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도 거룩한 신을 믿는 종교인이나 성직자는 누구보다 정직하고 정의로운 가치관을 가졌을 것이라 기대한다. 그러나 현재 대한민국 상황만으로도 알 수 있듯이 심심찮게 드러나는 교회와 기독교인의 행태를 보면 기대와는 정반대 모습을 볼 수 있다.
의로우신 하나님과 진리를 믿고 따른다는 종교인이 도리어 명백한 불의와 악의 편을 들며 정직과 진실을 왜곡하는 데 앞장서는 모습을 보며 많은 사람이 당황하고 이해하지 못한다.
나 또한 몇 년 전 내가 다니던 교회 담임목사가 상습적인 성추행과 성폭력 혐의를 받고 불미스럽게 물러나면서 그 사건을 대하는 교인들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당연히 자숙하고 회개하는 시간을 가지며 물러났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교인들도 있었지만, 많은 교인이 도리어 피해자들을 욕하고 비난하며 이들이 ‘교회를 흔드는’ 꽃뱀이라고 생각했다.
교회 일에 헌신적이었던 어떤 교인은 “큰일을 하려는 목사는 그런 실수와 허물쯤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 아니냐”며 노골적으로 그를 두둔했다. 지금이야 개신교인들의 명백한 불의와 악에 대한 그런 반응에 별로 충격을 받지 않지만, 당시 내게는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내가 아는 후배들, 지인들이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 목사에게 합당한 권징과 징계를 교단 측에 촉구하는 활동을 몇 년 동안 하게 됐다. 여기에는 개신교인들의 왜곡된 신앙관을 고쳐야 한다는 절박감도 있었다.
이후 유사한 사건들, 교회 내 온갖 비리, 사회 이슈가 있을 때마다 드러나는 목사·교인들의 ‘정의’에 대한 둔감, ‘악과 불의’에 대한 무지를 지켜보면서 개신교 내 어떤 공통된 원인으로 이런 양상이 드러나는 게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몇 년간 한국교회의 유사한 모습을 관찰하면서 한국교회가 ‘정의’의 가치를 외면하는 이유로 대략 4가지 중요한 원인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 권력에 대한 숭배와 타협
-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번영주의
- 교회 내 팽배한 전근대성과 반지성주의
- 정의가 신앙의 본질과 상관없다는 생각
1. 권력에 대한 숭배와 타협
한국의 많은 교회는 민주화 과정의 엄혹한 시절에도 한 번도 불의한 정권에 맞서 싸우거나 저항하여 사회적 불화를 일으킨 적이 없다. 정권의 독재에 맞서 싸우고 저항한다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멀쩡한 사람을 고문해서 감옥에 집어넣고, 간첩으로 누명을 씌어서 사형을 시키던 시절에도 그런 정권에 아무런 저항도, 예언자적 목소리도 들려주지 않았다. 반대로 그런 권력에 적극 야합하고 축복 기도를 해 주며 자신들 위상과 권력을 공고히 하는 데 힘썼다.
대학생 선교 단체 CCC의 김준곤 목사는 국가조찬기도회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장기 집권을 위한 10월 유신을 칭송하며 다음과 같이 축복 기도하였다.
민족의 운명을 걸고 세계의 주시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10월 유신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기어이 성공시켜야 하겠다. (중략) 당초 정신 혁명의 성격도 포함하고 있는 이 운동은 (중략) 마르크스주의와 허무주의를 초극하는 새로운 정신적 차원으로까지 승화시켜야 될 줄 안다.
외람되지만 각하의 치하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군 신자화 운동이 종교계에서는 이미 세계적 자랑이 되고 있는데, 그것이 만일 전 민족 신자화 운동으로까지 확대될 수 있다면 10월 유신은 실로 세계 정신사적 새 물결을 만들고 신명기 28장에 약속된 성서적 축복을 받을 것이다.
- 〈교회연합신보〉, 1973년 5월 6일
그리고 무고한 시민 수백 명이 학살되거나 다친 광주민주화운동 직후인 1980년 8월 6일, 한경직 목사를 비롯한 유력한 교계 인사들은 서울 롯데호텔 에메랄드룸에서 나라를 위한 조찬기도회를 열었다. 이들은 전두환을 앞에 두고, 전두환의 군권 찬탈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그의 앞날을 축복해 주었다.
