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침대에 누워 잠잘 준비를 하던 동생이 물었다.
“할머니한테 뭐라고 이야기해야 해?”
나는 무슨 뜻인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아 그녀에게 다시 물었다.
“무슨 이야기?”
“고모 말고는 아무도 못 알아보신대.”
나도, 2살 아래인 내 동생도, 기억을 잃어버린 할머니에게 무슨 말을 건네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지금껏 살면서 둘 중 누구도 살아온 기억이 옅어져 가는 사람을 가까이에서 만나본 적이 없다. 나의 인생에 있어 2016년은 이제 고작 28번째 해이기도 하고. 짧은 대화 끝에서 나는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기억이 사라진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무라카미 하루키의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을 이제 막 시작하던 참이었다. 영문으로 그의 글을 읽는 것은 그 밤이 처음이었다. 책장 하나 넘길 힘 마저 몸에서 빠져나간 기분이 들었다. “너무 슬프다,”고 동생에게 이야기했다. 그녀는 급히 좋은 노래를 찾았다며 대화의 주제를 바꾸어 주었다.
나는 그때 ‘할머니’가 누구인지 잘 몰랐다
할머니는 한국에 계신다. 나와 동생이 먼저 캐나다 밴쿠버에서 학교생활을 시작한 것이 2002년, 부모님과 막냇동생, 그리고 할머니가 우리를 따라 이 땅에 도착한 게 2003년이었다. 여느 이민 가정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땅에서 올바르게 정착하고 싶다는 일념 하나 때문에 부모님은 늘 바쁘셨다.
유치원생인 막냇동생이며 겨우 중학생이었던 나와 동생을 챙겨주시러 할머니는 낯선 이곳에서 몇 달을 우리와 함께 생활하셨다. 할머니의 하루는 매일 변함이 없었다. 가족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아침을 먹고 나면 당시 일식당을 운영 중이던 부모님은 곧장 가게로 향하셨고 나와 여동생과 막냇동생은 할머니와 함께 집을 나섰다.
우리가 다니던 고등학교와 막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같은 방향이었다. 할머니가 막냇동생과 함께 초등학교 쪽으로 난 길을 따라 걸어가는 것을 보면서 나와 여동생은 조금 다른 뱡항으로 난 길을 따라 학교에 갔다. 할머니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상상해본 적도 실제로 본 적도 없지만, 막내가 교실까지 잘 들어간 것을 보고 나면 그녀는 뒤를 돌아서 왔던 길을 다시 걸어 집으로 향했을 것이다. 넷이 걷다 혼자 걷는 길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막내의 학교가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할머니는 늘 동생을 데리러 가셨다. 밴쿠버에서는 부모나 조부모, 형제나 자매가 12세 이하의 초등학생을 꼭 데려다주고 데리러 와야 했다. 내가 자라온 한국과 이곳은 그런 면에서 많이 달랐다. 4살 때부터 혼자 20분을 걸어서 피아노 학원에 가고, 7살 때부터 혼자 시외버스를 타고 1시간이 넘게 걸리는 외갓집으로 향했던 나의 과거는 밴쿠버에서는 불가능한 ‘사건’ 혹은 ‘사고’로 여겨졌다.
할머니의 손을 붙잡고 막내는 집에 왔다. 때때로 나는 그런 그 둘이 집에 도착하기 전에 집 혹은 동네 도서관에서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학교가 끝나고 동생이 있는 초등학교로 달려가 할머니와 동생과 함께 집으로 걸어오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텐데, 그때는 그런 생각을 못 했다. 할머니는 베이비시터가 아니라 우리 할머니였다. 나는 그때 ‘할머니’가 누구인지 잘 몰랐던 것 같다.
이제 와 그때를 기억해보면 할머니는 참 사교성이 뛰어난 분이셨다.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셨던 할머니는 외국인에게도 늘 먼저 말을 걸었다. 언제나 그녀의 언어, 한국말로. 주로 할머니가 혼자 어떤 문장을 중얼거리시면 옆에 있는 외국인은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당황해하며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옆에 앉아 있거나, 다른 볼일이 있는 것처럼 그 자리를 떠났다.
잠깐 자리를 비웠다가 다시 할머니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는 나를 둘 중 한 명은 꼭 쳐다보며 웃음 지었다. 할머니, 아니면 그 옆에 있는 외국인. 할머니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던 외국인 몇이 그녀 옆에 앉는 나를 민망한 듯 웃으며 쳐다보았다. 그들의 표정을, 그들의 입꼬리에 잠시 머문 미소를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할머니에게 사랑은 그런 것이었다
띠동갑인 나와 할머니는 60년이라는 세월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앉아 텔레비전을 보곤 했다. 사춘기 소녀였던 나는 매해 새로운 드라마, 새로운 캐릭터에 빠져 있었고, 할머니는 불그스름한 얼굴로 영화 같은 로맨스를 꿈꾸는 나의 곁에서 함께 드라마를 봐주셨는데, 남녀 주인공이 사랑을 결심하고 달빛 아래 입술을 나누는 장면에서는 여지없이 한숨 섞인 탄식 소리를 내신 후 두 손으로 자신의 눈을 가렸다.
