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연대 대표 성재기씨의 사망이 확인되었다. 이와 함께 성재기씨의 과거 행적, 그리고 남성연대의 지향이 미화되고 있으며, 동시에 ‘여성가족부 비판’으로 포장된, 출처조차 알 수 없는 근거를 기반으로 하는 여성혐오가 급격한 속도로 확대재생산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며칠간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지에서 써내려갔던 생각들을 다시금 정리해보고자 한다.
자살이 아니라 퍼포먼스 실패에 따른 사고사
한 사람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것과, 그 사람의 (어떤 행위의 결과로서의) 죽음이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에 대해 평가를 내리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이를 혼동하는 사람 (특히 이번 일의 경우 남성연대를 지지하던 사람들)이 많이 보이는데, 객관적으로 어떤 죽음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것이 곧 그 사람의 죽음에 대한 비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성재기의 죽음은 거칠게 말해, 불행한 사고였다. 그가 한강에서 뛰어내릴 때 (그러다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많을 수 있었을지언정) 그가 정말 ‘죽으려고’ 뛰어내린다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트위터에서 본인이 한 발언과, 한강에 뛰어내리기 전 사전 준비가 있었다는 점 등을 볼 때, 이런 추측은 설득력을 갖는다. 성재기의 한강 투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퍼포먼스로 기획된 일이었으며, 이 일련의 계획에 그의 죽음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그가 어떤 특정 가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던졌다’고 평가하는 것은 옳아보이지 않는다.
성재기의 남성 인권 주장, 문제설정도, 현실인식도, 해결책도 없었다
그는 결국 남성연대를 위한 퍼포먼스를 벌이다가 사망했기 때문에, 지금 함께 고려해야 할 것은 그의 가치지향이다. 그는 남성연대의 대표로서, ‘한국 사회에 만연한 남성에 대한 역차별’ ‘위협받는 남성 인권’ 등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시민운동’을 했다. 문제는 그게 제대로 된 문제설정인가, 제대로 된 현실인식에 기반한 것인가, 제대로 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며, 이에 대한 내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 (남성연대 지지자들)이 ‘남성 인권은 탄압받고 있으며, 여성은 더 이상 한국에서 지위가 낮은 존재가 아니다’ 라는 주장을 하며 이에 반박을 해왔다.
한국에서 유일하게 남성이 손해를 보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국가에 1년 9월에서 2년의 시간을 헌납해야 하는 군대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이를 남성에 대한 차별로 보는 시각은 옳지 않은데, 그것은 첫째로 1. 군대는 남성-여성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국민의 문제이며, 2. 징병제 그 자체가 한국의 가부장제에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결코 군 가산점제나 여성의 강제복무따위가 될 수 없다. 하지만 남성연대는 이 문제에 대해 제대로 된 인식도, 해결책도 제시하는 일이 없었다.
‘남성이 차별받고 있다’고 말하는 다른 무수한 부분들도 마찬가지다. (심지어는 호신술 시연 중에 실수로 남성의 고환을 파열시킨 여성의 ‘과실치상’ 벌금액과 성범죄의 벌금액수를 비교하며 여성 우위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이는 그야말로 무지의 소치일 뿐이다) 사회 온갖 곳에 깔린, 잠재된 (혹은 표출된) 여성 혐오와 남성우월주의를 일일이 나열하고, 데이터로 증명하는 것은 한계가 있겠지만, 그럼에도 너무 많은 객관적 지표들, 이를테면 성불평등 지수나, 남녀간 비정규직 근로자 수 비교, 남여 임금 비율 등, 그리고 웹에 만연한 ‘된장녀’ ‘의란성 쌍둥이’ ‘여자는 삼일에 한 번씩 패야 한다’는 등의 무차별적인 비난과 비하가 이 여전한 남성의 우위를 증명하고 있다. 남성이라는 귀속지위로 인해 가질 수 있었던 우위가 점차 줄어들고, 여성과 남성의 지위가 같아지는 상황을 두고 ‘남성에 대한 역차별’ 운운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일 뿐더러, 현실적이지도 않고, 차별의 시정을 반대한다는 점에서 해롭다.
성재기, 남성인권의 희생양인가
성재기와 남성연대가 ‘실재하지 않는 차별’을 ‘시정’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들, 실재하지 않던 게 정말로 존재하게 되는 것은 아니며, 그릇된 지향이 단지 주장과 노력을 통해 올바른 것이 되는 것도 아니다. 성재기의 지지자들은 그가 남성 인권을 위해 희생되었다고 말을 하나, 애초에 ‘남성 인권’은 위기에 처해 있지 않았으며, 따라서 그의 활동이 결코 누군가의 인권, 특히 ‘남성의 인권’을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의 주장은 재일조선인들이 머지않아 일본을 지배할 것이라고 떠들며 그들을 몰아내야 한다고 욕설을 퍼붓는 일본 극우들이나, 중국인들이 한국인을 잡아다가 장기매매를 한다는 제노포비아들의 주장과 다를 바가 없고, 이런 맥락에서 나는 (그의 죽음을 전태일 열사의 죽음과 비교하는 주장에 대해) 성재기는 “‘그냥’ 남성연대를 만들어서 ‘그냥’ 뛰어내렸다”고 말한 것이다.
또한 성재기와 남성연대는 ‘남성 인권’이라는 말을 흔히 입에 담았으나, 여성에 대한 입에 올릴 수조차 없을 비하나, 군대 문제에 대한 인식 수준, 심지어 성폭력 가해자를 두둔하는 행위 등을 보면 그들이 ‘인권’이 뭔지는 과연 알고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자연스레 들며, 그들의 활동 전반은 그저 여성을 화풀잇감으로 삼아 변화하는 사회에서 그들이 더 이상 누리지 못하게 된 ‘남성으로서의 지위’의 상실을 달래보려는 발버둥 그 이상으로 볼 수 없다.
성재기라는 한 인간이 생명을 마감했다는 것 자체는 유감스러운 일이고, 그 가족에게도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그가 ‘왜 죽었나’ 하는 문제를 평가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위에서 언급했듯, 나는 그의 죽음을 사고사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이는 어떤 숭고한 가치지향을 위한 것도 아니며, 한 개인을 한강에 뛰어들게 만들 정도로 절박하게 만든 어떤 사회 구조적 문제로 인한 것이라고 보지도 않는다.
따라서, 나는 그의 죽음을 마치 신성한 것인양 포장하고, 남성연대의 가치지향을 대단히 고귀하고 가치 있는 것인 마냥 포장하고 미화하려 하는, 그리고 성재기의 죽음의 책임을 성재기 그 자신과 남성연대 외의 누군가(특히 여성부와 여성)의 것으로 돌리고자 하는 시도에 반대한다.
p.s. 여성가족부에 대한 평가는 전혀 별개이다. ‘여성정책국’, ‘청소년가족정책국’등으로 나눠진 여성가족부의 정책을, 단순히 ‘여성부’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서 평가하는 것은 곤란하며, 그러한 정책들이 여성 전반을 대표하고 있다거나, 여성의 지위의 우월을 증명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 또한 곤란한 일이다.
p.s. 특수한 개별적 사례를 보편적 경향에 대한 반박의 근거로 사용하는 것은, 일단 오래 생각해본 후에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