이처럼 한국 개신교는 권력에 야합하며 교세를 키우고, 안정을 담보하기 위해 정치적 올바름과 정의의 문제를 꾸준히 외면해 왔다. 권력자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고 눈 밖에 나지 않기 위해, 그가 듣고 싶어 하는 축복의 말씀만 들려주었다. 하나님의 진리와 정의를 선포하고 악한 권력을 견제하는 선지자의 소명을 버렸다.
많은 사람이 억울하게 죽어 가고, 인권을 탄압받고, 간첩 누명으로 소중한 생명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가도 교회의 안정과 부흥을 위해, 또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잘못된 것이라 소리쳐 저항하지 않았다. 마치 구약에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폭주하는 왕들에게, 그들이 듣고 싶은 거짓 예언만 들려주며 아부하는 왕궁의 제사장이나 종교 지도자들 같은 모습으로 ‘하나님의 정의’를 외면해 왔다.
이런 권력 지향적인 아부와 숭배는 과감하게 세상 질서와 권력에 도전하여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는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거세시켰다. 그래서 불의한 세상에 도전하지 않고 그들이 좋아할 만한 당의정으로 뒤덮인 욕망과 탐욕의 복음을 전하며 세상의 부조리, 불의에 타협했다.
한국 개신교의 권력에 대한 숭배와 집착은 ‘정의’를 외면하게 하고 복음의 본질조차 왜곡시켜 버렸다. 세상 가치와 부딪치는 진리의 복음이 아니라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와 완벽히 부합하는 탐욕과 권력의 복음을 탄생시킨 것이다. 더 큰 ‘교세’와 ‘권력’을 얻기 위해서라면 불의한 정권과 얼마든지 야합할 수 있기 때문에 ‘정의’ 따위는 그리 중요한 가치가 아니게 된 것이다.
지금 이 나라에서는, 놀랍고도 끔찍스러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예언자들은 거짓으로 예언을 하며, 제사장들은 거짓 예언자들이 시키는 대로 다스리며, 나의 백성은 이것을 좋아하니, 마지막 때에 너희가 어떻게 하려느냐?
- 예레미야 5장 30-31절(새번역)
2.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번영주의
예수께서는 자신을 선한 목자라 지칭하시며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다고 하셨다(요한복음 10장 11절).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씀도 하셨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고 하면, 그는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다 남겨 두고서, 길을 잃은 그 양을 찾아 나서지 않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가 그 양을 찾으면,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 양보다, 오히려 그 한 마리 양을 두고 더 기뻐할 것이다.
- 마태복음 18장 12-13절(새번역)
자본주의 관점이나, 합리적 관점에서 볼 때 이 말씀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1마리 양을 잃어버렸다고 99마리 양을 두고 1마리 양을 찾으러 간다는 것은 남겨진 99마리 양까지 위험에 빠뜨리는 무모하고 어리석은 행동이다. 그럼에도 저런 비유를 하신 것은 예수님이 수의 많고 적음으로 생명의 가치를 따지는 합리주의자가 아니라, 생명의 가치를 따져 단 1마리의 양이라도 소중히 여기는 분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다. 생명의 가치로 보았을 때 99마리나 1마리나 똑같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려 주신 것이다.
교회는 마땅히 저런 예수의 시각으로 사람들을 존중해야 한다. 사람 1명이 생명의 가치로 보이기보다 많은 교인 중 하나로 여겨진다면 얼마든지 99마리 양을 위해 1마리를 희생할 수 있다.
‘정의’는 약자와 소외자를 보호하기 위한 가치이기도 하다. 그들이 힘이 없고 능력이 부족하더라도 외면당하거나 낙오하지 않고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정의로운 말씀이 성경에는 가득하다.
‘외국 사람과 고아와 과부의 재판을 공정하게 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하면, 모든 백성은 ‘아멘’ 하십시오.
- 신명기 27장 19절(새번역)
당신들은 포도를 딸 때에도 따고 난 뒤에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마십시오. 그 남은 것은 외국 사람과 고아와 과부의 것입니다.
- 신명기 24장 21절(새번역)
옳은 일을 하는 것을 배워라. 정의를 찾아라. 억압받는 사람을 도와주어라.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고 과부의 송사를 변론하여 주어라.
- 이사야 1장 17절(새번역)
나 주가 말한다. 너희는 공평과 정의를 실천하고, 억압하는 자들의 손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구하여 주고, 외국인과 고아와 과부를 괴롭히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곳에서 무죄한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지 말아라.
