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학 입문 시간에 ‘편견’과 ‘선입견’은 다르다고 배웠고 이후로도 아리송할 때마다 사전을 들춰보는데 그래도 저 두 단어는 쓸 때마다 참 헷갈린다. 여기에 영단어 ‘스테레오타입’까지 추가되면 머릿속은 더욱 하얗게 바래는데, 아래의 이미지를 보면 ‘스테레오타입’이 어떤 의미인지 바로 알 수 있다. 불가리아 출신 그래픽 디자이너 얀코 체코프의 <Mapping Stereotypes 부당한 동일시의 지도>라는 프로젝트 웹사이트에 게시된 <World According to USA 2012, 미국인들에 따르면 2012년의 이 세계는>이라는 작품이다.
케냐(지적 감사합니다)인도네시아를 “오바마네 동창들”로 인식하고 있는 점은 귀여운 정도지만, 미국과 사이 안 좋은 중동이나 저개발국이 모여 있는 남미, 아프리카 대륙을 보면 심각한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다. 으힉 거기 존나 사막! 거기는 막 배고프고 그런 곳! 오우 다이아몬드! 우이 씨 에이즈! 너네는 사탄! 테러리스트! 드워프족들! 가정부들 데려오는곳! 이외에도 굉장한 것들이 많으니 직접 한번 찾아보도록 합시다.
그런데 아래 이야기를 읽고 나면 미국인들이 인도를 ‘요가’와 동일시하는 것 정도는 전혀 부당하게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지난 8일, 가장 빠른, 가장 바른 연합뉴스에는 아래와 같은 기사가 실렸다. 부분을 발췌한 것.
(뉴델리=연합뉴스) 유창엽 특파원 = 인구 12억의 인도 보건부가 산아제한과 에이즈 방지를 위해 무료로 배포하는 콘돔 수요가 급증, ‘즐거운’ 고민에 빠졌다. 보건부는 정부 지침에 따라 2005년부터 HLL의 전체 콘돔 생산량 가운데 75%를 구입, 무료로 배포한다. 인도 정부는 1960년대 산아제한 정책을 시작했다. 기혼 여성의 피임약 사용률은 1970년 13%에서 2009년에는 48%로 크게 높아졌다.
포털사이트에 게시된 위 기사의 아래에는 심각한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는 댓글들이 있었다. “우리가 인도 따위에서 일어나는 이런 일을 왜 알아야 하나”라는 댓글에는 ‘콘돔’이라는 키워드에 이끌려 무심코 클릭을 하고만 자신에 대한 쓰라린 반성이 녹아 있어 마음이 아팠다. “무능한 새끼들은 애 안낳는게 맞음”이라는 댓글은 캡쳐해뒀다가 올 추석때 친척어른들의 덕담에 보답하는 데 사용해도 좋을 것 같다.
인상을 쓰면서 뒤로가기를 눌러 어찌어찌 하다가, 같은 통신사가 인도의 산아제한 정책에 대해 지난 6월 12일에도 보도한 적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 역시 아래에 그 기사의 일부를 발췌했다.
(뉴델리 블룸버그=연합뉴스) 오수진 기자 = 폭발적인 인구 증가로 고심하는 인도 정부가 체계화된 산아제한정책 없이 여성들에게만 불임 시술을 사실상 강요해 비판받고 있다. 인도의 산아제한 정책은 불임 수술 장려 이외에 전무한 수준이다. 전문가들은 1979년부터 벌금 부과, 사회보장혜택 미제공 등 다양한 산아제한 정책을 편 중국과 달리 인도의 정책은 여성의 임신 선택권을 철저히 통제하는 방향으로만 흐른다고 지적했다.
통신사가 자기부정을 하고 있어! 8월 8일에 보도된 대로 인도 보건국이 2005년부터 힌두스탄 라텍스 리미티드사가 생산하는 콘돔의 75%를 사서 보건소를 통해 나누어 주고 기혼 여성의 피임약 사용도 장려하고 있다면 이건 상당히 체계화된 산아제한 정책인 건데, 6월 12일 보도는 단호하게 이 나라에는 여성들에게 불임수술 장려하는 것 말고 다른 산아제한 정책이 없다고 말한다.
오보인 것으로 추정되는 6월 12일 기사는 국내에서 쓰여진 것 같고 8월 8일 기사는 특파원이 쓴 것인 만큼 좀더 믿을만해 보인다. 인도는 멀고도 넓은 나라니까 관련 현황을 제대로 파악하는 게 어려워서였을 거라고 한 수 접어주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전무하다’같은 형용사는 이 세상에 흰 까마귀가 단 한 마리도 없음을 확인하는 수준의 검증을 거치고 나서 사용해야 한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뭔가 존재한다는 걸 증명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작업이니까.
그런데 정말이지 미국인들은 한국을 무엇에 동일시하고 있을까? 얀코 체코프의 웹사이트에 게시된 <부당한 동일시 지도> 속 한국은 너무 작아서 글자를 읽을 수가 없다. 얀코 체코프의 작품과 어떤 선후 관계를 갖고 있는지는 파악할 수 없으나 미국의 한 네티즌도 유사한 지도를 만들었었다. 그 지도에 한국은 “스타크래프트 좀비”로 부당하게 동일시되어 있었다. 부당하다. 지금은 LOL이 1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