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관련 자격증을 따거나 학교에서 컴퓨터를 교양으로 배우면 꼭 입력장치 항목에서 마우스와 같이 나오는 게 있다. 바로 트랙볼이다. 트랙볼은 본체를 움직이면서 쓰는 마우스와는 달리, 장치 본체는 한 자리에 둔 채 겉으로 드러나 있는 볼(ball)을 손가락으로 굴리면서 사용하는 입력 디바이스다.
하지만 세상 살면서 트랙볼을 본 적 있는가? 트랙볼을 누가 쓰긴 쓰는 건가? 여러분은 아마 대체로 트랙볼이란 것을 제대로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써봤다고? 심지어 집에 있다고? (…)
여튼 이제부터 트랙볼에 대해 알아보자.
구조
과거의 트랙볼의 구조는 볼 마우스를 뒤집어 놓은 것과 같았다. 그러고 보니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에는 볼 마우스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세월이 지나 볼 마우스가 광 마우스로 바뀌었듯 트랙볼도 광 방식으로 바뀌게 되는데, 광 기술이 모자랐던 당시 출시된 초기의 광 트랙볼은 위치 추적을 위한 검은 점이 박힌 볼을 사용하였다.
이 검은 점이 박힌 붉은 구슬은 일부 사람들에게 알 수 없는 혐오감을 줘 경멸을 담아 ‘독 딸기’라고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기술이 더욱 발달하자 공에 금속 입자를 뿌리고 코팅하는 방법을 사용하여 더 이상 혐오스러운 독 딸기는 보기 힘들게 되었다.
또한 광 방식으로 바뀌면서 더 이상 공을 지지해주며 동작을 읽을 롤러가 필요없어졌기 때문에 3개의 작은 구슬이 공을 지지하고 하나의 광 센서가 볼의 움직임을 읽게 되었다. 이 작은 구슬의 재료는 인공 루비. 세라믹이며 트랙볼을 사용하다 보면 주로 여기에 먼지가 낀다.
그럼 이 망할 트랙볼은 어디다 쓰는가
1. 노트북
믿기지 않겠지만 터치패드가 개발되기 전에는 거의 대부분의 노트북에 트랙볼이 탑재되어 있었다.
하지만 노트북이 점점 얇아지면서 상대적으로 볼도 작아질 수밖에 없었는데, 볼이 작아지니 정밀한 컨트롤이 힘들어! 그래서 터치패드 개발 이후 노트북 탑재형 트랙볼은 도태되었다.
2. 게임
트랙볼은 게임에서도 종종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Marble Madness라는 게임은 구슬을 컨트롤 하여 정해진 장소로 가는 내용으로, 이렇게 볼을 굴리는 게임이나 스포츠게임을 할 때는 트랙볼을 매우 직관적으로 쓸 수 있다.
그리고 양덕후의 괴혼.
3. 키오스크
트랙볼은 터치스크린이 제대로 정착하기 전 키오스크 단말기에도 자주 사용되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마우스를 자주 부쉈기 때문이다(-_-). 트랙볼은 기기에 매입할 수 있기 때문에 볼을 빼가거나 부수기가 힘들었다.
요즘 와서 게임용도로 쓰기에 트랙볼은 그렇게 좋은 선택은 아니다. 턴 제 게임같이 느긋한 게임이나, 기체를 조종하는 등의 게임은 사용하기 좋지만 FPS나 RTS, AOS같이 재빠르고 정확한 클릭을 요구하는 게임에는 적절하지 않다. 그 이유는 후술한다.
그럼 이걸 왜 쓰는가?
가장 큰 장점으로는 역시 팔의 통증이 급감한다는 것이다. 마우스를 자주 쓰다 보면 주요 구동 축인 손목, 팔꿈치, 어깨에 무리가 가게 되는데, 트랙볼의 경우 손목만 쓰면 되기 때문에 장시간 사용에 따른 부담감이 크게 없다. 그래서 자기가 하는 일이 장시간 컴퓨터 마우스질이라면 손목이나 어깨에 탈나기 전에 일찌감치 트랙볼을 사용하는 것이 낫다. 버티컬 마우스와는 다르다! 버티컬 마우스는 손목 통증은 막더라도 팔꿈치나 어깨통증을 줄여주지 못하고, 클릭을 강하게 하면 힘이 수평으로 가해지는 만큼 마우스가 밀린다는 단점이 있다.
트랙볼의 또다른 장점으로는 장치 자체를 움직일 필요가 없다는 점이 있다. 따라서 책상 위에 공간이 협소해도 손 하나 올라갈 공간이 있다면 사용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
만일 본인 책상이 매우 좁거나, 지저분하거나, 침대나 소파에 누워서 컴퓨터를 만지일이 잦다면 트랙볼은 좋은 선택이 될 것이다.
