라 생각하는 전 직장에서 조그마한 회사로 이직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야기하는 ‘넓게 보는 UX 디자이너’라는 유형을 생각하지도 못했을 것 같거든요.
한국에 ‘넓게 보는 UX 디자이너’ 유형의 사람들이 적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이유를 이야기해보자면 진로 고민 상담을 해주는 대학생들 혹은 취준생들의 경우 대부분 ‘넓게 보는 UX 디자이너’ 유형에 속하기 때문이죠. 이 유형의 친구들은 항상 고민을 나눌 때 어떤 ‘새로운’ 공부를 하여 UX 디자이너가 될 수 있을까를 물어보는데, 그럴 때마다 지금의 전공, 관심 영역을 기반으로 ‘내가 어떤 UX 디자이너가 될 수 있을까’ 고민해보는 게 어떨까 한다고 이야기해주곤 합니다.
물론 현실적인 조건과 한계를 저도 인지합니다. 그러나 이 유형의 친구들이 가장 매력적이게 보이는 방법은 결국 본인의 개성과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대 나온 친구들과 시각적인 관점만 고려한 포트폴리오로 경쟁하면 결과는 불 보듯 뻔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사용자를 이해하고 공감하려고 하는지, 자신의 다양한 시도를 이야기하면 얘기가 달라질 수 있으니까요.
나는 어떤 디자이너일까
자기 계발을 하기 전에 다른 무엇보다 ‘내가 어떤 UX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가’를 먼저 고민해보는 건 어떨까요? 제가 산업공학과 경제학을 공부하고 UX 디자이너가 되었다고 했을 때 대기업에서 생각보다 많은 분이 비슷한 배경을 가져서 많이 놀랐습니다. 그럼에도 산업공학의 관점이 들어간 UX, 경제학의 관점이 들어간 UX는 본 기억이 딱히 없습니다. 본인의 개성과 관점을 기반으로 UX 디자이너로 성장했을 때 세상이 보지 못했던 새로운 UX가 나옵니다.
프로토타이핑 툴을 배우기 전에, 프로그래밍을 공부하기 전에, 데이터를 이해하기 위해 통계학을 공부하기 전에 내가 좋아하는 글을 써보고, 그림을 그려보고, 음악을 해보고, 심리학을 공부해보고. 사람들이 해야 한다고 해서 개발을 공부하기보다는 차라리 이런저런 다양한 덕질을 해보는 건 어떨까요. 저는 지금도 그래서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원문: Ji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