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3일은 ‘제주 4·3사건 추념일’입니다. 제가 2010년 제주로 이주하면서 가장 먼저 찾았던 자료가 ‘제주 4·3사건’에 관한 자료였습니다. 매년 제주 4·3사건 관련 글을 씁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관심은 그리 높지 않습니다. 제주 4·3사건을 말할 때마다 극우단체나 보수학자들은 제주 4·3사건이 남로당 중앙당이 지령을 내려 벌어졌다고 주장합니다. 또한 북한이나 소련의 지시를 받았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제주 4·3사건은 이승만의 반공청년단과 경찰이 벌인 폭정과 범죄로 시작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극우단체나 뉴라이트 교과서 등은 남로당 중앙당의 지시로 치밀하게 준비된 무장 폭동 사건이라며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까지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제주 4·3사건의 남로당 중앙 지령설’이 얼마나 허구인지 하나씩 반박해보겠습니다.
박갑동, ‘남로당 중앙당 지령설은 정보기관이 쓴 것이다’
제주 4·3사건이 남로당 중앙당 지령으로 벌어졌다는 근거는 1973년 박갑동이 중앙일보에 연재한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시작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남로당 지하총책을 지냈다는 박갑동은 중앙일보에 제주 4·3사건을 언급했고, 이후 1983년 ‘박헌영’이라는 책자로 나왔습니다.
(…) 그러던 중 중앙당의 폭동지령이 떨어졌다. 아마도 그 지령은 3월 중순쯤에 현지의 무장행동대 김달삼에게 시달된 것으로 안다.
(…) 당시 중앙당에서는 이 사건이 터질 무렵 당 군사부 책임자 이중업과 군내의 프락치 책임자 이재복 등을 현지에 파견하여 소위 현지 집중지도로써 군사활동의 확대를 기도했다. 또 폭동의 두목 김달삼의 장인이며 중앙선전부장 강문석을 정책 및 조직지도 책임자로 선정하여 현지로 보냈었다.
- 박갑동, 『박헌영』, 인간사, 1983, 198-199쪽
박갑동이 중앙일보에 연재하고 펴낸 책에 나온 ‘제주 4·3사건 관련 글을 뒷받침해주는 증거는 없습니다. 오로지 박갑동의 주장에 불과합니다. 제주 제민일보의 ‘4·3 취재반’은 일본에 있는 박갑동에게 사실관계를 확인해봤습니다. 당시 박갑동은 제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중앙지령설은 내 글이 아니고, 1973년 신문 연재할 때 정보기관에서 고쳐서 쓴 것”이라는 충격적인 답변을 내놓았습니다.
박갑동은 “4·3이 5.10선거 반대투쟁이라지만 왜 유별나게 제주에서만 그랬겠는가? 4·3은 서청과 경찰이 횡포를 부려 발생한 사건이다. 본격적인 무장투쟁이 아니며 경찰과 서청에 대항하기 위해 제주도 안에서 자체적으로 일어난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극우단체와 뉴라이트가 주장했던 ‘남로당 중앙당 지령설 최초 유포자’의 글 자체가 거짓인 동시에 정보기관의 날조였습니다.
‘남로당 중앙당 지시가 없었다’며 거절당한 제주도당의 협조 요구
제주 4·3사건이 남로당 중앙당 지령이라는 근거로 내세우는 것이 ‘신촌회의’입니다. 1948년 남로당 조천지부에서 열렸던 회의를 급습한 경찰이 노획한 문건에서 ‘2월 중순부터 3월 5일 사이에 제주도에서 폭동을 일으킬 것을 요구하고, 경찰 간부와 고위 공무원들을 암살하고 경찰 무기를 탈취하라는 지침이 발표됐다’는 것입니다.
무장봉기가 결정된 것은 1948년 2월 그믐에서 3월 초 즈음의 일이다. 신촌에서 회의가 열렸는데, 도당 책임자와 각 면당의 책임자 등 19명이 신촌의 한 민가에 모였다. 참석자는 조몽구, 이종우, 강대석, 김달삼, 나(이삼룡), 김두봉, 고칠종, 김양근 등 19명이다. 이덕구는 없었다. 이 자리에서 김달삼이 봉기 문제를 제기했다. 김달삼이 앞장선 것은 그의 성격이 급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강경파와 신중파가 갈렸다. 신중파로는 조몽구와 성산포 사람 등 7명인데, 그들은 “우린 가진 것도 없는데, 더 지켜보자”고 했다. 강경파는 나와 이종우, 김달삼 등 12명이다. 당시 중앙당의 지령은 없었고, 제주도 자체에서 결정한 것이다.
