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주: 족벌주의를 뜻하는 단어 ‘nepotism’은 공사를 명확히 구분하고 실력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선진국에서는 후진적인 과거의 유물로 배척되는 특징입니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은 집권 후 자식들, 특히 둘째 이방카 트럼프는 대통령의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각종 공식 석상에 얼굴을 비치고 국정 전반에도 이례적으로 관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복스가 백악관 안에서 이방카 트럼프의 위치를 분석한 기사 ‘It’s official: Ivanka Trump will be a White House staffer’를 실었습니다.
이방카 트럼프가 백악관 막후 실세의 면모를 곧 세상에 과시할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의 딸 이방카는 백악관 웨스트윙에 자신의 집무실을 얻고, 정식 백악관 직원과 마찬가지로 보안 검사를 거친 직원으로 등록하고, 정부가 인증한 관용 전화를 쓰게 된다고 폴리티코가 보도했다. 이방카는 공직을 맡지는 않을 것이며 급여도 받지 않을 것으로 알려졌다. 백악관 측에 따르면 이방카의 업무는 ‘비공식적’인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비공식적이라는 설명만 빼고는 사실상 공식적인 임무를 맡은 것 같다.
전형적인 정실 인사이자 친인척 특혜로 기록에 남을 일이다. 이방카 트럼프의 이력 어디에서도 백악관에서 무언가 일을 맡을 만한 자질과 능력은 찾을 수 없다. 전통적인 의미에 따라 대통령에게 조언을 건넬 만한 자질과 능력으로 한정해 보더라도 여전히 이방카는 자격이 없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이방카에게 다른 누구도 갖추지 못한 두 가지 훌륭한 덕목이 있다며 딸을 옹호했다. 첫째는 그녀가 트럼프 가족의 일원이라는 점, 그리고 둘째로 이방카는 대통령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리라는 점이었다.
올해 35살인 이방카 트럼프는 학부에서 경영학을 전공했고, 자신의 이름을 딴 소규모 패션업체 사장으로 가장 유명하다. 아버지 도널드 트럼프와 함께 TV 예능 프로그램인 ‘견습생(The Apprentice)’에 출연했고, 회고록이자 취업지침서인 ‘트럼프 카드(The Trump Card)’라는 제목의 책을 썼다.
이방카는 트럼프 그룹(Trump Organization) 경영에서 뛰어난 수완을 발휘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방카는 그룹의 세계시장 전략을 총괄했고, 수도 워싱턴DC에 있는 옛 우체국 건물을 호텔로 개조해 문을 여는 일도 진두지휘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경력은 백악관에 들어가 하게 될 일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이방카는 이제 국가 안보에 관한 기밀 정보를 열람할 수 있게 됐다. 폴리티코는 이방카가 관여하게 될 정책이 대통령 선거기간 내내 말하고 다니던 대통령 가족에 관한 일에만 국한되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방카 트럼프의 변호사는 폴리티코와의 인터뷰에서 이방카가 백악관 안에서 아버지 트럼프 대통령의 ‘눈과 귀’가 되어줄 것이라고 말했다. 임기 첫 두 달 동안 잇단 내분과 누설로 홍역을 치른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이 사업을 하면서 몸소 익힌 진리처럼 ‘믿을 건 내 자식밖에 없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굳힌 게 틀림없어 보인다.
친족 등용은 명백한 불법, 하지만 해당 법안이 백악관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해석한 트럼프 행정부
이방카 트럼프에게 백악관 안에 집무실을 내주는 건 명백한 친족 등용이고 족벌주의다. 하지만 법무부는 백악관 고문을 임명하는 데는 미국의 친족 등용 금지법(anti-nepotism laws)이 적용되지 않는다며 이방카가 백악관에서 일하는 것이 불법은 아니라는 해석을 내렸다. 법무부는 앞서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한 날 이방카의 남편이자 트럼프 대통령의 맏사위인 제러드 쿠쉬너가 백악관에서 일해도 법적으로 문제 될 것이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법무부의 다니엘 코프스키 부차관보는 아래와 같이 밝혔다.
국정을 운영하는 과정에서 가족의 조언을 구하고자 하는 대통령이 취할 방법은 몇 가지가 있다. 우선 어떤 직위를 주지 않고 필요할 때마다 비공식적으로 조언을 구하는 방법이 있고, 백악관 정식 직원에 준하는 책임을 지우는 것도 방법이다. 아니면 백악관 직원 채용 규정에 따라 가족을 정식 직원으로 뽑고, 대신 정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공과 사가 흐려지지 않도록, 이해관계 충돌을 막는 제약을 엄격히 적용하면 된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은 어떤 식으로든 자신이 믿는 가족에게 조언을 구할 것이니, 가족이 공식 직함이 있는 자리를 맡아 직함에 따르는 윤리적 책임이라도 지우는 게 나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의회는 1960년대에 친족 등용 금지법을 통과시켰다. 이전에도 대통령의 가족, 친척이 공직을 맡는 게 문제가 된 적은 있었지만, 트럼프 대통령처럼 대통령의 딸이 문제가 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전에는 대통령의 형제나 아들이 논란의 중심에 섰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를 법무장관에 임명하고, 매제인 사전 슈라이버를 평화봉사단 총재에 앉혔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아들은 백악관에서 비서로 일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아들 제임스도 오늘날 수석 보좌관(chief of staff)이 하는 중요한 조율을 담당하는 대통령 비서로 일했다(트럼프 대통령을 감시하는 이들이 관심 가질 만한 이야기를 하나 소개하자면, 제임스 루즈벨트는 아버지가 대통령이라는 점을 이용해 부당한 사익을 추구했다는 혐의를 받았고,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세금 신고 내역을 공개했다).
