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대 국회에서 내가 통과시킨 법 중에는 매우 중요하고 비중 있는 법안이 꽤 있었다. 상가권리금보호법, 편의점 등 프랜차이즈 불공정해소법, 21년 만에 통과된 차명거래금지법(=금융실명제법)이 모두 그렇다. 이 법안들의 공통점은 박근혜 대통령의 ‘선의를 존중하려고’ 노력했다는 점이다.
예컨대 차명거래금지법의 경우 2012년 대선 TV토론에서 당시 박근혜 후보가 ‘지하경제 활성화’라는 말실수를 했다. 그래서 야당-진보성향 유권자 다수가 이를 조롱했다. 반면 나는 논란이 커졌기 때문에 이를 ‘지렛대 삼아’ 그동안 통과되지 못했던 ‘차명거래금지법 개정’ 작업에 착수했다(실제로 나중에 청와대는 우리가 만든 법을 인지했지만 패스했다).
국회에서 법안이 통과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51%를 넘어야만 한다. 51%를 넘는다는 것은 그것이 압박에 의해서든, 쇼부에 의해서든 상대방도 ‘합의 가능한’ 수준에 도달했음을 의미한다. 이렇든 저렇든 상대방의 선의를 존중하려는 것은 정치하는 사람으로서 매우 바람직한 자세다.
선의를 존중하려는 것은 자세와 태도의 영역이다. 그런데 착한 사람, 좋은 마음씨, 사이좋게 지내는 것 자체가 정치를 하는 목적은 아니다. 좋은 자세와 좋은 태도가 중요한 이유는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삶을 개선하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수단적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즉, 좋은 자세와 좋은 태도도 소중하지만 좋은 방향과 좋은 콘텐츠를 동시에 갖지 않으면 우리는 실제로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없다.
좋은 세상을 위한 좋은 방향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비전-대안-콘텐츠’의 영역이다. 조금 더 구체화한다면 ‘정책수단’이다. 즉, 비전과 정책수단까지를 겸비해야만 ‘문제를 해결하는’ 리더가 될 수 있다. 한국의 야당, 민주화운동세력, 진보는 ‘반독재 민주화’를 통해 성장했다. 본질적으로 ‘반대운동’과 ‘정치투쟁’을 통해 성장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시대는 사회경제적 모순을 해결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그러자면 ‘정책’도 알고 ‘정치’도 알아야 한다. 정책도 특정 분야만 알아서는 안 된다. 두루두루 넓은 시야를 갖되 구체적인 이슈도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한다. 즉 정책 전반을 이해하되 정치적 감각도 있어서 정책적 안목으로 정치를 독해하고, 정치적 감각으로 정책을 재구성하는 능력을 갖춰야만 한다. 왜? 그래야만 현재의 사회경제적 모순들을 극복하며 우리가 꿈꾸는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방법은 ‘팀을 통한 협업’이 될 수밖에 없다.
“대연정에서부터 선의 발언까지 한 달 반 이상 각 신문 정치면과 9시 뉴스에 나왔던 핵심이슈에 대해 제가 충분히 뒷감당할 만큼 실력을 준비하지 못했다는 자책이 솔직히 있다.”
안희정 지사의 자평이다.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쉽지 않은 자세다. 우리는 정직하게 성찰하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 진보-민주화운동-야권 세력을 너무나 많이 봐왔다.
좋은 세상을 향한 강렬한 열정, 자신의 부족함을 들여다볼 줄 아는 정직함과 성찰 능력을 갖춘 사람에게는 미래가 있다. 그 사람은 오늘보다 내일 더 발전할 것이다. 시행착오를 통해서 배우는 사람, 언제인가 안희정 지사가 더 단단하고, 더 강한 사람이 되어 복귀하기를 기대해본다.
원문: 최병천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