- 이삼룡 증언
신촌회의에 참석했던 이삼룡의 증언에 따르면 무장투쟁은 강경파와 신중파의 논쟁 속에 12대 7로 결정됐습니다. 북한이나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이 아닌 제주도 자체에서 결정된 셈입니다.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를 보면 4·3사건 직전에 남로당 제주도당은 중앙당 직속 프락치였던 문상길 소위를 만납니다. 문 소위를 만나 ‘무장 투쟁이 앞으로 있을 것이니 경비대도 호응 궐기해야 한다’고 권유하지만 문 소위는 ‘중앙 지시가 없으니 할 수 없다’라며 거절을 합니다.
제주 4·3사건의 무장투쟁은 북한이나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이 아닌 남로당 제주도당이 자체적으로 다수결에 의해 결정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백선엽, ‘당 말단에서 빚어진 자의적인 행동이었다’
제주 4·3사건의 남로당 중앙지령설은 국군 장성들의 회고록 등에서도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된 바 있습니다. 김정곤(소장 예편)은 『한국전쟁과 노동당전략』에서 육지와 떨어져 있는 제주도를 적화시켜 북상한다는 등의 이유 등을 내세워 ‘중앙지령설’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백선엽(대장 예편)은 ‘실록 지리산’에서 “여순반란사건은 결코 남로당 중앙의 지령에 의한 것이 아니다. 4·3과 마찬가지로 당 말단에서 빚어진 자의적인 행동이었다”고 밝혔습니다.
극우단체는 제주 4·3사건을 남로당 중앙당이 치밀하게 준비됐다는 근거로 유격대가 기관총, 대포로 중무장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유격대의 무기를 보면 일본군이 쓰던 99식 소총이나 권총이 일부 있었고, 나머지는 죽창이나 도끼 등 변변치 않은 무기 등에 불과했습니다.
남로당 대정면 책임자였던 이운방은 ‘4‧3사건의 진상’이라는 글에서 “4‧3 투쟁은 일부의 미숙하면서도 모험적인 분자들에 의하여 시기 아닌 시기에 하등의 세심 세밀한 준비도 없이 단지 몇 자루의 소총을 가지고 무장봉기로 저돌 맹진한 것이다”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제주 4·3사건의 시작은 경찰의 발포 때문이었다
제주 4·3 사건은 1948년에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시작은 1947년 3.1절 기념식에 있었던 경찰의 발포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경찰의 발포로 주민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중경상을 당하는 ‘3.1사건’이 발생합니다. 이에 항의하며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인 166개 기관과 단체에서 파업이 벌어집니다. 1947년 3월 10일에는 중문지서 응원경찰대가 수감자 석방을 요구하는 군중을 향해 총을 발포해 주민 8명이 부상을 당합니다.
1947년 3월 20일 조병옥 경무부장은 3·1사건 진상조사 담화에서 “제1구 경찰서에서 발포한 행위는 정당방위이며 도립병원 앞에서의 발포행위는 무사려한(사려가 깊지 못한) 행위로 인정한다”고 발표합니다. 이승만은 제주도를 ‘붉은 섬’으로 지목하며 극우 청년단체인 서청 등을 보내 ‘빨갱이 사냥’을 구실로 테러를 일삼았습니다. 부녀자를 강간하고, 민간인을 폭행 감금하거나 양민을 학살하기도 했습니다.
육지 경찰들은 취조하면서 파업 주동자와 배후를 대라고 무조건 때리는 등 심한 고문을 했습니다. 잡히면 고문으로 불구가 되거나 죽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지자, 직장을 이탈하거나 피신하는 도민들이 늘어나기도 했습니다.
제주 4·3사건이 벌어지게 된 배경에는 공권력의 무자비한 탄압과 극우단체의 무법적인 태도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극우단체는 ‘빨갱이’라는 말만 되풀이하며 제주 4·3사건을 매도하고 있습니다. 1947년 무렵 제주에서는 친일 경찰 출신이 고문하고 친일파 출신 청년단이 도민의 재산을 빼앗고 부녀자를 강간하고 일본군 출신이 ‘초토화 작전’을 벌여 민간인을 학살했습니다.
4·3사건은 남로당 중앙당의 지령을 받아 벌어진 사건이 아닙니다. 짐승보다 못한 인간들이 벌인 범죄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제주도민들의 분노가 그 시작이었습니다. 남편이 보는 앞에서 아내가 강간을 당하고, 자녀들이 몽둥이로 맞아 퇴학을 당하고, 그나마 남아 있던 식량을 뺏기는 상황에서 제주도민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산으로 도망을 가거나 죽창을 들다가 총에 맞는 일뿐이었습니다.
제주 4·3사건을 남로당 중앙당 지령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일은 친일파 출신 경찰과 군인들, 그리고 이승만의 어용단체였던 반공청년단들이 벌인 범죄를 숨기려는 ‘범죄 은닉’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원문: 아이엠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