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기란 대개 미덕으로 칭송받는 일이다. 때문에 많은 사람은 독서를 일종의 도덕적 의무처럼 여기며 자신의 독서량을 자랑하거나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어려운 책을 읽은 것을 자랑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제까지의 나의 독서를 되돌아보면 독서를 둘러싼 많은 이야기가 조금은 허무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다고 내가 갑자기 독서가 쓸모없는 일이라거나 그것은 허영의 일종이라고 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독서라는 것이 워낙에 사람에 따라, 또 여러 가지 정황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좋은 독서라는 것은 어느 정도 오해가 있는것 같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역시 나는 초등학교 시절에 책 읽기를 가장 좋아했던 것 같다. 고전소설에서 동화로 만화책에서 무협 소설, 과학책, 철학책까지. 무슨 뜻인지도 모를 책들을 포함해서 아주 많은 책을 모두 그때 읽었다. 하지만 나의 독서량은 중고등학교 때 급감했다. 특히 고등학교 시절에는 입시공부밖에 하지 않았고 대학교 시절에도 거의 책을 읽지 않았다.
단순히 책을 읽지 않은 것이 아니라 소설책을 싫어하기 까지 했고 특히 한국 소설은 질색했던 기억이 있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이 추천해 주었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도 얼마간 읽다가 덮어버렸는데 당시의 나로서는 한국 소설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가 일종의 자학처럼 느껴졌다. 슬프고 구질구질한 이야기를 더더욱 슬프고 구질구질하게만 쓰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거기에는 오직 허무와 절망만이 가득하다고 느꼈다.
이에 대해서는 지금도 생각할 거리가 있지만, 이 글에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다른 것이다. 많은 양의 독서를 했던 나의 유년기와 독서에 거리를 두었던 나의 청년기를 돌아보았을 때 ‘독서란 좋은 것이다’라는 단순한 윤리적 잣대를 거기에 들이댄다면 나는 유년기는 잘 보냈지만 청년기는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지금의 나로서는 그렇게 생각되지 않는다. 어느 쪽이 더 좋다던가 나쁘다던가 하는 평가는 유치하다.
대학교 학부 시절은 내게 있어서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시대였다. 나는 물리학을 배웠고 교수님들과 동기들 그리고 선배들을 만났다. 우리는 종종 기숙사에서 술집에서 종교며 사회며 과학문제로 지금은 그 내용이 거의 기억나지 않는 이야기를 하면서 밤이 새도록 떠들곤 했다. 내게는 독서의 시간보다 그렇게 학과공부를 하고 사람을 만났던 시간이 훨씬 더 살아있는 시간으로 느껴졌었다. 연애소설을 읽기보다는 연애를 하는 쪽이 더 좋은 거 아니겠는가.
독서란 저자와의 대화이다. 그래서 우리 안에 뭐가 있는가에 따라 같은 책을 읽어도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오곤 한다. 따라서 적어도 고전으로 알려질 만큼 내용이 있는 책이라면 나는 그것을 다 읽었다고 말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은 대개 어리석다. 적어도 젊은이는 그렇다. 당신이 뭘 알고 있었다고 그 책이 끝났다고 생각한다는 말인가. 젊음이란 삶이 변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변화가 없는 인간이 젊음일 수는 없다. 그런데 어떻게 젊은이가 하나의 책을 다 읽을 수가 있을까? 다시 읽으면 대개 뜻이 다 달라지기 마련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독서란 몇 권을 읽었냐라던가 얼마나 꾸준히 읽었는가 따위의 수량적 측정으로 평가돼야 할 것이 아니다. 물론 독서는 좋은 것이다. 그것은 흔히 마음의 양식이라고 표현된다. 하지만 모처럼 정성 어린 화려한 요리를 만난다고 해도 짐승이 사료를 처먹듯 쑤셔 넣기에 바빠서는 아쉬움이 많이 남을 수밖에 없다.
독서의 가치는 자기 자신밖에는 알 수 없다. 단 한 줄의 글을 읽었어도 산책의 끝자락에서 그 한줄의 글 때문에 자기에 대해 뭔가 의미 있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면 그게 진짜 좋은 독서다. 특히 인문학의 가치는 체험에 있다. 당신을 바꾸지 못하는 인문학 독서는 대개 무의미하며 심지어 해로울 수도 있다. 우리의 독서량은 종종 너무 작지만 사실 사색의 양은 그보다 더 작은 경우가 많다.
독서가 의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최근 2년간 나는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본 일이 많다. 외국에 있을 때와는 달리 한국에 오니 한국 책이 그득한 도서관이 집 주변에 있었다. 나는 왠지 횡재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책이 너무 많고 게다가 그것들을 시간적 제한을 두고 빌려보다 보니 독서가 어느 정도 숙제 같은 의무로 변한 것도 사실이다. 기한이 되기 전에 읽고 반납하자던가 이왕 빌렸으니 열심히 읽자던가, 이걸 빨리 읽고 저걸 읽도록 하자는 생각 때문이다. 돌아보면 그래서인지 나는 내 지난 2년간의 독서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독서는 좋은 것이다. 읽었던 책은 우리에게 큰 자산이 된다. 하지만 적어도 인문학 분야의 독서는 재산 불리기처럼 해야 할 일은 아니다. 독서는 그보다 친구 사귀기에 가깝다. 우리는 인연이 닿아서 읽게 된 책과 글에 예의 바르게 접근해야 하고 너무 많은 책을 사귀는데 집중하기보다는 좋은 친구들을 깊게 사귀어야 한다.
그래야 그 친구들도 우리 곁에 오래 남을 것이다. 또 반드시 유명한 책이 더 좋은 책인 것도 아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 유명인보다 동네의 자전거 수리점 아저씨가 더 중요한 것을 가르쳐 줄 수도 있다. 책도 그렇다.
이런 나도 물론 의무로 책을 읽을 때도 있고 아이에게 읽기 싫어도 읽으라고 말할 때가 있기는 하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독서의 핵심은 우리가 뭘 느끼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뭘 좀 느껴보기 위해서는 이런 것도 시도하고 저런 것도 시도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뭘 시도하건 형식에 빠져서 독서의 본질을 잊어버리게 되면 곤란한다. 독서는 좋은 것이라는 문장은 손가락이다. 손가락을 보지 말고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을 봐야 하겠다.
원문: 격암의 나를 지키는 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