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색 선전과 이념 갈등, 지역주의 부추기는 장미대선주의보
며칠 전 시험을 치기 위해 동래역에서 지하철을 타기 위해 걷다가 대선 후보의 유세 차량과 선거사무소가 있다는 현수막을 보았다. 서로 대립하는 두 후보의 선거사무소가 같은 빌딩에 있다는 게 우스웠다. 바쁘게 걸음을 재촉하다 잠시 멈춰서 그 후보들의 주장을 담은 글 몇 자를 읽었다.
후보들은 모두 하나같이 서민 대통령임을 강조하거나 당당한 대통령, 안보를 지킬 수 있는 대통령이 자신임을 주장했다. 5월 장미 대선을 앞두고 길을 걷다 보면 곳곳에서 각 대선후보의 현수막과 다양한 홍보물을 볼 수 있다. 정말 그들이 말하는 공약과 비전을 위해서 그들은 행동하고 있을까?
우리는 그렇다고 믿을 수밖에 없지만, 얼마 전에 치러진 대선 후보들의 스탠딩 토론을 보면 살짝 고개를 가로젓게 된다. 그들은 자신의 공약과 비전이 실현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 알기 위해 서로 토론하지 않았다. 그들은 토론의 장을 이념과 지역이 부딪히는 갈등의 장으로 전락시켜 버렸다.
가장 앞서는 후보는 다른 후보에게 질문할 시간조차 없이 각 후보가 던지는 질문에 답해야 했다. 특히 어느 후보는 “북한이 주적입니까, 아닙니까?”라는 질문을 던지기도 했고 어떤 후보는 자신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하는 후보를 향해 “이정희를 보는 것 같네. 주적은 저기예요.”라며 진땀을 빼기도 했다.
조기 대선을 앞두고 마냥 대선이 시민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한 준비 과정이 될 거라고 애초부터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조금은 지난 대선보다 더 나은 모습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한 장미 대선은 흑색선전을 통해 이념과 지역 간의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 그것도 민심을 잊어버릴 정도로….
한국 시민이 주적으로 생각한 것은 휴전선을 경계로 두고 있는 북한도 아니고, 한국이 중국 일부였다고 주장한 중국도 아니고,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일본도 아니다. 조기 대선을 이끌어온 시민이 생각하는 주적은 ‘시민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이익과 논리에 빠진 어리석은 정치인’이었다.
수백 일이 넘도록 많은 시민이 너나 할 것 없이 광장 앞에 촛불을 들고 나선 이유는 오로지 상식적인 세상을 원했기 때문이다. 시민들이 원한 건 이념 갈등과 지역 갈등이 아니다. 그런 걸 대선 후보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의 모습을 보면 너무나 실망이 터져 나오기만 한다.
특히, 사드 배치 논란을 끊임없이 이념 갈등으로 몰고 가는 후보들의 모습은 너무나 실망적이다. 사드 배치가 논란이 된 이유는 ‘정부가 시민과 합의를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배치해버린 것’에 문제가 있다. 이 문제를 바로 잡기 위해서 대서 후보가 해야 할 일은 시민과 이야기하는 일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몇 후보에게 사드 배치 논란은 타 후보를 공격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할 뿐이다. 사드 배치를 정부가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며 짓밟은 시민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만약 나에게 ‘주적이 누굽니까?’ 하고 묻는다면,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바로 당신이 주적입니다.”라고 답하고 싶다. 그게 정상이다.
한국 시민이 조기 대선을 끌어오고, 자기 이익과 논리에 빠져 정치를 하지 않은 전 대통령에게 파면을 선고한 것은 국가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이 사실을 지금의 대선후보들이 잊은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 끊임없이 하나 된 시민을 분열시키고, 갈등을 조장하는 일은 잘못되었다.
이 와중에도 여전히 몇 후보는 자신의 발언을 굽히지 않은 채, 자신은 강한 사람이라며 막말은 다른 전 대통령이 더 많이 했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런 후보가 대통령 후보로 나설 자격이 있는지 묻고 싶다. 그들은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대통령이 아니라 자신의 목소리에 힘을 주고 싶을 뿐인 거다.
지금도 주적을 운운하며 이념 갈등과 지역 갈등을 부추기는 대선 후보들에게 경고하고 싶다. 일부 국민이 무조건 당신의 의견을 지지하며 목소리를 높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생각하는 시민은 결코 당신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시민의 주적은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이니까.
지난 박근혜 전 대통령 정부 동안 얼마나 많은 진실이 묻히고, 거짓이 진실로 포장되어 시민들의 삶에 대못을 박았는가. 광장의 시민을 대표한다는 인물이 표를 의식해서 자신이 보수라며 운운하는 건 진보도 보수도 아니라 단지 양아치일 뿐이다. 그런 양아치 같은 인물이 된다고 세상이 달라질 수 있을까?
한국 정치의 주적은 낡은 정치다. 낡은 정치를 바꾸기 위해서는 자신의 의견만 반영하는 정치가 아니라 시민의 의견을 반영하는 정치가 필요하다. 국방도, 경제도, 복지도 모든 분야가 그렇다. 부디, 오늘 대선 후보라는 직함을 내민 그들이 한국 정치의 주적을 착각하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또한, 그들만 아니라 그들을 지켜보는 우리 시민의 태도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우리가 광장에서 촛불을 한번 들었다고 가만히 있고, 지금의 후보들에게 실망해 ‘봐라! 누가 되더라도 안 변해. 그럼, 그렇지.’ 하며 손을 놓아버리면 정말 변하지 않는다. 깨어있는 시민이 있어야 정치는 변한다는 걸 잊지 말자.
원문: 노지의 소박한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