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R&D 예산을 포닥급 전문 연구 인력을 키우는 데 투자하자고 제안한 지난번 글에 많은 분이 공감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동의해 주시는 분들의 생각 이면에는 아마 인공지능 분야에 대한 한국의 뒷북성 대응책 때문에 품은 불만과 더불어 국가연구과제 자체의 효용성 불신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왜 하필 포닥이냐’ ‘엘리트주의 아니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5억씩 지원하면 도덕적 해이가 있진 않냐’ 등 우려의 의견들도 주셨습니다. 모든 관심과 의견 감사드립니다.
지난 글의 요지는 국가 R&D 예산의 효율적인 투자를 위해 포닥 연구 인력을 육성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사실 더 본질적인 문제인 국가의 과학기술 경쟁력 측면에서 포닥 연구 인력의 중요성과 우리나라의 현실에 관해 얘기해볼까 합니다. 이 글이 앞에서 우려해주셨던 특정 집단 투자의 타당성에 대한 답변도 되길 기대합니다.
“포닥? 그거 취직하기 전에 잠깐 하는 거 아냐?”
먼저 포닥에 대한 인식을 좀 달리 봐주셨으면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포닥 과정이라 하면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기업이나 연구소에 취직하기 전 잠시 머물다 가는 곳으로 생각합니다. 졸업하느라 취직준비를 못 한 경우 기존의 연구실 또는 다른 대학이나 학과에서 1~2년 정도 머물며 취직준비를 하게 됩니다.
해외로 포닥을 가는 경우의 인식은 이렇습니다. 해외 유명한 학교나 교수 밑에서 3년 정도 국제적인 인맥과 경험을 쌓고 국내 교수나 연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즉 국내 포닥이든 해외 포닥이든 박사취득 후 안정적인 취업을 목표로 준비하는 임시과정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며 해외 포닥을 준비했고 독일로 와서 포닥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독일의 포닥 시스템을 경험하면서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독일의 포닥 지원 시스템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독일 포닥 프로그램으로 육성하고자 하는 목표는 ‘독립적인 연구원(individual researcher)’입니다. 선발 기준이나 운영 방법도 여기에 초점을 맞춥니다. 박사 취득 후 교수가 되기 전까지, 보통 5년 또는 그 이상 포닥 과정을 수행합니다. 한국 또는 미국에서 포닥을 5년 이상 한다고 하면 그리 좋게 생각하진 않을 겁니다. 포닥을 정규직이 되기 전 임시과정으로 인식하므로 5년 동안 직장을 구하지 못한 사람이 되기 때문이죠.
독일에서는 왜 이렇게 긴 기간 동안 각종 프로그램으로 포닥을 육성하고 장려할까요? 연구자가 되려면 본인만의 독립된 연구를 개척하라는 것이며 그걸 위해서는 박사과정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겁니다. 또한 대학에서 요구하는 강의 및 국가과제 등을 하지 말고 본인 연구에만 집중하라는 취지의 펠로우쉽 프로그램들이 있습니다. 이런 프로그램 덕분에 일찍 교수가 될 기회도 마다하고 계속 포닥으로 연구하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이 기간 동안 다양한 기회가 있습니다. 창업의 기회도 있고, 다른 연구자들과 교류하며 워크샵을 조직하기도 하고, 훌륭한 연구 성과를 거두어서 일찍 교수로 임용되기도 합니다. 또는 포닥 연구원으로 계속 남을 수도 있습니다. 제가 있는 연구실에서는 포닥들이 석사들과 함께 로보틱스 첼린지에 참여하며 팀을 이끌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졸업이나 실적에 부담 없이 로봇을 만들고 대회를 준비하는 게 얼마나 재밌는지 모릅니다.
한국 포닥과 연구자들의 현실
이에 비해 우리나라에서 연구원이 되는 과정을 보면, 지도교수 밑에서 석박사과정을 마치고 새로운 곳에서 짧은 기간 포닥을 하게 됩니다. 말 그대로 새로운 ‘경험’을 쌓는 기간이지 본인의 연구를 더 깊이 있게 발전시키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다 조교수를 시작하면 강의, 국가과제, 학생지도 등으로 바쁜 삶이 시작됩니다. 기초과학 분야를 제외하고 공학 분야에서 대학원에서 수행하는 연구는 국가과제를 기반으로 하므로 정책에 따라 그때그때 주제가 자주 바뀝니다. 즉 본인 연구를 발전시킬 시간은 박사과정밖에 없는데 이때 얼마나 비효율적으로 연구할 수밖에 없는지(또 다른 주제입니다만) 다들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단순히 비교해서 한 분야에서 독일의 젊은 연구자들은 박사 3년에 포닥 5년 동안 한 가지 연구에 집중할 수 있는 데 비해 한국의 젊은 연구자들은 비효율적인 박사과정 5년이 끝입니다. 이 기간에 새로운 연구분야를 개척하고 성숙한 기술이 나오기에는 시간도 짧고 집중도도 턱없이 부족합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더 큰 문제는 기술 전수가 안 된다는 점입니다. 새로운 기술이 나왔다고 처음부터 연구를 다시 시작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 세상에 전혀 새로운 기술이란 없습니다. 누군가의 연구를 바탕으로 하고 있고, 그것이 전수돼야 그 위에서 새로운 기술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박사과정 학생이 새로운 기술을 연구해서 박사학위를 받고 떠나면 새로운 박사과정 학생은 새로운 주제를 찾아서 처음부터 다시 홀로 시작합니다.
