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 이 글은 <기획회의>에 보낸 원고를 재게재한 글입니다.
만화는 ‘원소스멀티유즈’ 원작 산업으로 각광을 받는다. 편견과 달리, 어린이들의 손쉬운 오락 거리를 넘어 진지한 예술적 가치를 지니기에 인정받고 있는 추세다. 한국의 만화산업은 많은 재능 있는 창작자들이 넘치고, 시장 규모도 OOOO억원으로 세계 *위에 해당될 정도로 크다. 이제 만화에 주목할 때다.
이런 이야기를 최소한, 쥬라기 공원과 현대차의 수익비교 통설로 대표되던 90년대 초반의 문화산업 붐 이래로 주기적으로 듣고 또 들어왔다. 계속 반복되다보니 산업으로서든 문화로서든 만화가 그간 이미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계속 초기화 당하는 느낌이 들 정도다.
물론 그런 이야기 처음 들었다는 듯 신기해하는 사람들이 매번 적잖이 있는 만큼 앞으로도 종종 다시 언급하며 만화라는 분야에 대한 홍보작업을 해야겠지만, 웬만하면 그 정도 이야기는 이제는 제발 그냥 전제로 두고 좀 더 구체적인 쪽으로 관심을 돌리는 것이 나을 듯하다. 만화는 원작산업으로 각광을 받는 것 맞고, 여타 양식과 다를 바 없이 예술적 가치가 있기도 하고 그냥 오락성에만 집중하기도 하며, 성인 취향으로도 충분히 좋은 읽을 거리가 많다.
자, 이제 제발 그 다음 이야기를 할 차례다. 바로 오늘날, 인기를 모으는 한국만화의 트렌드는 무엇인가. 어떤 요인들이 지금의 한국만화 창작/유통/향유 환경에 가장 해결이 필요한 장애물인가. 어떤 전망이 필요한가. 몇몇 내부 업계 종사자들의 좁은 네트워크가 아니라, 좀 더 큰 논의의 장에서 다양한 이슈 지점들을 공개적으로 거론하며 함께 발전시킬 내용들이다.
더이상 만화는 오타쿠의 것이 아니다
한 시기에 어떤 만화 작품들이 인기를 끄는 것에는 늘 일정한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다만 그런 것이 사전 예측을 하기에는 어렵고 주로 사후분석 차원에서 이뤄지게 되며, 진단이 끝나는 순간 다들 비슷한 공식에 달려들어 애매한 품질의 작품들이 범람한다는 점이 한계지만 말이다.
대단한 비법처럼 포문을 열었지만, 사실은 아주 간단하다 – 바로 내용 측면에서 당대의 넓은 독자층에게 공감대를 끌어내고, 매체 측면에서 그런 독자층이 아직 잠재적 독자일 때부터 이미 손쉽게 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넓은 독자층을 공감시키는 내용만 있고 매체가 없으면 기회 없이 그냥 처음부터 잊혀지고, 매체는 갖추었는데 공감대의 내용이 좁으면 공개적으로 버림받는다.
이런 당연한 이야기가, 오늘날 한국만화 상황을 보기 위한 유용한 열쇠다. 한쪽에서는 만화를 즐긴다고 하면 오타쿠나 매니아라는 말로 특수한 열성적 팬 취급을 하곤 하지만, 한국만화에서 확실하게 히트쳤다고 누구나 쉽게 인정할만한 ‘인기작’은 그런 오타쿠-매니아 취향의 작품에서 나오지 않는다.
오타쿠 팬층의 취향에 맞춘 작품도 종종 대중적 인기작으로 취급받는 일본 만화시장과 달리, 한국은 그쪽 성향의 소비자들의 숫자나 그들이 발휘하는 소비력이 상대적으로 미미하다. 특히 열성적 팬이라고 해서 같은 책을 열 권 사두거나 열 배 비싼 특별한정판을 기꺼이 소장하고자 하는 식의 문화가 한국 만화에는 없다시피 하기 때문에, 활발한 창작-소비 시장을 유지하는 것만도 녹록치 않다.