나는 장난기 많은 초등학교 친구 같은 손녀였다. 매번 할머니의 손을 잡아 끌어내리며 웃곤 했다. 나보다 더 소녀 같았던 할머니가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 없었다. 할머니에게 사랑은 그런 것이었다. 아무도 볼 수 없게 두 손으로 가렸어야만 하는 그녀의 두 눈과 같은 것이었다.
그 시대의 수많은 부부는 할머니 할아버지처럼 만났고 결혼했다. 지금 시대의 연애와 비교하자면 결혼식 전날이 소개팅한 날이고, 결혼식 날이 두 번째 데이트쯤 되겠다. 그래서 매일 매일이 부끄럽고 쑥스러웠던 사랑.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을까, 저렇게 하는 것이 실수는 아닐까, 묻게 되고 조심하게 되는 사랑. 표현하는 것은 선을 넘는 것이고 요구하는 것은 욕심일 수밖에 없었던 사랑.
짧은 결혼생활 동안 그녀는 두 손으로 그녀의 입술을 막고 어떤 진심도 입으로는 전하지 않았을 것이며, 자신의 불행을 인정하지 않으려 그녀의 두 눈을 가렸겠지. 사람들에게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지 않고자 두 귀를 막았겠지.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지키고 싶었을 바로 그것이 그녀만의 사랑이었을 것이다.
기억을 잃는다는 것
막냇동생이 태어났을 때 나는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집안의 모든 식구가 기다려온 남자아이. 부모님에게는 아들로, 할머니에게는 손자로 우리 곁에 왔지만, 나에게는 2살 터울의 여동생과 다를 것 하나 없는 그냥 동생이었다.
어른들이 왜 그렇게 막내를 보며 그때까지와는 조금 다른 웃음소리를 내는지 나는 잘 몰랐다. “너는 씨를 참 잘 팔았다”며 여동생에게까지 그 웃음소리가 닿았지만 나에게는 그 소리가 닿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할머니를 행복하게 하는 내 남동생이 너무 좋았다. 소꿉놀이할 때 써먹을 수 있는 진짜 사람 인형 같기도 했고, 웃는 모습, 특히 똥 쌀 때의 표정이 유난히 예쁘기도 했다.
다 먹지도 못할 거면서 보이는 대로 과자 봉지를 열어버렸던 나 때문에 할머니는 이 찬장 저 찬장 돌아가며 새우깡을 숨겨놓았다. 동생에게 과자를 빼앗기는 것에 질투를 느끼거나 마음 상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나의 행동을 보고 나를 야단치는 것이 좋았다. 내 손에 들린 새우깡 봉지를 뺏어서 막냇동생에게 주는 그 모습이 진짜 그저 좋았다. 나는 주로 과자를 뺏긴 후에 막냇동생 옆에 바짝 붙어 앉아 같이 과자를 먹으면서 웃었다. 할머니를 쳐다보면서.
몇 주 전, 지금 일하는 직장에 새로운 여자 재봉사가 일을 시작했다. 중년의 중국 여성으로 우리 할머니와 키며 얼굴이며 모습이며 분위기가 너무 비슷해서 나는 그녀의 자리를 지날 때마다 다시 고개를 돌려 그녀의 얼굴을 한 번 더 쳐다본다. 할머니보다야 25년 정도 더 젊은 분이지만 그녀의 얼굴을 보면 나 어릴 적, 내 과자를 빼앗아 막내에게 주며 나를 혼내던 할머니가, 함께 나란히 앉아 드라마를 보며 부끄러운 표정을 짓던 할머니가 더 선명하게 기억난다.
이런 작은 기억들이 그녀의 세월 속에 색깔을 잃고 흩어져 사라진 것이겠지. 기억을 잃는다는 것, 나는 상상으로만 그려볼 뿐이다. 나보다 훨씬 더 자주 만나고 자주 이야기를 나누고 자주 식사를 했던 사촌오빠와 사촌 동생들도 할머니는 더는 못 알아보신다. 젊었을 적 돌아가신 할아버지, 먼 이국땅으로 거처를 옮긴 아빠도, 떡두꺼비 같은 손자를 낳은 우리 엄마도, 씨 하나 참 잘 팔았던 여동생도, 이제 몇 달 후면 대학생이 되는 우리 막냇동생도 알아볼 수 없으시겠지.
할머니를 쫓아다니며 그렇게 괴롭히고 깔깔거리며 웃어 젖히던 장난꾸러기 큰 손녀딸도 알아보실 가능성은 없지만, 그래도 나는 아마 소녀 같은 할머니를 한눈에 알아보고 한걸음에 달려가 그녀를 품에 안을 것이다. 이제는 두 손으로 가리지 않아도 두 손으로 가린 것처럼 불분명해진 그녀의 과거를 내 안에 담고 힘차게 웃으며 장난을 쳐야지. 할머니는 이번에도 분명 나보다 더 소녀처럼 웃으시겠지. 부끄럽고 쑥스러우시다는 듯이. 웃는 자신의 입을 두 손으로 가리시면서.
원문: Yoona Kim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