1967년, 우체국 개혁법의 일부로 통과된 친족 등용 금지법은 자신이 감독하는 행정부처에 가족이나 친척을 채용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법률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이 법이 대통령과 백악관 직원을 임명하는 데 적용돼야 하는지를 두고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다만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으려고 사전에 세심하게 신경 쓴 대통령도 있다. 예를 들어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영부인이던 힐러리 클린턴에게 건강보험 개혁 과제를 부탁하면서 아내를 백악관 공직자로 임명하지 않고 건강보험 개혁 기획단을 이끌게만 했다.
폴리티코의 보도에 따르면 제러드 쿠쉬너와 이방카 트럼프 부부는 재산 내역을 공개하고 쿠쉬너가 백악관의 공직을 맡는 데 있어 문제의 소지가 될 만한 주식을 미리 처분했다. 하지만 이방카는 여전히 자신의 패션 업체를 소유하고 있고, 백악관의 정식 직원으로 일하지 않는 이상 이해관계 충돌 규정의 적용을 받지도 않는다. 법무부가 사위인 제러드 쿠쉬너는 비공식적으로 조언을 듣느니 공직에 임명하는 게 낫다고 판단했던 논리를 왜 딸인 이방카 트럼프에겐 똑같이 적용할 수 없는 건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방카의 백악관 입성, 트럼프 행정부의 극단적 색채 옅어질까?
지난 대선 기간 내내 이방카는 대체로 온건하고 때로는 진보적이기까지 한 이미지를 구축하려 애써 왔다. 아버지의 귀에 대고 무언가를 속삭일 때면 도널드 트럼프의 자제력 없는 성정을 걱정하던 사람들도 딸은 좀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방카의 이미지는 아버지가 아동 의료보험 확대와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을 지지한다고 발언한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거의 정점에 이르렀다. 지금껏 공화당 대통령 가운데 선거 기간 중에 이 두 가지 이슈를 언급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이미지는 이미지일 뿐 이방카의 영향력이 대단히 크지는 않았던 것 같다. 트럼프 행정부는 주요 정책 과제에 아동 의료보험 문제를 넣지 않았다. 하지만 트럼프가 기존의 극단적인 입장과 발언에서 한발 물러서는 징후로 여길 만한 것을 찾는 데 혈안이 된 사람들이나 정치평론가들에게 이방카 트럼프의 백악관 입성은 트럼프 대통령이 온건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로 마음먹었다고 해석하기 더없이 좋은 소재였다. 이방카의 남편 쿠쉬너는 물론이고 골드만삭스 경영진으로 일했던 뉴욕 출신 개리 콘과 디아 파웰은 트럼프 행정부 내 온건 성향 참모진으로 분류된다. 워싱턴포스트의 필립 러커와 로버트 코스타 기자는 이들과 경쟁 관계에 놓인 더 보수적인 성향의 참모들이 이들을 ‘민주당원’이라고 부른다고 전했다.
이방카 트럼프가 남편과 함께 트럼프 대통령의 ‘좌클릭’을 유도하는 매개체가 되리라는 주장은 지나친 확대 해석으로 보인다. 하지만 쿠쉬너와 이방카 트럼프를 비롯한 온건 성향 참모진은 자신들이 견제하고 저지하지 않았다면 트럼프 행정부가 내놓은 몇몇 정책들은 훨씬 더 극단적일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기자들에게 귀띔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방카 트럼프 부부는 기후변화 관련 대통령 행정명령 내용 가운데 파리 기후변화 협약에 대한 비판 수위를 낮추라고 제안해 이를 관철했다. 성 소수자 직원을 사용자가 훨씬 쉽게 차별할 수 있게 하는 내용의 또 다른 행정명령을 좌초시킨 것도 이들의 공이라는 보도도 있었다. 참담한 수준이라는 혹평을 받은 취임식 연설 뒤 상하원 합동연설에서는 덜 공격적인, 부드러운 톤으로 연설하라고 대통령을 설득한 것도 다름 아닌 이방카였다. 이방카는 저스틴 트루도 캐나다 총리와 이민자들을 환영하는 내용의 연극을 함께 관람하기도 했다.
트럼프 정권 인사들 가운데 쿠쉬너와 이방카 트럼프가 (상대적으로) 가장 진보적이고 교양을 갖춘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꽤 많아 보인다. 트럼프가 대통령에 취임한 뒤 그나마 트위터에 올리는 글의 수준이 좀 나아졌는데, 여기에도 이방카 부부가 모종의 역할을 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여전히 뜬금없는 내용의 저질 트윗을 남발하는 건 주로 금요일 밤과 토요일인데, 이때는 독실한 유대교도인 쿠쉬너와 남편을 따라 유대교도가 된 이방카 트럼프가 안식일을 지키느라 장인과 아버지를 제어할 수 없다는 추측 기사도 있다.
