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도 어디선가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이야기다. 어릴 적에 부모를 여의고 찢어지게 가난했지만, 근면과 성실로 점차 인정을 받아서 큰 부를 거머쥔 사람들의 이야기. 젊은 시절의 거듭된 사업 실패에도 기죽지 않고 다시 도전하여, 결국 거대한 기업을 일으켜 세운 창업자들의 이야기. 현대 사회의 새로운 교리이자 집단 무의식, 바로 자수성가의 신화다.
그런데 말이다. 당신이 누군가의 자수성가 이야기를 들으며 부러움을 느낄 때, 한 번쯤 생각해 보았으면 하는 것이 있다. 그 부러움의 뒷편에는 자수성가하지 못한 삶이 불행하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곧, 부유하지 못한 삶이 불행하다고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옳지 않은 생각이다. 자수성가해서 성취감을 느껴보겠다는 것은 좋다. 그러나, 자수성가로 부자가 되지 않은 것이 곧 불행한 것은 아니다. 더 많은 돈이 더 많은 행복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돈은 인간적인 존엄성을 지킬 수 있을 정도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 평소 생각이다. 쉽게 말해, 어디가서 돈 때문에 무시당하지 않을 정도면 된다. 마찬가지로 돈이 너무 많아서 질투를 받는 것도 원치 않는다. 내 통장 잔고가 지금처럼 그 중간쯤 어딘가에 계속 머물렀으면 좋겠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금전적 부가 행복의 동의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삶의 행복이라는 주제에 관하여 중요하게 보는 것은 다른 데에 있다. 다음의 두 가지가 바로 그것이다.
첫 번째는 ‘어제보다 오늘이 나은 삶’이다.
우리는 이미 손에 넣은 것에 금세 익숙해진다. 그래서 고소득이 그대로 유지되는 상태보다는, 처음에는 조금 낮더라도 점차 소득이 증가하는 상태에서 사람은 행복을 느낀다. 이른바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이다. ‘법칙’이라고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익숙함이 커질 수록 만족감은 낮아진다는 뜻이다.
오늘날 우리 젊은이들이 절망을 느끼는 이유가 무엇인가. ‘오늘보다 경제적으로 나은 내일’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의 팍팍한 삶이 평생 이어질 것이란 게 너무도 뻔히 내다보이는 상황에 놓여있다. 시간이 흐른다고 처지가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없다. 미래는 알 수 없는 것이지만, 젊은이들이 그런 점까지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누구나 노력하면 점차 윤택한 삶을 살 수 있다고 기대할 수 있어야 한다. 매우 합당한 기대이며 그런 기대가 충족되는 사회가 희망이 있는 사회다.
두 번째는 ‘스스로의 힘으로 이끌어가는 삶’이다.
남이 결정해주는 삶은 그것이 아무리 편안해도 불행하다. 성취감이 없기 때문이다. 배부른 돼지의 삶이기 때문이다. 비록 힘들더라도, 스스로 이끌어가는 삶을 살고 싶은게 사람의 마음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젊은이들은 그런 성취를 느껴볼 기회를 갖지 못한다. 홀로서기 할 수 있도록 배울 기회가 있어야 하는데, 현실에서는 단순한 일만 반복해야 하는 낮은 질의 일자리만 넘쳐난다. 언젠가는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제 역할을 하며 인정받고 사는 뿌듯함을 누리고 싶지만, 첫 단추의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사람이란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면 오늘의 고생은 감수할 수 있는 존재다. 성취를 향한 의미있는 고생의 기회가 열려있어야 한다. 스스로의 힘으로 이끌어가는 삶이 가능한 사회가 건강한 사회다.
