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 연설이 오바마 표절이라는 글을 올린 뒤 여러 항의를 받았다. 댓글에는 괜찮았는데 메일로, 페이스북 메시지로, 심지어 지금 몇 년째 놀리고 있는 내 블로그까지 찾아와 그게 무슨 표절 이냐부터 시작해서, 오버 아니냐, 더 나아가 치사하다는 말까지 들었다. 그래서 좀 길게 설명한다. 그게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는 분들은 글이 길어도 꼭 읽어봐 주시기 바란다.)
“토론의 달인이므로 여러분을 제압할 수 있다는 전제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재주로서 진실을 덮으려 하는 사람으로 좀 비하하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토론의 달인이 아닙니다.
나는 실제로 몇몇 토론에서 지지 않았습니다. 토론에서 지지 않기 위해서 나는 인생에서 하고 싶은 일을 많이 참아야 했고, 편한 길을 많이 포기하고 어려운 길을 걸었습니다. 내가 토론에서 이겼다면 삶으로서 증명하고 대화했기 때문입니다. 말재주로 이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검사와의 대화’에서 “토론의 달인” 운운하며 비아냥거리는 검사에게 대답한 말이다. 사람들은 흔히 말과 글을 ‘기술’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측면이 전혀 없지는 않다.
갈고 닦고 연습하면 늘어나기도 하는 ‘스킬’의 부분이 분명히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일부분이다. 또한, 필수적인 것도 아니다. 누군가의 말과 글은 바로 그의 삶이다.
누군가의 말이 아름다운 것은 그의 삶이 아름답기 때문이고, 누군가의 말이 믿음직스럽다면 그의 인생이 믿음직스럽기 때문이다. ‘기술’이란 것은 그의 삶을 담은 말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부가적인 것일 뿐이다.
따라서 누군가의 말을 인용한다는 것은 그의 인생을 그대로 가져다 쓰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이럴 때는 언제나 그에 대한 존경과 존중의 뜻으로 출처를 밝힌다. 그럼으로써 그 말은 더욱 빛을 발하게 된다.
유시민의 항소이유서의 마지막 구절이었던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격언은 그 앞에 첨언한 “네크라소프의 시구”라는 설명으로 인해 더 큰 힘과 매력을 가질 수 있으며, 그 격언을 인용한 유시민의 인품까지 돋보이게 되는 것이다.
오바마의 “미국은 진보의 나라도, 보수의 나라도 아닙니다. 국민의 나라입니다”라는 연설이 멋있었던 것은 대구(對句)나 대비(對比)라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그 말을 한 사람이 바로 그가 흑인 진보 정치인으로서 노선과 인종을 둘러싼 분열과 반목에 치열하게 싸워왔던 오바마였기 때문이다.
같은 말을 트럼프가 했다면 유머 감각이 뛰어나다는 소리를 들었을지는 몰라도 결코 감동을 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안철수가 오바마의 연설이 멋있어서 쓰고 싶었다면 이렇게 해야 했다.
“나중에 미국 대통령이 된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은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미국은 진보의 나라도, 보수의 나라도 아닙니다. 국민의 나라입니다.’ 저는 이 자리에서 이렇게 얘기하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진보의 나라도 보수의 나라도 아닙니다. 국민의 나라입니다.'”
이렇게 하기 싫었다면 쓰지 말았어야 한다. 폼이 덜 난다고 설명도 없이 오바마의 연설을 글자만 바꾸어서 갖다 쓰는 것은 바로 그 말에 담긴 오바마의 인생을 훔쳐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설명 없이 무단으로 인용할 것 같으면 제대로라도 했어야 한다. 안철수는 오바마의 “미국은 백인의 나라도, 흑인의 나라도, 히스패닉의 나라도, 아시안의 나라도 아닙니다”라는 부분을 이렇게 바꾸어 썼다. “이 나라, 청년의 나라도, 어르신의 나라도, 남자의 나라도, 여자의 나라도 아닙니다.”
오바마의 연설은 미국의 심각한 인종차별과 대립을 얘기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청년과 어르신이, 그리고 남자와 여자가 미국의 인종 만큼 차별하고 차별받고 치열하게 대립하는가?
이것은 그냥 오바마의 연설에 아무 말이나 끼워 맞춘 것이다. 흑인 정치인으로서 인종차별에 평생 싸워온 오바마를 두 번 욕 보이는 짓이다. 이것을 오마이뉴스에서는 ‘차용’이라고 쉴드해줬다.
합의된 정의는 없지만 보통 ‘차용’은 “자기 고유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어떤 무명 개그맨이 “궁금해요? 궁금하면 500원”이라고 하면 누가 봐도 허경환의 유행어를 재미있으라고 쓰는 것이다. 이런 것이 ‘차용’이다.
그런데 거기에 그치지 않고 계속 자기 유행어인 양 시도 때도 없이 쓰면 그것은 양심 없는 ‘도용’이 된다. 또한, 보통 차용은 다른 직역의 다른 삶을 사는 사람의 말을 사용할 때에 해당한다.
어떤 정치인이 연설에서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라는 말을 넣었다면, 박목월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전문 시인이 쓴 시를 인용한 것”이라는 공통 인식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차용’은 말과 글을 멋스럽게 하거나 재미있게 하기 위해 ‘양념’으로 사용하는 기법에 불과하다. 안철수의 경우처럼 메인 메시지에 가까운 대목에 다른 사람의 브랜드가 붙어 있는 표현을 ‘차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원문: 고일석님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