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의 사자후가 광주여대 체육관을 쩌렁쩌렁 울렸다. 논리와 품격을 갖춘 안희정의 연설은 2002년 노무현의 재래였다. 지지자들의 장외대결도 치열했다.
주황색 티셔츠에 확성기로 무장한 ‘오렌지군단’ 손가락혁명군은 연신 ‘이재명’을 연호했다. 노란색 모자와 시대교체 스카프를 한 안희정 캠프의 ‘희정크루’는 15년 전 노사모 청년들이 역사책 속에서 걸어 나온 듯했다.
하지만 모두 허사였다. 이미 선거 결과는 나와 있었다. ARS로 진행된 사전투표로 선거인단 20만 명이 투표를 마친 뒤 치러진 경선이었다. 경선장에 나타난 유권자는 겨우 1,900여 명.
평일 오후에 경선장을 찾을 수 있었던 건 조직된 대의원들뿐이었다. 그들의 선택은 75%가 대세론의 주인공인 문재인 후보였다. 그러나 이 경선의 진정한 승자는 따로 있었다.
바로 ARS를 담당한 여론조사 업체다. 더불어민주당의 경선이 사실상의 본선이란 인식이 퍼지며 선거인단 모집은 ‘흥행 대박’을 터뜨렸다. 200만 명이 넘는 신청자를 받기 위해 400명 규모의 콜센터가 한 달간 운영됐다.
수십억 원의 비용이 들어갔다. 그 돈은 물론 여론조사를 전문으로 하는 ‘업자’들에게 돌아갔다. 그 돈은 누가 냈을까? 절반 이상은 국민의 세금이다.
정당은 선거가 있는 해에는 평소보다 2배의 국고보조금을 지원받는다. 그 돈이 그대로 ARS 업체들에 돌아갔다. 나머지는? 후보들의 갹출이다.
민주당 대선후보로 출마한 4 후보는 각각 4억 원씩 16억 원을 부담했다. 비정규직으로 월세를 아껴가며 한 푼 두 푼 모은 지지자들의 소중한 성금이 여론조사 비용으로 충당됐다.
그에 비해 국민의당이 실시한 국민경선은 오로지 현장투표만을 허용했다. 수십억 원의 여론조사 비용을 줄일 수 있었다. 그런데도 현장에 수만 명의 평범한 유권자들이 몰려 또 다른 ‘흥행대박’을 연출했다.
결과는 안철수의 압승. 현장투표는 조직 동원력이 강한 손학규에게 유리할 거란 정치권의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가성비’라는 게 있다. ‘가격 대비 성능’이란 뜻이다. 수십억 원의 ARS 비용을 들이고도 김빠진 경선이 돼버린 민주당과 큰돈 들이지 않고 흥행 대박을 이룬 국민의당 중 어느 쪽이 진정한 새 정치일까?
또한, 민주당 경선에서 연설이 변수가 되지 못했다는 점도 문제다. 일반적으로 부동층 유권자들은 경선 현장에서 후보의 연설을 듣고 30%는 마음이 바뀐다고 한다.
2002년 노무현의 승리는 “아내를 버리란 말입니까?”로 대변되는 명연설의 드라마가 만들어낸 기적이었다. 하지만 지금 민주당 경선에선 노무현이 아니라 오바마가 와도 역전은 불가능하다.
더욱 두려운 것은 내년 지방선거다. 전국 3000여 명의 일꾼을 뽑기 위해 각 당에선 수천 개의 경선이 벌어질 것이다.
경로 의존성에 따라 내년 경선에도 여론조사와 ARS가 판을 칠 가능성이 크다. 여론조사 업체들에겐 그야말로 큰 장이 서는 것이다. ‘한국의 오바마’를 꿈꾸는 청년 정치인들은 시작부터 수천만 원의 경선비용에 좌절해야 할지 모른다.
대통령선거를 제외한 국회의원과 시의원, 구의원 등의 공천권은 평소 당비를 내온 당원들에게 돌려주는 게 맞다. 그래야 당의 재정도 충실해지고, 풀뿌리 당원조직도 강화된다.
대부분의 국민이 이름도 모르는 구의원, 시의원 후보들을 놓고 여론조사를 하는 건 넌센스다. 당원 경선은 조직선거 아니냐고? 돈으로 매수한 것만 아니라면 평소 당원들을 살뜰히 챙겨온 지역 정치인이 후보가 되는 게 뭐가 나쁜가?
연예인이나 교수 등 유명세를 가진 돈 많은 후보들이 여론조사의 낙하산으로 내려오는 것보다 백배 낫다.
한국 정치에서 ARS 경선 퇴출운동이라도 벌여야 할 판이다. 광주에서만 10만 명의 무효표를 양산한 ARS 경선은 민주적이지도 효율적이지도 않다. 소수의 이익집단을 위한 금권정치의 요람이다.
새 정치를 꿈꿨지만, 금권정치에 발목이 잡혔던 노무현의 비극을 되풀이해선 안 된다. 지금이라도 평당원 권리찾기운동이 절실하다.
원문 : 윤범기 기자의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