- 예레미야 22장 3절(새번역)
말씀에서 보듯이 집단 내 약자와 나그네, 외국인, 장애인을 배려하고 돕기 위해서는 섬세한 ‘공평’과 ‘정의’의 정신이 필요하다. ‘정의’는 결국 아무리 열악한 조건에 있는 인간이라도 소중한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어떤 억울한 대우도 당하지 않아야 한다는 하나님의 사랑이 구현되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인종, 종교, 성별, 장애나 그 외 기타 어떤 이유로도 차별을 금지하자는 ‘차별금지법’을 가장 앞장서서 반대하는 종교가 개신교다. 세월호 노란 리본을 달고 담임목사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교인을 ‘출교’하는 것이 한국교회 모습이다. 교회가 커지고 다수 교인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소수 교인의 아픔이나 불만은 얼마든지 무시하고 배제할 수 있다. 이런 공리주의적 사고방식이 교회를 지배하고 있다. 결국 교회도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기관이 되어 간 것이다.
다수의 행복을 위해 소수의 아픔과 불편 따위는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는 공리주의적 가치관이 교회를 지배하면 소수 약자들에 대한 배려와 돌봄이 사라진다. 그 결과, 교회에 덕을 세운다는 미명 아래 ‘수가 적은’ 일부 사람에게 집단적 가치에 무조건 순응하기를 요구하며, 섬세하게 그들을 돌아보는 공평과 정의의 미덕은 사라져 간다. 그리고 교회는 부하고 강하고 권력 있는 자들에게 가장 편안한 행복의 공간으로 변해 간다.
3. 교회 내 팽배한 전근대성과 반지성주의
기독교는 원시종교가 아닌 고등 종교다. 샤머니즘 같은 원시종교의 특징은 욕망과 바람은 있지만 자신이 기원하는 신에 대한 구체적인 계시가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성경’이라는 특별한 계시를 통해 신의 존재를 알아 가는 고등종교다.
기독교 신앙에는 인간의 먹고사는 문제, 건강과 소유 문제와 관련한 기도와 간구만 있지 않고 신의 뜻을 알아 가려는 노력이 반드시 수반된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통해 더 나은 인간으로 성숙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자라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원시종교는 욕망의 투사에 대한 간구만 있을 뿐 ‘삶의 진리’를 알려 주는 구체적인 계시가 없다. 그저 욕망하며 기도하고, 욕망대로 이루어지면 감사하고 헌신하다가 다른 욕망이 있으면 다시 기도하는 식으로 신앙 생활할 뿐이다.
교회에 있으면서도 마치 원시종교나 샤먼의 신을 믿듯이 신앙 생활하는 교인이 적지 않다. 그들은 ‘삶의 진리’에 별 관심이 없다. 매주 교회도 다니고 기도도 하지만 그 외의 시간에 따로 성경을 읽거나 하나님의 뜻을 알아 가려는 노력은 별로 하지 않는다. 그저 새벽마다 나와 온전히 자신의 필요를 위해서만 간구하며 기도할 뿐이다.
이들은 희박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목사들의 설교로만 채우려고 한다. 목사들은 이런 성도들의 필요와 욕망에 부합해 신앙과 하나님의 뜻을 단순화시킨다. 목사의 말만 들으면 되고, 목사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교회 봉사를 열심히 하고, 목사 말만 잘 들으면 다 복 받는다고 부추긴다.
그렇게 교회는 반지성주의가 팽배한 욕망의 공동체가 되어 간다. 반지성주의가 가득한 교회 분위기에서 근대적인 민주적 소통과 대화의 리더십은 찾아볼 수 없다. 마치 목회자를 하나님이 세우신 제사장처럼 우상화한다. 이런 우상화는 전근대적인 불통과 권위의 리더십으로 교회를 이끌어 가는 목사를 양산하고 만다.
‘정의’는 이런 토양에서 자랄 수 없다. 정의는 섬세한 사리 분별을 요구하는 덕목이다. 복잡한 현실 속 여러 사람의 이해관계와 욕망의 실타래를 분석해 가장 올바르고 공평한 가치를 찾아내는 작업이 정의를 실현하는 과정이다. 정의 실천에는 인간과 현실에 대한 지나친 낙관과 맹신을 피하면서 구조 악을 견제하며 욕망이 인간을 언제든지 타락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날카로운 지성이 요구된다. 하나님의 뜻을 신중하게 분별하라는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 로마서 12장 2절(새번역)
그러나 많은 교인이 생각하기 싫어하고, 분별하기 싫어하며, 판단하기 싫어한다. 카리스마 넘치는 누군가가 자신을 대신해서 선택해 주고, 정답을 알려 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목회자에게 의지하고 그들의 말을 맹신하며 삶의 중요한 판단을 그들에게 위탁한다.