마우스의 경우 기기 자체를 움직이기 때문에 마우스가 놓여있는 곳이 불안정하거나 사용자의 상황이 좋지 못한 경우 움직임이 튀어버릴 위험이 큰 편이다. 하지만 트랙볼은 손가락 끝만 사용하기 때문에 불안정한 상황에서 비교적 높은 정확도를 낼 수 있다. 따라서 잠수함, 선박, 관제탑, 방공호 등지에서는 트랙볼의 사용이 압도적이지만 일반사용자는 이런 장점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움직임에 관성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 된다. 화면이 넓을 경우 마우스의 경우 손의 움직임을 매우 크게 하거나 감도를 올려야 하지만, 트랙볼의 경우 그냥 휙 굴리면 볼도 따라서 휘리릭 돌아가, 한 번의 손가락 스냅으로 화면을 종단 횡단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트랙볼은 “구슬을 굴린다”라는 점이 있다. 무슨 흰소리냐고 하겠지만 구슬을 이리저리 움직인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괜찮은 손 장난이기 때문에 트랙볼을 사용하면 아마 커서를 쓸 일이 없어도 볼을 이리저리 굴리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니까 호두 두 알 움켜쥔 할아버지처럼… 나만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해 줘
그럼 이걸 왜 안 쓰는가?
가장 큰 단점은 역시 적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마우스야 ‘이걸 움직이면 커서가 따라서 움직인다’라는 직관적인 컨트롤이 가능한데다 오래전부터 널리 사용해 왔던 기기인 반면, 공에 손가락으로 운동에너지를 가해야 하는 트랙볼은 처음 잡았을 때 아무래도 적응에 시간이 걸리게 된다.
일단 적응하고 나면 여생이 편한데 그 ‘일단’이 잘 안된다. 중고장터에 올라와있는 매물을 보면 대부분 이 단계에서 포기하고 내놓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트랙볼을 쓰면서 가장 적응에 애로사항이 꽃피는 게 바로 드래그. 클릭을 한 상태에서 볼을 움직여야 하는데 이게 묘하게 다중 작업을 요구하는지라 삑사리 나기 쉽다.
또한 의외로 트랙볼에는 물리적인 단점이 있는데, 바로 볼을 처음 움직일 때와 한번 움직이고 난 후의 마찰이 다르다는 것이다. 손가락 끝의 작은 힘으로 볼을 굴려야 하는 트랙볼의 특성상 이러한 마찰의 차이는 작고 정밀하게 자주 움직이려 할 때 정확성에 문제가 될 수 있다. 다만 인공 루비를 지지대로 사용하는 트랙볼들은 비교적 이런 문제에서 자유로우며 베어링을 사용하는 트랙볼은 이러한 문제가 아예 없다.
마지막으로 손때가 끼기 쉽기 때문에 못해도 일주일에 한번은 볼과 지지대를 청소해 줘야 한다. 손에 기름이 별로 없고 자주 청소하는 경우 볼이 뻑뻑할 수 있는데, 일본의 팬 사이트들은 코의 기름(-_-) 을 바르기를 권한다. 인체에 무해하고 비누로 씻을 수 있으며 윤활성능도 좋다나…
트랙볼에는 어떤 종류가 있는가
1. 엄지형
말 그대로 트랙볼을 엄지손가락으로 컨트롤 하는 구조이다. 이 구조는 엄지손가락이 다른 손가락과 전혀 별개로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인체 구조적으로 방해되지 않는 자유로운 컨트롤을 할 수 있고, 손목이 꺾이거나 지지가 불안정해도 쉽게 사용할 수 있다. 또 버튼의 배치가 일반 마우스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에 적응이 쉽다.
다만 단점도 큰데, 엄지손가락 구조상 좌우 움직임은 편해도 상하 움직임은 편하지 않으며 정밀도가 다른 손가락에 비해 크게 떨어진다. 또 엄지만으로 굴려야 하는 볼 특성상 볼이 크지 않기 때문에 정밀한 컨트롤은 무리. 또한 오른손 기준으로 제품이 나오기 때문에 보통 좌우 대칭이 많은 트랙볼에서 유일하게 왼손잡이용으로 쓸 수 없다.
