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와이 여행의 마지막 날, 호텔에서 가까운 한 커피숍에 들렀다. 두 잔의 아이스커피를 시킨 후 자리를 잡고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우리 세 사람. 나는 문득 엄마에게 하나의 질문을 던졌다.
엄마, 지금 당장 어떤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야 한다면 엄마는 뭘 가르칠 거야?
그 질문을 던지는 동시에 나는 생각했다. 어릴 적부터 봐온 엄마의 모습, 엄마의 직업들, 엄마의 성격, 엄마의 친구들, 엄마의 가정환경, 엄마를 웃게 하는 것들, 또 엄마를 울게 하는 것들에 대해서. 엄마에게 묻고 나서 나는 나 자신에게도 같은 질문을 해보았다.
나는 무엇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일까?
‘가르친다’는 건 정체되고 무미건조한 교실 속 수업만 칭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가르치다’라는 동사는 ‘말하다,’ ‘나누다,’ ‘알려주다,’ ‘도와주다’의 의미를 지닌다. 나는 무엇을 말하고, 나누고, 알려주고,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고 싶은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을 때 새로운 인생이 시작될 것이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살아가야 한다지만 말이 쉽지 실제로는 참 어렵다. 두 눈을 뜨고 살아도 코가 베이는 세상인 데다가, 하나의 생각에 집중하기에는 방해세력들이 너무 많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올바른 시간에 던져지는 올바른 질문이 꼭 필요하다. 질문을 시작해야 답도 시작할 수 있을 테니까.
새해가 아니라도 언제든, 작년보다 더 나은 삶을 살고 싶다는 열망이 있다면 올바른 때가 될 수 있다. “나는 무엇을 가르치는 사람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올바른 때.
고를 수 없는 것과 고를 수 있는 것
각 개인에게는 당사자만이 시작과 과정과 끝을 아는 그들만의 체험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어른이 된 지금껏 슬픔을 극복한 이야기라든지, 어려움을 이겨낸 사례들.
쉽게 말해 인생에는 삼복이 있다고 한다. 부모복, 남편/아내복, 자식복. 하지만 인생은 공평하다가도 불공평한 것이라서, 삼복 모두를 가지고 태어나 그 모두를 가지고 죽는 사람은 없다. 설령 그 모두를 가지고 태어나 행복하게 죽은 사람이 있더라도 삼복이 인생과 내세의 완벽한 행복을 보장한다는 명확한 증거도 없다. 그러니까 우리 모두는 태어난 그 순간부터, 이겨내야만 하는 상황들을 끊임없이 맞닥뜨리게 되어있다.
답답한 일상에서 가장 불공평하다고 여겨지는 것 중 하나는 ‘가족’이다. 부모, 형제자매, 친척들과 맺어진 연. 동전 하나 넣고, 원하는 음료수를 고르는 자판기가 훨씬 더 합리적이라고 여겨질 만큼, 가족은 선택할 수도 고를 수도 없이 우리에게 주어진다. 오죽하면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와 같은 말들이 생겨났겠는가?
이 사회는 배경 가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탄생의 시점부터 나누어버린다. 그리고 그렇게 나누어진 사람들은 각자가 속한 세계와 주어진 것들 사이에서 나름의 선택을 하고 산다. 그 선택이 A가 아닌 B를 골라도 삶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을 의미 없는 선택일지라도.
우리는 개인이 가진 성격과 성향, 믿음과 꿈이라는 무형적 자산에 의해 서로 다른 모습의 사람들로 성장해간다. 연봉이 엇비슷한 같은 중산층 부모를 가졌다고 할지라도 자식들의 미래는 닮아있지 않다. 죽음의 이유가 같은 문제적 부모를 가졌다고 할지라도 자식들의 미래는 전혀 닮아있지 않다. 얼마나 흔한 경우인지는 모르겠으나 금수저로 시작해서 흙수저로 끝나기도 하고, 흙수저로 시작해서 금수저로 끝나기도 한다. 외적 요소가 중요한 만큼, 내적 요소도 중요하다는 뜻이 아닐까.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나에게 주어진 가족이라는 배경과 그 배경을 가지고 지금의 나로 자라온 길을 다시 떠올려보게 된다.
탄생과 죽음 사이에 있는 것
여행에는 출발과 도착이 있다. 학교에는 입학과 졸업이 있고, 사랑에는 만남과 이별이 있다. 우리 모두에게는 탄생과 죽음이 있다. 죽지 못해 산다는 사람에게는 ‘죽지 못함’이 삶의 이유가 된다. 열심히 살든 대충 살든 우리에게는 각각 살아감의 이유가 있다.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살아가는가?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살아가는가? 더 많은 나라를 여행하기 위해 살아가는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우리는 이유를 가지고 있다. 나라는 사람이 탄생하기까지 필요했을 부모님과 그들의 부모님과 그 부모님의 부모님. 가문을 타고 내려오는 색깔과 감성. 방향과 목표. 그리고, 태어난 이후부터 만남과 경험을 통해 형성된 나만의 취향과 감각. 동기와 의미. 이것들이 한데 섞어져 꿈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일상 속에 새겨진다.