목회자들은 어떤가. 섬세하고 깊이 있는 지성을 소유한 목회자는 많지 않다. 그저 시스템을 옹호하고 제도를 지지하며 힘 있는 자 편에서 ‘제도를 흔들고 제도에 도전하는 모든 시도’를 악으로 규정하는 단순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목사가 대부분이다. 그런 목사들을 통해 교인들은 또 왜곡된 정보를 받아들이고 사리 분별 능력을 상실한다.
생각하기 싫어하고 성경조차 제대로 모르는 교인들. 목사 말이라면 아무 의심 없이 덥석 믿어 버리는 교인들. 이런 교인들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의’의 가치를 기대할 수 없다. 그래서 많은 교인이 기도 응답으로 소유의 풍성함, 직장에서의 승진, 과업의 성취를 자랑하지만 ‘정의’의 가치에는 이상하리 만치 둔감하고 무지한 것이다.
이들은 그저 모든 사회문제를 개인 노력의 문제로 환원해서 본다. 구조적인 부조리와 시스템의 모순을 알아챌 능력이 없다. 그래서 악인을 지지하고 불의한 권력을 응원하며 약자를 혐오하는 데 아주 쉽게 선동당한다.
시대가 변하여 민주주의, 인권, 노동권, 양성평등의 가치가 어느 정도 높아졌다. 제도적으로도 그런 가치를 지지하고 보완할 수 있도록 시스템이 성숙해졌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는 그런 근대화된 가치관이나 제도를 찾아볼 수가 없다. 어쩌면 모든 전근대성은 ‘신의 다스림’을 ‘성직자의 다스림’으로 단순 환원해서 교회를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한 데서 비롯된 게 아닐까.
최근 어떤 목사가 말했듯이 “교회는 하나님이 독재하는 곳”이라는 논리로 운영되다 보니, 교회 안은 시간이 멈춘 전근대적 퇴행의 공간이 되어 버렸다. 전근대적 공간에서는 권위를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계급이 나뉜다. 소통과 대화는 필요 없다. 지시와 복종만 있을 뿐이다. 그런 이들에게 어떻게 ‘공평’과 ‘정의’의 가치를 기대할 수 있을까. 그래서 교회는 가장 심각한 계급 차별과 성차별이 이루어지는 곳이 되어 버렸다.
4. 정의는 신앙의 본질과 상관없다는 생각
많은 목사와 교인이 정의의 문제를 ‘정치 이슈’일 뿐 ‘신앙의 본질’과 상관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정의’는 비단 정치적인 문제뿐 아니라 신앙의 본질과 깊은 관련이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우리 죄를 대신해 죽으셔서 우리를 ‘의롭다’ 해 주시기 위함이었다. 결국 ‘정의’ 문제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된다.
우리가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예수께서 값비싼 대가를 치렀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의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자격을 주셨기 때문이다. 결국 십자가 대속의 은혜는 불의와 악에 사로잡혀 있던 우리가 ‘정의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다. 십자가 은혜는 ‘정의의 열매’로 우리 각자의 삶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많은 기독교인이 ‘예수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와 가치를 퇴색시키며 정의롭지 못한 삶을 살고 있다. 불의와 악에 동조하며 살아가고, 예수의 십자가를 값싼 용서, 값싼 은혜로 전락시키고 있다.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말하면서도 불의와 악에 동참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정의를 무시하고 악행을 저지르면서 자신은 용서받았다고 주장하고 산다. 진정한 회개도 없이 말이다.
주님의 능력은 정의를 사랑하심에 있습니다. 주님께서 공평의 기초를 놓으시고, 야곱에게 공의와 정의를 행하셨습니다.
- 시편 99장 4절(새번역)
‘정의’ 문제가 신앙의 본질과 상관이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이웃에 대한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우리가 돌아보고 사랑해야 할 많은 이웃이 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처럼 강도 만난 자들의 이웃이 되어야 할 때도 있고, 고통받고 억울한 일을 당한 이들의 이웃이 되어야 할 때도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의 아픔과 억울함을 헤아리며 정의 구현을 위해 여러모로 힘쓰고 도와줘야 한다. 억울한 이들의 아픔을 달래는 길은 ‘진실’이 밝혀지고, 악의 실체가 드러나며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하는 ‘정의’가 세워지는 것밖에 없으니까.
