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가장 당선 가능성이 높은 대통령 후보가 민주공화국의 토대를 부식시키는 끔찍한 발언을 하는 광경을 보고 기분이 매우 좋지 않다. 이 발언을 보고 두려움과 역겨움을 느낄 수 있는 까닭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내게는 다음 두 가지가 가장 크게 다가온다.
첫째, 나는 이번 대선 및 그로부터 정립할 다음 정권의 핵심적인 가치 중 하나가 합리성의 보존과 증진이라고 믿으며, 여기에는 박사모-홍준표 지지자들로 이어지는 우파 극단주의자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한국인이 합의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때 개신교 극단주의자들의 반동성애, 혹은 좀 더 정확히 말해 광신적인 소수자 혐오에 공적 인물이 굴복하는 광경은, 그것이 제아무리 정치적 고려의 결과물이라는 점을 이해한다고 해도, 아직 우리가 합리성이 반지성적·반헌법적·반인권적 광신에 너무나도 쉽게 자리를 내어주는 곳에 살고 있음을 깨닫게 한다.
합리성과 상식의 사도가 기본조차도 없는 반지성주의에 고개를 숙이는 그림을 보면서 이 사도가 도대체 언제쯤에야 분명히 개신교 광신자들의 억지 쓰기를 거부할지, 과연 그 날이 오기는 할는지 의심하는 것이 그다지 비합리적인 자세는 아닐 것이다. 지금 헌법의 정신에 충실하지 않은 사람이 (나는 성적 지향 및 정체성이 시민권의 행사에 어떠한 걸림돌도 될 수 없다는 입장만이 유일하게 공화국과 헌법의 정신에 충실한 것이라 믿는다) 당선 이후 개신교 극단주의자들의 떼쓰기 앞에서 공화국과 헌법, 인권의 충실한 수호자가 된다는 보장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둘째, 다른 누구보다도 문재인의 열렬한 지지자들이 잘 알고 있겠지만 그 정도 급의 인물이 어떤 발언을 하고 어떤 자세를 취하는지는 사회 전체에 즉각적인 파급력을 갖는다. 가령 우리는 문재인의 ‘페미니스트 대통령’ 선언 이후에 문재인 지지자들이 다수를 점하고 있는 남성향 커뮤니티에서 신속하게 “페미니즘은 원래 상식적이고 좋은 것이며,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일부 사람들이 문제일 뿐 문재인의 선언은 옳은 것이다”라는 식의 입장표명이 줄지은 것을 기억할 수 있다. 이는 바로 직전까지 이 집단에서 페미니즘/페미니스트에 대한 거부감이 꽤 컸음을 고려하면 상당히 놀랄 정도의 신속한 태세전환이었다(많은 페미니스트가 나름의 합리적인 이유로 문재인의 선언을 전략적인 가식 정도로 의심함에도, 그 진의와 무관한 발화의 효과에 대해서는 좀 더 깊게 숙고할 필요가 있다).
만약 그와 유사한 영향력이 이번 발언을 통해서도 행사될 거로 예측한다면, 우리는 많은 이에게 지지받는 유력한 대통령 후보를 핑계 삼아 자신의 반헌법적·반인권적 편견을 공공연하게 설파하는 이들이 더욱 늘어날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 끔찍한 가능성은 특히 각종 공공기관의 책임자들이 대통령 후보를 모방하여 “아직 사회적 합의가 부족하고 반대의견이 크므로 이번에는 소수자들의 권리를 포기합시다”라는 제스처를 더욱 당당하게 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는 옹호자들이 문재인의 정치적 영향력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 가지 확실하게 해 두고 싶은 것이 있다. 차별금지법의 성적 지향·성적 정체성 관련 조항을 포함하여 성적 소수자의 인권과 시민권을 보장하는 어떠한 행위에도 반대하는 개신교 극단주의자들은 합리성, 인권, 헌법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공화국과 자유민주주의, 시민사회의 토대에 근본적인 위협이 된다. 그들은 최소한의 합리적인 근거 없이 오로지 자신들만이 사회의 도덕과 상식을 대변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단지 반지성주의적일 뿐 아니라 자신들이 사회 위에 존재하는 더 드높은 귀족 신분이라고 믿으며, 바로 그러한 우월한 지위에 기초해 자신들의 공공연한 혐오 발언과 망상의 전파·실천이 헌법과 인권, 이성보다도 우대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매우 황당하게 들리겠지만 그들은 진짜로 그렇게 믿는다!). 더욱 끔찍하게도 그들은 자신들의 망상이 거부될 경우 합리적인 대화가 아닌 사적인 폭력이나 입에 담지 못할 말로 가득한 협박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정말로 위험하다.
우리는 보통 성 소수자 인권문제를 ‘동성애자 문제’ ‘성 소수자 문제’라고 부르곤 한다. 나는 이 표현이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누가 말썽을 일으키며, 누가 위험한가?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성 소수자들이 아닌 광신과 폭력, 사이버 테러리즘에 입각한 개신교 극단주의자들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과제는 성 소수자를 보호하기 이전에 우리 사회 전체를 어떻게 저 극단주의자들로부터 보호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개신교 극단주의자들이 자신들이 억지를 쓰면 모든 게 자기 뜻대로 될 거라는 망상을 이제라도 근절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한편으로 사적인 폭력으로, 다른 한편으로 공권력을 조종하여 (개신교 극단주의 정당의 원내 진입은 지금도 계속 시도되고 있다) 공화국과 헌법, 시민사회의 근본원리를 훼손하고자 할 것이다.
대선이 누구의 승리로 끝나든 간에 개신교 극단주의는 우리 사회를 계속 위협하는 암적인 문제로 남아 있을 것이다. 5월 9일 이후 대한민국이 합리성을 보전하는 확실한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21세기의 왕당파 박사모와 함께 (사실 박사모와 많은 것을 공유하는) 개신교 극단주의자들로부터 공적 영역과 시민사회를 지켜내는 데서 시작한다. 그 어떤 후보가 당선되더라도 광신도들로부터 민주공화국을 수호해야 한다는 의무에서 면제될 수 없다고 강력히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