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사의 『재미있는 물리여행(Thinking Physics)』 저작권 사기행위의 실체를 알게 된 사람들이 어이없어했다. 사실 이것은 분노할 만한 일이다. 미국의 저작권자가 분노해서 자신의 책에 두 페이지나 항의의 편지를 올렸다. 그 책을 10년 이상이나 팔고 있었다. 국가 망신이다. 김영사는 정식 계약을 하자고 이메일을 보낸 바가 있으니 잘못이 없다고 우긴다. 하지만 이것은 내가 어떤 여자에게 결혼하자고 이메일을 보내서 답변을 받지 못했으나 내가 우리는 결혼했다고 세상에 공표하는 것과 같은 범죄행위다.
그런데 보도를 보고도 침묵한다. 여기저기 물어보는 것은 확인되고 있다. 출판단체도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있다. 아직 사태를 파악하지 않았으니 그럴 수도 있다. 출판단체들은 김영사를 제명하는 정도의 조처해야 하지 않을까? 지켜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사태를 그대로 방치하지는 않을 것이다.
저작권과 관련해 아픈 기억 몇 개
2002년에 도쿄에서 아시아 출판인들이 모여 ‘디지털 출판의 미래’에 대한 토론회를 열 때였다. 일본의 한 유력 출판사의 한 간부는 이런 말을 했다.
“이 자리에 계신 아시아 출판인 중에서 일본인을 제외하고 일본만화를 불법복제해 자본을 축적하지 않은 사람은 손을 들어보시라!”
손님을 불러놓고 이게 무슨 망발인가 싶었지만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또 한 번은 친구와 함께 고단샤의 저작권 담당자인 호시노 씨를 도쿄의 한 식당에서 만났을 때다. 그는 한국의 오래된 출판사를 믿지 않는다고 했다. 불법복제의 아픈 기억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양식이 있는 젊은 출판사 대표들과 호혜적인 관계를 맺고 싶다고 했다. 호시노 씨는 작고하셨지만 나는 늘 그가 샤부샤부 집에서 했던 그 말들이 잊히지 않는다.
언젠가는 내 사무실로 일본의 한 일본사 대표가 찾아왔다. 물론 미리 연락한 뒤였다. 그는 어떤 출판사의 컴퓨터 시리즈가 얼마나 팔렸을 것 같으냐고 물었다. 순간 직감이 왔다. 그래서 나는 정확하게는 모르겠다고 발뺌했지만 국내에서 팔린 부수에 비해 정말 형편없는 부수가 팔렸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했다. 그들은 여전히 한국의 출판인을 믿지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가끔 일본 출판사 대표들에게 한국의 출판사에 대한 내 견해를 묻는 메일이 오기도 했다.
아픈 기억들이다. 그리고 심히 부끄러운 이야기다. 문화일보에서 김영사의 『재미있는 물리여행(Thinking Physics)』의 저자가 한국에서 자기 책의 해적판을 펴낸 김영사를 비난한 분노의 글을 올렸다는 기사를 봤다.
이 책은 1988년에 출간되어 김영사를 교양출판사의 선두에 올린 책이 아닌가. 이념의 시대였던 1980년대가 지고 1990년대에 들어서자 이념서적의 자리를 경제서와 과학서 등이 채우기 시작했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우리 사회가 어느 정도 민주화되었고,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했으며, 해외 여행자유화조치로 글로벌한 분위기가 형성될 때였다.
이런 시기에 『재미있는 물리여행』은 교양서 시장을 선도했다. 김영사는 ‘재미있는…’ 시리즈를 펴내 좋은 반응을 얻었다. 1990년대를 화려하게 연 베스트셀러는 김우중의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였지만 김영사의 오늘을 있게 만든 책은 아마도 『재미있는 물리여행』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그런 책에 이런 아픈 사실이 숨겨져 있었다니 기가 찰 일이었다.
김영사의 주장대로 1987년에 저작권 계약 없이 출간한 것은 우리 법으로는 불법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2005년에 발행된 책의 판권에 “이 책의 한국어판 저작권은 L. 엡스타인, S.휴이트와의 저작권 계약에 의해 김영사에 있습니다. 신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무단복제를 금합니다.”라고 적시한 것은 독자를 기만했을 뿐만 아니라 ‘명문’을 자랑하는 출판사에서 저지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계약 사실 자체가 없었으니 이건 엄연히 불법이다.
문화일보 기사에서 고세규 김영사 이사는 이렇게 답변했다.
“해외 저작권자 입장에서는 부당한 처사이겠지만 불법은 아니었다. 한국의 경우 국제 저작권 협정인 베른 조약이 발효된 1996년 이전에는 저작권 계약 없이 책을 출간할 수 있었고, 조약이 발효된 뒤에도 국내 출판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예외적으로 1995년 1월 전에 나온 책은 계속 출간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다만 저작권법상으로 2000년 이후에는 저작권자가 청구할 경우 보상금을 지급하게 돼 있다. 법적으로 저작권 계약 없이 출간할 수 있었지만 정식 계약을 위해 출판사인 인사이트 프레스(Insight Press)에 이메일 등으로 연락을 취했으나 답신을 받지 못한 것으로 파악된다.”
불법은 아니었다고? 저작권 계약을 한 사실이 없으면서 판권에 마치 저작권 계약을 한 것처럼 적시한 것이 불법이 아니라고? 게다가 저자들의 사인까지 도용했다. 양심이 털이 나지 않았으면 이런 변명을 늘어놓을 수가 없다. 책 제목을 전혀 다르게 했으니 미국의 저자들도 이 책이 출간되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그리고 안 다음에 한국에 몇 부가 팔렸다는 사실을 조사까지 한 것을 보면?