2. 검지와 중지 형
대부분의 트랙볼이 이 구조를 선택하고 있으며 볼이 큼직하고 검지와 중지, 혹은 손바닥을 이용하기 때문에 컨트롤을 정밀하게 할 수 있다. 다만 클릭을 엄지와 약지, 새끼 등을 사용해야 하므로 초기 적응 기간이 길다는 단점이 있다. 또한 볼이 크고 접촉면이 크기 때문에 때도 상대적으로 많이 끼게 된다.
3. 핸디 형
말 그대로 포터블용으로 손가락에 끼거나, 프레젠테이션용으로 작게 나오는 제품들로 일반적으로 쓰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구하기도 힘든데 이런 거 사지 말고 그냥 프레젠테이션용 리모컨을 사용하자.
4. 발 형(?)
일부 트랙볼은 발로 컨트롤이 가능하다. 이 경우 두 손이 자유로우며 키보드에서 손을 전혀 뗄 필요가 없다는 장점이 있다. 손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에게 적합하다.
추천제품들
사실상 일반 사용자용 트랙볼 시장이 전멸했기 때문에 제품이 많지 않고, 또 오랫동안 신제품이 나오지 않은 만큼 선택의 폭이 넓지 않다.
1. 로지텍 TrackMan Marble Mouse
볼에 점이 박혀있는 “독 딸기” 공을 가지고 있는 꽤 오래된 모델. 왼손잡이도 사용 가능하고 써본 사람들은 꽤 호평하지만 휠이 존재하지 않고 스크롤 모드로 바꿔 볼을 굴려 스크롤 해야 하는 단점이 있기 때문에 호불호가 갈린다.
2. 로지텍 무선 트랙볼 M570
가장 큰 장점이 무선이기 때문에 막 굴려먹기 좋다는데 있다. 특히 노트북에서 사용하기 좋으며 침대나 소파에서 굴러다니면서 리모컨 비슷하게 쓰기 좋다. 마우스와 버튼배치가 똑같기 때문에 적응이 쉽다는 점도 좋다.
단점은 엄지를 사용하기 때문에 정확도가 좀 떨어진 다는 것, 그리고 마우스와 비슷하게 생겨서 익숙하기 않으면 자꾸 움직이려고 한다는 점, 마지막으로 무게가 무겁지 않기 때문에 자주 들린다는 단점이 있다. 중고장터에서 새것을 3만원 정도에 쉽게 구할 수 있다.
배터리 성능이 엽기적인데 AA건전지 하나로 1년을 쓸 수 있다. (레알)
3. 켄싱턴 슬림블레이드 SlimBlade Trackball Mouse
국내에서 정식으로 구매할 수 있는 트랙볼 최고가로 거의 당구공만한 볼 사이즈를 가지고 있다. 전문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정확도를 가졌고 볼을 그냥 들면 쑥 빠지기 때문에 청소하기도 편하다.
볼을 수평으로 돌려서 스크롤 기능을 할 수 있는데, 따라서 스크롤 돌릴 때 커서가 조금씩 움직인다는 단점이 있다. 이 때 따다닥 걸리는 소리가 나는데 어디 걸리는 게 아니라 실은 내장 스피커에서 나는 소리다. 전원이 꺼지면 소리도 안 난다.
4. 켄싱턴 트랙볼 Expert Mouse
슬림블레이드와 비슷한 볼 사이즈를 가지고 있고 스크롤 휠이 존재해서 이걸 돌리면 편하게 스크롤질이 가능하다. 단점이라면 클릭이 무겁고 높이가 높아서 손목받침대가 반드시 필요한데, 제공되는 손목받침대는 자주 뺐다 끼웠다 하면 고정 쇠가 부러지기 쉽다. 슬림블레이드가 싫다면 고민해 볼만 하다.
5. 켄싱턴 Orbit Trackball Mouse
위의 제품의 하위호환으로 볼이 비교적 작다. 역시 손목받침대가 부러질 수 있다는 단점이 존재. 싼값으로 입문용으로 쓸만하다.
마치며
사실 트랙볼 마우스가 일반 마우스에 비해 상대적으로 고가이고, 적응에 실패할 수 있다는 점에서 손쉽게 추천하기는 어려운 제품이다. 거기다가 써보고 사기도 환경이 좋지 않으니 잘못 샀다가 돈 버리기 딱 좋다.
고로 선물 받거나, 사은품으로 받거나, 주변에서 누가 쓰고 있어서 직접 써볼 수 있거나, 팔에 통증이 너무 심해 곧 죽어도 안 아픈 거로 가겠다 하거나, 집에 돈이 많거나 하면 과감히 지르고, 그게 아니라면 그냥 이런 게 있구나 하고 넘어가자.
제발 내가 권해서 샀다고 나에게 가열찬 비난을 날리지 말아주세요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