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1학년 때 여성학 강의를 들으면서 문화적 충격을 느꼈습니다. 남자의 시각에서 당연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대학교 1학년 이후 고시 공부를 하느라 잠시 사회과학 쪽 책을 읽지 못했습니다. 사법시험 합격 이후에는 연수원 공부 핑계로, 법무관 때는 일을 핑계로, 회사에 취직한 이후에도 일과 육아를 핑계로 사회과학 서적, 특히 여성학적 관점에서 쓴 책을 읽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연한 기회에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다시 한번 아내 그리고 주위의 여성분들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82년생 남자’가 몰랐던 ’82년생 김지영’의 삶
『82년생 김지영』의 작가는 빅데이터에 근거해 평범한 82년생 여성을 창조했습니다. 대한민국의 지극히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중간하게 공부하고 보통 결혼을 한 우리 시대 ‘김지영’ 씨. 출생신고를 3일 늦게 하신 부모님 덕에 저도 어쨌든 1982년생입니다. 저와 함께 학교에 다닌 친구들은 1981년생 또는 빠른 1982년생이죠. 1982년 4월생인 ’82년생 김지영’과 같은 공간, 같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김지영 씨의 프로필은 다음과 같습니다.
- 이름: 김지영(생각해보니 같이 학교에 다닌 여학생 중 성이 김 씨인 사람과 이름이 ‘지영’인 사람이 많았습니다.)
- 가족관계: 9급 공무원 아버지, 전업주부 어머니, 2살 많은 언니, 5살 어린 남동생(제 주위는 다들 2형제 또는 2자매거나 2남매였는데, 셋째가 있다면 대부분 아들이었습니다.)
- 출생지: 서울
- 남편: 세 살 많은 공대 출신, 중견 IT 회사에 다님
성장 과정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 할머니로부터의 차별: 할머니와 함께 살던 김지영 씨는 어릴 적 남동생의 분유 가루를 먹는 것을 좋아했는데, 할머니는 여자가 귀한 손자의 분유를 훔쳐먹는다고 혼을 냄.
- 초등학교 때 차별: 남녀 합반이었지만 학급 번호는 항상 남자가 1번이었고, 남자 번호가 끝난 뒤 여자가 다음 번호로 시작함. 남자 짝이 김지영 씨에게 장난치고 김지영 씨을 괴롭힐 때 초등학교 담임선생님은 이렇게 이야기함: “저 친구가 좋아해서 그러는 거야, 네가 이해하렴.” 김지영 씨가 다닌 학교는 급식 시범 학교였는데 급식은 번호순대로, 즉 남자부터 배식함.
- 중학교에서의 차별: 남자 수가 급증함에 따라 남자 중학교가 부족했고, 상대적으로 학생 수가 적은 여자중학교가 남녀공학으로 바뀌기 시작함. 교복 및 옷차림과 관련해서 여학생에 대한 규제가 심함.
- 고등학교 때의 충격: 집에서 조금 먼 곳에 위치한 학원에 다녔던 김지영 씨. 자기가 항상 앉는 자리에서 수업을 듣고, 학원 프린트를 뒤에 앉아 있는 학생에게 웃으면서 건네줌. 뒷자리의 남학생은 김지영 씨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늦은 밤 버스정거장까지 따라와서 “몇 번 타세요? 그쪽이 데려다줬으면 하시는 것 같아서.”라며 같은 버스를 탐, 놀란 김지영 씨가 버스에서 내리자 따라 내린 뒤 “너 항상 내 앞자리에 앉잖아. 프린트도 존나 웃으면서 주잖아. 맨날 갈게요. 그러면서 존나 흘리다가 왜 치한 취급하냐?” 이 사건을 계기로 김지영 씨는 남자 공포증이 생김.
- IMF가 터지고 철밥통이라던 공무원 사회도 명예퇴직을 종용. 공무원이던 아버지도 명예퇴직하심. 그 뒤 상가를 얻어 찜닭, 치킨집, 프랜차이즈 빵집 등을 하지만 사업은 계속 망함. 어려운 환경에서 언니는 서울권 대학을 포기하고 지방교대로 진학, 어중간한 실력의 김지영 씨는 서울에 소재했지만 스카이가 아닌 다른 대학의 인문학부에 진학함.