단적으로 예를 들어, 90년대말까지 나름대로의 전성기를 맞이했던 소년만화 전문잡지를 통한 연재물은 00년대 후반을 넘어서면서 출판의 양적 측면으로나 흥미로운 창작을 소화해내는 활력으로나 완연히 쇠퇴했다. 출판시장 전반의 침체와 함께 축소된 측면도 당연히 크지만, 그 과정에 대처하며 점점 학원 코미디와 애매한 수준의 양산형 세계관으로 이뤄진 격투 판타지물 위주로 획일화해가며 오타쿠-매니아 취향에 과몰입한 내용적 측면도 작용했다. 결과적으로 그쪽 취향 계열에서는, 만화의 세부 분야에서의 인기작은 나올 수 있어도 사회적 인기작인데 그것이 만화라는 식의 성공사례는 갈수록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설상가상으로, 라이트노벨 형식들이 자리를 잡으면서 만화보다 그쪽으로 수요도 공급도 옮겨가고 있다.
웹툰을 통한 인기만화의 변화
매체 측면에서 대중성이 필요하다는 것은 더욱 뼈저린 부분이다. 인기작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 만화가 실리는 매체를 섭렵하는 이상적 경우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것이, 애초에 사람들이 작품을 널리 봐야 인기작이 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개봉관 숫자, 방송에서는 지상파 편성, 대중음악에서는 메이저 기획사 같은 것과 비슷한 문제다.
예를 들어 한국사회의 권력구조를 은유한 스릴러 [이끼](윤태호)는 원래 ‘만끽’이라는 회원 가입형 만화 전문 유료 웹진에서 연재를 하고 있었는데, 매체가 따로 가입과 결제를 해야 하는 불편과 비용을 감수하고 읽을 만한 웹진으로 인정받아 충분한 독자들을 끌어들이는 것에 실패했다. [이끼]는 연재를 하며 종이 단행본 1권까지 나왔으나, 아는 사람만 아는 연재중단된 컬트작으로 남았다.
그러나 한참 후, 인지도 제로에 가까웠던 [이끼]는 방문자 숫자로 업계 2위인 포털사이트 미디어다음의 웹툰 섹션에서 다시 연재를 시작했고, 이번에는 만화로서의 인기나 영화화 같은 원작 확산 등을 포괄한 대형 히트작이 되었다. 그런데 [이끼]로 인기몰이를 하던 그 시기에도, 인지도가 상대적으로 미미했던 종이 만화잡지 ‘팝툰’에 같은 작가가 연재한 또다른 스릴러 [당신은 거기 있었다]는 인지도가 매우 낮다.
최근 수년간, 포털사이트에 연재되는 온라인 열람용으로 제작된 스크롤 형식 만화(속칭 웹툰) 분야에서 인기작들이 나오고 있는 것은, 앞선 두 요소들의 교차점이 이곳에서 발생한 덕분이다. 원래부터 만화를 온라인 공간에 정착시키고자 했던 초기의 여러 시도들 가운데 실패에 가까웠던 사례들은 장르잡지에서 경력이 화려한 묵직한 중견 작가들이 기존 팬 기반을 노리고 신작을 내놓은 연합 웹진 같은 것이었다.
반면 성공 사례는 폭넓은 인터넷 사용자들과의 공감대를 최대한 강조한 가벼운 공감 개그나 감성적 메시지를 입혀 넣은 [파페포포 시리즈] 같은 ‘에세이툰’들이었다. 그리고 미디어다음에 연재된 강풀의 ‘순정만화’를 위시한 장편 웹 연재만화들이 큰 호응 속에 독자 흡입력(즉 트래픽)을 증명해내자, 여러 포털사이트들이 서둘러 판을 키워냈다.
그간 매니아화되었던 종이잡지나 종이만화의 스캔본을 서비스하던 속칭 ‘온라인만화방’들과 달리 포털의 웹툰 섹션은 기존 만화팬의 장르 취향에 얽매이지 않고, 인터넷 사용자들의 호응을 잣대로 움직였다. 즉 불황속에 제작이 움츠려들며 특정 장르코드로 매니아화되던 출판만화와 달리, 다양한 소재와 접근을 통해 다시 다양한 관심층을 끌어들이며 확장했던 것이다.
다만 매체의 보편성 문제는 이 안에서도 다시금 엇갈려서, 가장 사용자가 많은 양대 포털서비스가 확고한 인기작의 산실이며 여타 포털들은 작품 인지도 확장 측면에서 많은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다음 글에서는 대중적 인기를 끄는 만화에 대한 분석과 만화계가 나아갈 길에 대해 다루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