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미국 드라마를 즐겨보는 편이다. 접할 수 있는 경로도 다양한 데다 워낙 많은 드라마가 나오는 덕이다. 하지만 예전처럼 감명 깊게 본 드라마는 적은 것 같다. 그러니까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 즈음 각 방송사가 미국 드라마를 더빙해서 방송하기 시작하면서 미드라는 장르가 본격적으로 한국에 알려졌다.
<레밍턴스틸(Remington Steele)>, <에어울프(Air-wolf)>, <전격Z작전(Knight Rider)>, <비버리힐스의 아이들(Beverly Hills 90210)>, <맥가이버(Macgyver)>, <미션 임파서블(Mission Impossible)>, <육백만 불의 사나이(Six Million Dollar Man)>, <헐크(Incredible Hulk)> 등 이름만 들어도 과거의 기억들이 마구 떠오르는 드라마들이다.
세월이 세월인지라 저 드라마들의 내용을 기억할 리는 만무하다. 하지만 몇몇 장면은 너무나 강렬한 나머지 세월이 한참 지난 지금도 기억한다. 더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내 인생의 모토가 된 장면과 그 장면을 안겨 준 드라마를 추억하고 싶다.
1. 절대 포기하지 않는 이유, <맥가이버>
나와 동시대를 살았던 남정네들은 대부분 비슷한 생각을 할 것이다. 그 당시 맥가이버는 ‘엄친아’였다. 능력도 좋아, 공부도 잘해, 거기다 착하기까지. 그 당시 남자들은 누구나 한 번쯤 그를 따라 해보고 싶어 했을 것이다. 심지어 맥가이버가 가지고 다니던 스위스칼(Victorinox)조차 당시 또래라면 꼭 가져야 할 ‘잇’ 아이템이 되었으니 말이다.
내가 영화나 드라마를 좋아하지만, 한 번도 그 주인공이 부럽다거나 따라 해보고 싶다고 느껴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맥가이버는 내가 부러워하고 따라해 본 유일한 주인공이었다. 대학교 신입생 환영회에서 자기소개할 때 선배가 부모님 빼고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는 질문을 했는데 그때 내가 대답했던 인물이 바로 맥가이버였다.
이 이상 맥가이버가 나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이야기하는 건 좀 오버 같고, 유독 각인된 장면 한 가지를 소개하려고 한다.
시즌 3의 13번 에피소드인 ‘Thin Ice’의 한 장면이다. 맥가이버를 좋아했던 이들은 알겠지만, 맥가이버가 시즌이 더해갈수록 과학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인간적인 면을 강조하는 에피소드들이 주로 나왔다. 이 에피소드 또한 그 중 하나이다. 맥가이버를 볼 때 기대하는 화려한 머리 기술은 전혀 선보이지 않는 아주아주 재미없는 에피소드 중 하나다.
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렇다. 맥가이버가 지인의 부탁으로 고등학교 아이스하키팀을 맡게 된다. 그 팀에는 유망주 한 명이 있는데, 이 유망주는 여러 어려움으로 인해 하키를 그만두려고 한다. 맥가이버는 이 아이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그래서 아이는 좋은 대학에 진학한다. 이 유망주 아이를 설득하면서 맥가이버 자신이 아이스하키를 그만둔 이야기를 해주는데,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맥가이버는 자신이 가장 후회하는 것을 이야기한다.
I wonder whether I could make it or not.
출처: Youtube
그렇다. 포기하는 순간, ‘과연 내가 그 때 성공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의 무게를 평생 지고 살아가야 한다. 이러한 가치관이 지금까지도 어려운 순간 내게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의미를 전해준다.
2. 아이를 평범히 키운다는 것, <비버리힐즈의 아이들>
<비버리힐즈의 아이들(Beverly Hills 90210)>은 내가 즐겨보던 미드는 아니다. 주말에 심심하면 가끔 봤다. 다들 아시겠지만 <비버리 힐즈의 아이들>은 미국 고등학생들에 대한 상상을 심어주기에는 충분했다.
그 당시 드라마에서 드러난 미국 고등학교의 풍경, 예를 들어 수업에 따라 교실을 옮겨 다닌다든지 섹스와 마약 같은 문제가 학교에서 발생한다든지 하는 것들은 가히 문화충격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비버리힐즈는 미국 LA에서도 부촌이다 보니 미국 내 평균보다도 더 상회하는 환경을 묘사했던 것이다.
내가 감명깊게 본 에피소드는 시즌2의 19번 에피소드 ‘Fire and Ice’이다. 대략적인 줄거리는 이렇다. 브랜든이 새로운 피겨스케이팅 선수와 애인 관계로 발전한다. 그런데 이 여자아이가 스카웃되어 그 동네를 떠나게 된다. 브랜든은 무척 상심한다.
그런 그와 그의 아버지가 대화를 나누는데, 그때 브랜든은 아버지에게 묻는다. 자신이 어렸을 때 스케이트를 무척 잘 탔는데 왜 선수로 키우려 하지 않았느냐고 말이다. 브랜든의 아버지는 자신이 유명한 코치와 상담했을 때 그 코치가 자신에게 했던 질문으로 아들에게 대답한다.
Do you want to have the super-star or do you want to have the son?
이 때 아버지가 했던 질문은 사춘기 딸을 키우는 나에게 여전히 유효한 질문이다(물론 Son을 Daughter로 바꾸어야 하긴 하지만).
아이를 슈퍼스타로 키운다는 것은 아이의 놀라운 재능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그만큼 필요한 게 주위 사람(특히 부모)의 희생이다. 그러니 ‘그 희생을 통해 나(부모)는 행복할 수 있는가? 아이는 행복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필요하다. 그리고 내 대답은 브랜든 아버지와 여전히 같다.
아, 한때는 영화 제목이며 주연, 출연한 연도, 아카데미 수상내역을 줄줄 꿰찼다. 스포츠의 경우에는 선수의 이름, 소속, 순위 등을 모두 외우기도 했다. 영화, 미국드라마, NBA, NFL, KBO 등도 그랬다. 지금이야 흔한 NFL 슈퍼볼을 보기 위해 새벽같이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은 그 흔하디흔한 KBO 구단 이름조차도 모르는 부류가 되었다. 예전만큼 무언가를 보고 감동을 느낀다거나 하는 일도 무척 드물다. 그만큼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에휴.
원문: Amang Kim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