- 대학교 때 겪은 여자로서의 차별: 김지영 씨는 다른 또래와 비슷하게 남자친구를 사귀지만 남자친구가 군대 간 후 일병 때쯤 헤어지고 학교 생활을 함.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난 후 참여한 엠티에서 남자 선배가 한 말: “씹다 버린 껌을 누가 씹냐?“
- 취업에서의 냉혹한 현실: 입사를 위해 열심히 원서를 내지만 모두 탈락. 학업 성적이 아무리 좋아도 면접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고 면접장에서는 성희롱에 가까운 질문을 받음. 반면 남자들은 성적이 안 좋아도 합격. 어렵게 여자들이 많다는 ‘광고홍보대행사’에 입사함. 김지영 씨가 면접 보러 가는 길에 늙은 택시기사가 한 말: “나 원래 첫 손님으로 여자 안 태우는데, 딱 보니까 면접 가는 거 같아서 태워준 거야.”
- 회사는 남자 위주로 돌아가고: 여자가 많다는 광고홍보대행사지만 창립 멤버인 팀장님을 빼고 모두 다 남자. 육아휴직을 꿈도 꾸지 못하는 상황. 김지영 씨 입사 전 어떤 여직원은 창사 이래 처음으로 1년 육아휴직을 갖지만 복귀 후 바로 퇴사함. 이때 남자직원들이 한 말: “여자들이 다 그렇지. 이래서 여자를 안 뽑는다니깐.”
- 출산 후 맞은 냉혹한 현실: 출산 압박하는 시부모님 때문에 아이를 갖기로 함. 이때 남편이 한 말: “일이 힘드니깐 일 그만둬, 내가 많이 도와줄게.” 퇴사를 결심하면서 돌아오는 길에 눈물을 흘리는 김지영 씨. 출산 후 친정 부모님은 죽 가게를 운영하느라 바빠서 육아에 참여하지 못하고, 언니는 결혼했지만 난임. 육아로 힘든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공원 앞에서 1,500원짜리 커피를 마시는데 그녀를 보면서 옆에 있던 직장남들이 하는 말: “나도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커피나 마시면서 돌아다니고 싶다. 맘충 팔자가 상팔자야.” 그 뒤 김지영 씨는 정신과 치료를 받음.
’82년생 남자’는 몰랐던 ’82년생 김지영’의 눈물
’82년생 남자’인 저는 그동안 ’82년생 김지영’의 눈물도, 그녀들이 어떤 생각과 고민을 하면서 생활했는지도 잘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아내의 삶과 너무나도 유사한 ’82년생 김지영’의 생활을 보면서 혹시 나도 무심코 ’82년생 김지영’이 잊지 못할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닌지 반성해봅니다.
『82년생 김지영』에는 과 수석이었지만 입사 후 10년 이상 직장을 다니는 여성이 없는 회사의 모습을 보고 퇴사한 김지영 씨의 여자 선배 이야기도 나옵니다. 퇴사 후 사법시험에 합격하는데, 과연 법조계 ‘여성법조인’의 삶은 어떨지… 김지영 씨는 ‘사법시험’에 합격한 여성법조인은 ’82년생 김지영’과 다른 삶을 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또한 ’82년생 김지영’ 씨와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소설 말미에는 김지영 씨를 치료하는 남자 정신과 의사가 나옵니다. 그 의사의 아내도 여자 전문의입니다. 그녀 역시 육아 때문에 의대 교수직을 포기하고 페이닥터로 일합니다. 수학 영재인 아내는 매일 아들의 수학 문제를 푼다고 합니다. 그런 아내에게 남편이 묻습니다.
“왜 수학 문제를 풀어?”
“재밌어, 엄청 재밌어. 지금 내 뜻대로 되는 게 이거 하나밖에 없거든.”
『82년생 김지영』은 이 시대 김지영 씨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묘사합니다. 어느 분이 대통령이 될지는 모르지만 ’82년생 김지영’이 더 이상 육아 문제 때문에, 나아가 여성 차별 때문에 울지 않는 시대가 왔으면 좋겠습니다.
’82년생 남자’가 ’82년생 김지영’을 이해할 수 있었던 훌륭한 소설입니다. 추천합니다.
원문: 법무법인 해마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