요컨대, ‘스스로의 힘’으로 이끌어가는 ‘어제보다 나은 삶’이 내가 생각하는 행복한 삶의 조건이다. 이것은 또한, 자신의 앞날을 주도적으로 창조해 나간다는 점에서 창조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창조성’이 뿌리내린 삶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창조성’이란 말을 오해하고 있었다. 먼저, 당신은 ‘창조성’이라는 말을 들으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가. 기막힌 아이디어? 천재적인 발상? 아니면 아름다운 예술작품? 뭐 그런 것들이 가장 먼저 떠오르지 않을까.
하지만, 남다른 아이디어나 아름다운 작품 그 자체가 ‘창조성’의 본질은 아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생각이 아니라 행동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임상심리학자이자 실존주의 철학자인 롤로 메이Rollo May는『창조를 위한 용기』에서 ‘창조성’의 핵심이 ‘용기’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용기’란 무엇인가. 구태의연한 권위와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양심에 따른 신념을 행동으로 옮기는 대담함이다. ‘용기’를 통해서 생각은 현실이 되고, ‘창조성’은 완성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현실에서 이런 ‘창조성’, 아니 ‘용기’를 발휘하지 못하는가. 무섭기 때문이다. 지금 당신 주변에 쳐진 울타리를 벗어나면 혼자가 될 것 같기 때문이다. 미지의 세상이 두렵기도 하지만, 기존에 머물던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으로는 한 마리 독수리처럼 대지를 박차고 창공으로 날아오르고 싶지만, 실제로는 나뭇가지의 참새처럼 잠깐 날았다가 혹여나 자리가 빼앗길까봐 얼른 제자리로 되돌아온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자. 당신 주위에 빨간 선을 그어놓고 ‘여기는 넘어가지 마!’라고 말하는 ‘그들’이 누구인가. 그 선 밖의 세계를 넘보지 말라고 하는 ‘그들’은 과연 누구인가.
여기서 내가 ‘그들’이 누구인지 말하기는 어렵다. 각자가 놓인 상황이 다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그간의 경험에 비추어보면 ‘그들’에게서 나타나는 세 가지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 첫째, 대체로 당신의 윗사람이다. (단, 나이는 상관없다.)
- 둘째, 대접받기를 원하지만 배려하지는 않는다.
- 셋째, 원칙을 내세우지만 지키지는 않는다.
당신 주위에 이런 특징을 가진 이들이 누구인가 떠올려보라. 그게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한 가지 ‘그들’에 관하여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당신이 그 선을 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당신을 고맙게 여기지는 않을 것이란 점이다. 당신은 선을 넘은 후 버림받을 것을 두려워하지만, 애초에 ‘그들’은 당신과 끝까지 함께 할 생각이 없다.
당신이 선을 넘지 않으면 그래도 현재 상태는 유지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천만의 말씀이다. ‘그들’은 순응하는 당신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오히려 더 굵고 붉은 선을 당신 쪽으로 바짝 밀어붙여 새로 그을 것이다.
정녕 ‘스스로의 힘’으로 이끌어가는 ‘어제보다 나은 삶’을 살고 싶은가. 그렇다면 ‘그들’이 그어놓은 선을 대수롭지 않게 넘어서라. 모두가 무심코 따르는 권위에 질문을 던져라. 그것이 바로 ‘용기’다.
당신만의 확고한 주관이 없다면, 세상 아무도 당신을 돌봐주지 않는다. 당신의 주장을 ‘용기’있게 내세울 때 세상은 더 많은 것을 돌려준다. 책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다. 내가 그렇게 살아왔고 그걸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내 경험에 관해서는, 후에 기회가 되면 더 많은 이야기를 풀어놓겠다.
요컨대, 세상은 자신의 생각을 용기있게 밀어붙이는 소수를 존중한다. 반면에, 자신의 생각을 접고 순순하게 따르는 다수에게 세상은 가혹하다.
존중받을 것인가, 무시당할 것인가. 사실은 아주 쉬운 문제이다. 무엇을 선택할지는 결국 당신이 마음먹기에 달렸기 때문이다.
원문: 신승건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