이방카가 유대교로 개종할 때 이를 관장한 랍비를 비롯해 다른 랍비들이 마침내 이러한 추측은 근거 없는 낭설이라고 반박하고 나섰다. 랍비들은 폴리티코와의 인터뷰에서 종교인의 의무에 따라 안식일을 지키는 중에라도 쿠쉬너와 그의 부인이 대통령의 트윗에 관해 이야기해선 안 된다는 규정은 없다고 말했다.
이방카 트럼프와 제러드 쿠쉬너는 가끔 자신들의 의견을 관철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만약 부부의 목표가 트럼프 행정부 전체를 개조해 기후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성 소수자의 인권 보호에 앞장서도록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라면, 부부는 철저히 실패했다고 봐야 한다.
트럼프 행정부는 기후변화 대책을 세우고 이를 집행하는 데 드는 정부 예산을 전액 삭감하려 하고 있다. 제도권 교육을 받는 학교에서 성전환 학생에 대한 보호 규정을 철폐했다. 이방카 트럼프와 제러드 쿠쉬너가 이를 진정 도덕적으로 있을 수 없는 결정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들은 거기서 사임했을 것이다.
사임을 불사하며 저항하는 대신 이들 부부는 트럼프 정권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쪽을 택했다. 트럼프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이방카 부부가 무언가 바꿔주리라는 실낱같은 헛된 희망을 심어주는 사이, 트럼프 정권이 발의한 정책들은 별다른 반대 없이 순조롭게 시행됐다.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신념의 문제가 아니라, 단지 트럼프가 가족밖에 믿지 못할 뿐
백악관에서 일하게 된 이방카 트럼프를 두고 트럼프 대통령이 행정부 내에 온건한 성향의 참모진을 들이려는 것으로 해석해서 안 된다. 진실은 간단하다. ‘최고의 인재’만을 뽑겠다던 주장과는 정반대로, 트럼프 대통령이 끝내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은 피를 나눴거나 결혼을 통해 가족이 된 ‘트럼프 패밀리’밖에 없다.
트럼프 대통령이 백악관 안에 이방카를 들여 자신의 ‘눈과 귀’ 역할을 맡겨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배경은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다. 보통 새로 취임하는 행정부는 초반에는 공통의 목표 아래 똘똘 뭉쳐있다. 정권 차원에서 큰 시련을 겪기 전까지는 행정부 내의 갈등과 잡음이 새나가거나 서로 뒤에서 헐뜯는 일이 좀처럼 없다. 트럼프 행정부는 출범한 지 일주일 만에 그런 위기에 봉착했다.
현재 백악관과 정부 부처, 산하 기관에는 평균보다 적은 수의 사람들이 평균보다 많은 수의 파벌로 갈라져 있다.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아는 기자, 소개받은 기자에게 경쟁 파벌에 속한 사람이나 경쟁 부처에 있는 사람들을 헐뜯고 깎아내리는 이야기를 하는 데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쓰고 있다. 규율이 전혀 잡히지 않은 상황의 징후는 곳곳에서 드러난다. 정보 누설 방지 차원에서 열기로 한 회의의 안건이 사전에 언론에 전달돼 정보 누설을 근절하기로 결론을 내리고 회의를 마친 직후 회의에서 오간 모든 내용이 그대로 보도되기도 했다.
도널드 트럼프는 2007년 저서 『억만장자 마인드(Think Big and Kick Ass)』에 이렇게 썼다.
최고의 인재를 뽑아라. 그리고 그 사람을 함부로 믿지는 말라.
트럼프는 최고의 인재를 기껏해야 별난 사람 정도로 여긴다. 그리고 사업 경력 내내 그랬듯 정치에 뛰어들어 대선을 치르는 과정에서도 항상 과도하게 자신의 가족에게만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열었다. 트럼프 대통령의 자녀 중 성인인 에릭과 도널드 주니어, 그리고 이방카는 30~40년 인생을 사는 동안 아버지 회사에서, 아버지를 위해서 말고는 다른 사회 경험을 해본 적이 거의 없다. 트럼프는 대통령에 당선된 뒤 자신이 매일 돌보던 회사 경영을 두 아들에게 맡겼다.
다른 대통령이었다면,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심복을 백악관에 들이려 할 때 오랜 시간 함께한 훌륭한 동료나 아주 친한 친구를 선택했을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수석 고문으로 발레리 재럿을 택했던 것처럼 말이다. 트럼프 대통령에겐 가족 이외에 그렇게 가깝고 믿을 만한 사람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누군가 자신이 철석같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을 때 대통령에겐 딸을 부르는 것 말고는 별 대안이 없었다. 결국, 이방카 트럼프는 책임질 일은 거의 없이 막강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자리를 꿰찼다.
원문: 뉴스페퍼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