그러나 세월호 사건 이후 드러난 한국 개신교인의 모습은 그렇지 못했다. 그렇지 못한 모습이 많았다. 우선 아픔을 당한 이가 어떤 일을 당했는지 정확하게 알려고 하지 않았고, 그들의 아픔조차 헤아리려 하지 않았다. 심지어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하나님께 묻고 싶다는 유족에게 부모가 기도하지 않아서 아이가 죽었다는 망언조차 서슴없이 내뱉는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세월호 유족들은 그들이 믿고 의지했던 교회로부터, 교우들로부터 국가를 흔드는 불순 세력, 아니면 사고 난 것을 가지고 한몫 챙기려는 몹쓸 인간으로 매도되며 외면당했다. 교회와 교우들은 그들을 돌보지 않았으며 그들의 마음 한 톨도 이해하지 못했다. 교회는 유족들이 원하는 사건의 진실과 정의가 세워지는 일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저는 교회가 정말 정의로운 모습인 줄만 알았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아파서 힘들어하니까 분명 교회는 우리 손을 잡아 주고 이끌어 줄 거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모습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가 본 교회의 모습은 ‘못 걷는 사람’이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나와서 세월호를 외치는데 교회는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참 원망스러웠습니다.
- 세월호 희생자 단원고 2학년 문지성 양 어머니 안명미 씨
세월호 사건과 이어진 탄핵 정국에서 한국 보수 개신교는 교회가 얼마나 ‘정의’에 둔감하고 무지하며 왜곡된 가치에 병들어 있는지 명백하게 보여 줬다. 정의가 신앙의 본질과 상관없다고 생각하면서 도리어 악인의 편을 들고, 사리 분별 못 하는 무지로 피해자들 가슴에 피멍이 들게 하는 폭력과 망언을 서슴지 않았다.
교회는 진실이 있고 정의로운 곳이어야 한다는 기대가 그렇게 무리한 요구일까. 안타깝게도 한국교회는 정의로운 곳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권력에 아부하고, 다수를 위해 소수의 목소리를 무시하며, 스스로 판단하고 분별할 줄 모르는 반지성주의에 젖어 신앙의 본질에서 ‘정의’의 가치를 떼어 버렸다.
힘과 권력에 아부하고, 약자에 대한 배려와 보호가 없으며, 반지성주의로 똘똘 뭉쳐, 올바르지 않은 맹신에 빠진 집단을 우리는 뭐라고 부르는가. 사교 집단, 사이비 집단이라고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국 개신교가 그들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개신교가 정의를 외면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정의가 부흥과 번영에 ‘이익’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정의는 거저 얻을 수 있는 가치가 아니다. 대개 정의롭게 살려고 하면, 상당한 저항과 불이익을 당하게 마련이다. 세상은 ‘정의’의 논리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힘과 이익’의 논리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정의롭게 살려는 순간, 이 세상은 고되고 힘들어진다. 지켜야 할 힘과 권력과 이익이 클수록 ‘정의롭게 살기’는 더욱 힘들어진다. 어쩌면 한국교회가 부흥과 번영의 길을 걸어간 순간부터 ‘정의’는 양립할 수 없는 가치였는지 모른다. 많은 목사와 교인은 ‘정의’의 가치를 양보하고 희생해서라도 부흥만 하면 된다고 합리화한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보라, 이렇게 많은 교인과 화려한 성전을! 이것이 왜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란 말인가?
꼭 그렇게 말했던 2,000년 전 예수의 제자들이 있었다.
예수께서 성전을 떠나가실 때에, 제자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보십시오! 얼마나 굉장한 돌입니까! 얼마나 굉장한 건물들입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 큰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
- 마가복음 13장 1-2절(새번역)
나는 이 말씀이 정의를 외면하면서 번창한 한국 개신교를 향한 예수님의 심판의 목소리로 들린다. 이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힘이 아니라 진리를 위해 정의를 수호하고, 억울한 자들의 아픔과 고통을 위로하기 위해 싸울 줄 아는 그런 교회와 기독교인이 많아지길 바란다.
‘정의’를 위해 싸우는 것은 피곤하고 고된 여정이겠지만, 그 길이야말로 예수께서 우리에게 걸어가라고 하신 좁고 고생스런 참된 제자의 길일 것이다. 그리고 정의를 외면하지 않는 것은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지금 한국교회에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신앙의 미덕이다.
원문: 뉴스앤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