같은 박사과정끼리는 암묵적인 경쟁자라서 서로 자기 것 챙기기 바쁩니다. 선배가 남겨놓은 것이라곤 논문과 문서파일과 소스코드밖에 없습니다. 교수님은 다른 일로 항상 바쁘셔서 직접 지도받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바로 옆에서 지도하며 각종 노하우와 핵심 아이디어를 가르쳐줄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마 많은 박사과정 학생들이 같은 고충을 겪을 것입니다.
연구실에 포닥이 있더라도 어려운 건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포닥은 현재 연구실 일이나 연구보다는 다른 직장을 구하는 데 더 관심이 많습니다. 이것은 교수님들에게도 불만일 것입니다. 또 기간이 짧으므로 의미 있는 연구성과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지도받는 학생 입장에서는 큰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지만, 언제 떠날지 모르는 포닥에게 온전히 의지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한 연구실에 5년간 포닥이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교수님이 연구실 외부 일을 담당한다면 포닥은 연구실 내부 일을 담당합니다. 축구로 비유하자면 교수님이 감독, 포닥은 코치 또는 베테랑 선수입니다. 제가 있는 곳은 교수님 1명에 포닥 4명, 박사과정 10명입니다. 포닥 중 1명은 학교에서 정년 보장하며 고용한 정규직이고, 저를 비롯한 3명은 2년 되었으며 앞으로도 더 있을 예정입니다. 졸업에 대한 부담이 없기에 마음 편하게 후배들과 교류하며 도와줄 수 있습니다. 또 그것이 포닥 본인 연구를 더 발전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연구실에 베테랑 선수가 필요하다
박사 졸업은 연구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만, 졸업 직후 연구소든 기업이든 학교든 조직의 일원이 되면 그 조직에서 요구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조직이 주도하는 일을 하기에는 그게 맞는 시스템입니다. 조직에서 요구하는 인력을 배출하고 활용하는 것이죠. 한국 공학 분야 연구는 국가가 대부분 펀드를 쥐고 주도합니다. 매년 아주 세밀한 연구주제가 결정되어서 내려오고 그 과제를 따서 연구하고 성과를 내야 합니다. 국가 주도의 큰 연구 조직 시스템입니다. 그런 곳에서는 ‘독립된 연구자’를 키울 필요가 없었겠죠.
앞으로 다가올 시대의 기술은 국가 주도 아래서는 항상 뒷북만 치게 되어있습니다. 특히 인공지능 연구는 1년이면 논문 제목 키워드가 싹 바뀌는 세상입니다. 이렇게 시시각각 변화하는 상황에서 신예 선수들과 감독의 외침만 있다면 선수들은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현장에서 한눈에 감독의 의도를 읽고, 상황을 파악하고, 선수들을 독려하며 직접 옆에서 지시를 내릴 수 있는 베테랑 선수들이 필요합니다. 국가적으로 과학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포닥 육성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축구를 작은 전쟁에 비유하곤 합니다. 얼마 전 챔피언스리그에서 FCB가 PSG에게 1차전 4:0으로 지고도 2차전에서 6:1로 이겨 8강에 진출했습니다.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역전게임이라고 하지요. 마지막 위기의 순간에 활약한 선수들이 바로 베테랑 네이마르와 메시입니다. 잘 버티다가 결국 62분에 골 먹고, 감독도 관중도 나머지 선수들도 다 포기했을 때 바로 그 베테랑들이 나서서 선수들을 독려하며 3골을 연달아 넣고 역사를 이루어 냈습니다.
정말 요즘 인공지능 분야 연구는 전쟁입니다. 벌써 강팀들이 리그를 이루고 있습니다. 늦었더라도 지금부터 선수들을 키워야 합니다. 능력 있는 신예 선수들은 아주 많습니다. 그들을 현장에서 이끌 베테랑들을 놓치면 안 됩니다. 그들이 빅리그로 다 나가버리면 우리 팀은 영원히 선수만 배출하는 마이너리그팀이 되고 맙니다.
우리나라도 늦었지만 당장 지금부터라도, 올해 박사학위 취득하는 사람들부터라도 베테랑으로 길러내야 합니다. 그래서 FCB같이 위기에서 역사적인 반전을 이루어내길 간절히 바랍니다.
원문: Koosy Koo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