어떤 꿈이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해야 할 행동들은 너무도 많다. 우리는 에너지와 시간이 넘치는 젊음의 시절을, 하나(혹은 그 이상)의 꿈을 이루기 위한 준비운동, 연습, 실험으로 보낸다. 그중 소수의 사람들의 꿈은 ‘시대’와 맞아떨어져 대박이 나고, ‘시간’과 맞아떨어져 히트를 친다. 다른 이들의 꿈은 그저 평범하고 소박하기도 하다. 또 어떤 이들의 꿈은 파도를 만나 산산조각이 나고, 재앙을 만나 불타버리기도 한다.
당신에게는 어떤 꿈이 있는가? 아침마다 나의 눈을 뜨게 하는 것, 아직은 멀리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늘 마음과 시선이 향해있는 그 꿈을 떠올려본다.
내게 주어진 것과 내가 쥔 것 사이에서 해야 할 질문
좀 더 단순한 질문일 수도 있었다. 예를 들어, 당신의 부모는 어떤 사람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초등학교 때 완벽히 터득한 수학 공식으로 아버지의 장단점과 어머니의 장단점을 더해, “당신은 이런 장점과 이런 단점을 가진 사람입니다”라고 끝냈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면 모든 것이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이런 질문이었을 수도 있겠다. 당신의 장래희망(들)은 무엇이었는가? 초등학교 땐 선생님, 중학교 땐 디자이너, 고등학교 땐 돈 많이 버는 남편의 내조왕 아내. 이 모든 장래희망들을 더해서, 당신은 이런 가능성과 인생의 가치를 가진 사람입니다 라고 마무리했어도 제법 읽어볼 만한 글이 하나 나왔을지 모른다.
하지만 인생은 공식을 사용해서 하나의 답을 유출할 수 있는 시험이 아니다. 예상외의 해프닝과 온갖 뉴스들이 가득하다. 그래서 굳이 묻고자 한다.
당신은 타인에게 무엇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인가요?
이 질문이 당신을 알아가는 데 있어, 앞으로 남은 당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꼭 필요한 이유가 있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가르칠 수 있는 것. 당신만이 설명할 수 있는 당신의 이야기가 있다는 것은 시작이 어떤 모양이었든, 당신 부모님의 재정 수준이 어떠하든, 부모님의 사이가 좋았든 나빴든, 지금 당신의 모습이 맘에 들든 맘에 들지 않든, 당신의 일상이 어떤 수준이든, 당신의 꿈이 얼마나 이루어졌든, 이런 조건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우리가 미디어를 통해 만나는 사연 속 주인공들은 ‘누구에게도 말 못 할 부끄러운 과거를 지나 이만큼 성장했다’고 말한다. 혹은 ‘아직 조금은 부끄러운 사람이지만 이제부터 새롭게 도전합니다’고 외친다. 과거와 현재 모두가 부족한 것 하나 없는 삶을 살아왔다면,‘한 치 앞도 모르는 미래를 위해 이렇게 준비한다’고 조언한다. 감동과 영감을 주는 이야기에는 과거와 미래가 연결된 ‘오늘’이 있다.
내가 누군가를 가르쳐야 하는 상황이 주어졌다고 가정하면, 내 인생에서 나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일들과 오롯이 나의 힘으로 이겨낸 사건들, 그리고 마음을 들여 쌓아 올린 관계들이 보인다. 세계의 리더들은 역사를 통해 오늘 속에서 미래를 준비한다. 자신이 걸어온 삶을 통해 좀 더 지혜롭게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오늘’이란 기회를 붙잡는 것이다.
유명 강사 김미경이 자신의 인생 스토리로 젊은 청년들의 인생과 관계를 코칭하는 전문성을 계발한 것처럼 저금을 좋아하는 젊은이라면 20대의 돈 관리법을, 외국어를 못하는 부모 밑에서 두 언어를 마스터한 사람은 언어 공부법을 자신만의 분야로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이야기는 아이디어가 되고 질문은 답을 제시한다. 나의 과거와 미래를 이해할 때 오늘 해야 할 일들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같은 질문, 다른 정답
각 개인이 가진 이야기를 어찌 다 이해한다 말할 수 있겠나. 누군가가 어릴 적부터 저금하며 이겨낸 유혹을 나는 다 알 수 없고, 다른 이가 두 언어 사이에서 느꼈어야만 했던 복잡함을 나는 결코 짐작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을 나누는 이유는 이해받기 위함이 아니다. 경험 속에서 얻은 것을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주면서 나의 이야기를 완성해가기 위함이다.
엄마에게 던진 질문이 나에게로 향해 오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이 질문의 답이 ‘글’이라는 것을, ‘글’을 통해서 나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나의 시선을 전달하는 것이 나만의 이야기를 완성해가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았다.
떠나야 할 때를 알기에 더 무거운 질문과 더 깊은 의미를 주는 여행처럼, 누군가에게는 들려주어야 한다는 걸 알기에 더 깨어있어야 하고, 더 열려 있어야 하며, 더 기록해야 하는 나의 삶.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지 모를 때도 있다. 하지만, 세상엔 정답이 아직 없는 질문들도 많다. 아무도 읽지 않은 글, 누구도 듣지 않는 음악처럼. 그러니까 계속 쓰다가 멈췄다가를 반복하면서, 마음이 가는 대로 쓰면 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 나의 목소리가 담긴 이 글이 당신에게 닿을 거라고, 당신이 아직 모르는 일을 알도록 일러줄 거라고 나는 믿는다.
원문: Yoona Kim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