어찌 됐든 지금도 전 세계에서 한 해 3,000부가 팔리고 있는 영어판에 한국을 비난하는 글이 두 페이지나 실려 있다. 저자들이 그 편지를 쓴 것이 2005년이다. 12년 동안이나 이런 일이 벌어졌다. 이 책이 헌책방에서 여전히 인기라는 사실을 안 꿈결에서 정식계약을 하겠다고 연락했을 때 저자는 처음에 노발대발하면서 한국과는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겠다고 했다 한다. 이런 개망신이 어디 있는가?
미키 캔터 미국 상무부 장관, 워싱턴 D.C. 20506
친애하는 캔터 상무장관님, 저는 물리학을 가르치고 있고 학생들을 위해 물리학 책을 쓰고 있습니다. 최근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의 제보에 의해) 제 책 ‘Thinking Physics’의 1권과 2권(1권과 2권은 이제 합본호로 출간되고 있습니다)의 한국어 해적판이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어판의 표지와 판권면을 첨부합니다.
저는 미국 상무부에 연락했습니다. 상무부의 한 양심적인 관리가 이 건을 조사해 저에게 한국인들이 각 권 약 2만 7,000부를 판매했다고 통보했습니다. 그러나 이 관리는 한국에서는 이러한 일이 합법적이라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고 알려주었습니다(제 책은 미국에서 연간 약 3,000부가 판매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재산에 대해 아무런 대가를 받지 못한다면 미국은 무역 적자의 균형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습니까? 한국인들이 우리 책에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데, 우리가 어떻게 한국을 지키는 미군을 위해 돈을 지불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신문과 라디오를 통해 과학과 과학 교육이 미국에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우리가 동양인들에 의해 얼마나 추월당하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또 저는 미국이 그들과의 국제 무역에서 공정하게 대하려고 얼마나 노력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소중한 과학 교육 자료를 도용하는 일이 벌어지는데도 미국 정부는 이러한 절도행위를 막을 수 없거나 막으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미국 정부는 제 책 판매 수입의 35%를 세금으로 받고 있으면서도 제 책을 해적 행위로부터 지켜주지 않습니다. 이러한 해적 행위는 오랜 친구이자 동맹국인 한국의 승인과 보호 하에 벌어지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계속되나요?
존경을 표하며, 루이스 엡스타인
복사: 빌 클린턴 대통령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원, 국회 의사당, 워싱턴 D.C.
2005년 여름
친애하는 낸시 펠로시 하원의원님에게. 1기 클린턴 행정부 시절에 저는 옆면에 첨부한 편지를 썼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답장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제 한국의 오랜 친구들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북한과의 핵 결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한국인 친구들은 우리의 지적 재산권을 보호하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래 사진을 보세요. ‘Thinking Physics’의 한국 해적판입니다. 경찰 라디오에서 말하는 표현대로 “범죄 진행 중”인 셈입니다. 한국어를 읽으실 수 없겠지만, 그림은 알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왜 우리를 강탈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미군이 한국에 주둔해야 합니까? 당신은 제 지역구 하원의원이십니다. 저를 대변해주십시오.
가난하고 늙은 물리 교사 루이스 엡스타인 올림
한국출판이 모두 이렇게 썩은 것은 아니다. 2000년대 말에 이미 많은 출판사가 과거에 불법 출판했던 책들을 정식계약을 맺어 출간했다. 그렇게 해서 크게 성공한 출판사들이 엄연히 존재한다. 당시에는 그런 출판사에게 국부유출을 한다고 비난한 사람들이 없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그렇게 하는 것이 정상적인 일이었다. 아직도 회복저작권 운운하며 불법 복제한 책을 팔면서 출판계 원로라고 자처하는 자가 있는 것을 생각하면 이런 일은 빨리 원칙대로 정리되어야 마땅하다.
출판인의 양심과 출판인의 자세
우리 출판인들이 한국의 저자들은 과연 제대로 대우해주고 있을까? 김영사는 저자들에게 발행한 책의 인세를 미리 지불하는 등 잘해준다고 알려졌지만, 많은 출판사가 책이 팔리지 않았다고 저자를 무시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팔리는 책보다 세상에 꼭 필요한 책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또 외국의 책을 해적질해서 파는 것보다 우리 저자들을 추동해서 정말 꼭 필요한 책을 만들고 이를 외국에 수출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사태로 김영사의 어두운 과거 몇 가지가 떠올랐다. 여러 차례 저자들의 하소연을 들으면서는 단순히 편집자의 실수라고 생각하고 출판사를 감싸주곤 했는데 그게 어쩌면 나의 실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는 그때마다 그 사실을 김영사의 간부들에게는 알려주곤 했다. 그러면서 드는 한 생각.
‘김영사가 처음에는 외국책을 허락 없이 리프린트해서 교재로 팔아먹던 회사였기에 이런 사태를 자초한 것은 아닐까?’
어제 내 평론집의 3교를 봤다. 강연 요청이 계속 들어오기 시작한다. 어제 한 도서관에서 강연 요청이 와서 어느 시간이 좋으냐고 묻기에 ‘하루 종일도 괜찮다’는 농담을 했다가 결국 하루 6시간의 강연이 잡혔다. 나야 괜찮지만 듣는 분들까지 괜찮을까 싶었다. 하여튼 이렇게 봄날은 하루하루 지나간다.
원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