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장 드라마의 세계
막장드라마란 어떤 드라마인가? 어떤 사람들은 등장인물들이 윤리적으로 엉망인 행동을 하는 드라마를 가르켜서 막장드라마라고 부른다. 이 드라마에는 계속 반복되는 특징들이 있다. 기억상실, 출생의 비밀, 신분 차이가 있는 사람들이 만나는 신데렐라 스토리가 그것이다.
하지만 엄밀히 정의해 보자. 막장드라마가 윤리적으로 엉망인 행동을 하는 드라마인 것은 맞다. 식상한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도 맞다. 하지만 막장 드라마를 이렇게만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윤리적으로 엉망인 행동을 하고 식상한 아이디어가 반복되더라도 훌륭한 작품은 있을 수 있다.
어떤 드라마가 막장 드라마가 되는 근원적 이유는 그런 것들이 아니다. 그 드라마가 보여주는 세상 속에서 한 가지 특정한 규칙이나 가치가 절대적인 것으로 등장해서 종국에는 그 하나의 규칙을 지키기 위해 다른 모든 윤리적 규칙과 가치가 모두 무시되기 때문이다. 즉 윤리적 사고방식 내지 가치관이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것이 어떤 드라마를 진정한 막장으로 만든다.
한국 드라마에서 말하는 그 단 하나의 가치는 종종 혈연을 일컫는다. 그러니까 드라마는 흔히 이런 식으로 흘러간다.
어떤 사람이 등장해서 “내가 자식을 위해서는 못할 게 없어”라고 외치면서 온갖 범죄를 저지른다. 그 범죄 행위 때문에 그 드라마 속의 세계는 한정 없이 어두워진다. 그런데 그 사람은 수없는 사람들의 불행을 보면서도, 심지어 자기 자식조차 불행해지는 것을 보면서도 자신의 행동을 고집하고,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기꺼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고집을 부린다.
대개의 경우 드라마는 악의 축이 되는 사람이 죽거나 회개를 하면서 끝이 난다. 어떤 때는 죽어가면서도 “나는 그렇게 했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죽는다. 즉 자신이 절대로 삼는 그 윤리적 원칙인 ‘내 자식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한다’라는 주장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설사 반성을 한다고 해도 ‘적당히 했어야 했는데 정도에서’ 멈추곤 한다.
이런 분위기가 깔린 드라마에서는 혈연으로 이어진 관계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 범죄적 행위를 저지르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등장인물들이 혈연의 중요성을 상당히 강하게 인식한다는 것이다. 출생의 비밀 같은 것이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지 않을 리가 없지만, 그 세계 안에서는 거의 언제나 사는 방식을 완전히 뒤집을 이유가 된다. 내가 누구 자식이라는 것이 내 인생을 거의 완벽히 결정하는 느낌이랄까.
비슷하게 어디서 초라하고 소박하게 살던 사람이 알고 보니 회장님 손자라고 하면 갑자기 그 사람이 회사에 와서 사장이 된다. 그리고 그 드라마 속의 사람들은 이것을 마치 정의가 이룩된 것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나중에 모든 범죄가 드러나도 혈연으로 이어진 자식은 범죄자를 너무 쉽게 용서한다. 결국, 혈연은 소중하기 때문이다.
‘박정희 드라마’의 핵심에 있는 것
박정희 세계의 핵심에는 반공이 있다. 반공정신은 한국 전쟁의 트라우마가 시작시켰지만 박정희 정권에 의해서 고의적으로 심화되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악몽처럼 현실의 대한민국을 막장드라마로 만들었다.
박정희를 추모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은 반공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나머지 다른 모든 가치를 망각해 버린다. 그들은 급기야 법이건 윤리건 혹은 최소한의 인간적 감수성이건 반공을 위해서라면 모든지 희생해도 용서된다고 믿게 된다. 그것은 ‘코페르니쿠스적’ 가치전도인데, 대한민국을 위해서 반공이 있는 게 아니라 반공을 위해서 대한민국이 있다고 해야 할 정도의 맹신이기 때문이다. 반공을 위해서라는 이유를 대면, 대한민국에 어떤 깊은 상처를 주는 행위라 하더라도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다.
한 명의 간첩을 잡기 위해서라면 설사 백 명의 무고한 사람이 간첩으로 처벌받는다 해도 어쩔 수 없는 희생이 된다. 간첩을 잡기 위해 노력하는 나를 공격하는 사람은 분명 북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므로 빨갱이고 종북임이 틀림없다. 우리는 열심히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언론을 통제하며 기업을 협박해야 한다.
나는 그래도 된다. 왜냐면 나는 종북을 때려잡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설사 헌법이라고 할지라도 나를 막는다면, 그것은 헌법이 종북이기 때문이다.
막장드라마의 완결은 드라마 안에서가 아니라 드라마 바깥에서 이뤄진다. 앞에서 말한 혈연에 근거한 막장드라마로 돌아가 보자. 우리가 그 드라마가 너무 답답하며 그 드라마에 나오는 악역이 매우 답답했다고 하자. 그런데도 “여기서 그러면 혈연이 안 중요하다는 말인가?”라고 질문할 때가 진짜 중요한 순간이다. 그 순간 막장드라마는 스크린 바깥으로 튀어나온다. 당신은 그 스크린 안의 막장드라마에 포섭되고 만다. 혈연이 중요하다고 믿거나 중요하지 않다고 믿거나, 혹은 그 중간의 어디 중도적 위치에 있겠다고 생각해도 모두 그렇다.
진짜 중요한 것은 “그 답이 뭘까?”라는 질문에 갇히는 것이 아니다. 혈연과는 다른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혈연은 중요한 것인가?”에 대한 최종적인 답이 아니다. 이 세상에는 그 질문 말고도 물어야 할 가치 있는 질문이 아주, 아주 많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던지지 않은 질문이 많다. 우리가 가진 질문의 답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한 가지 질문에 대해 확고하고 최종적인 답을 얻을 수 있다고 해 보자. 인생은 그 다음 순간에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다차원적으로 세상을 본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혈연이 중요한가? 아닌가?” 이런 질문의 최종적 답을 알게 되지는 못한다. 다만, 혈연이라는 것이 뭔지 더 풍부하게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삶이란 이렇게 계속, 오래된 질문을 새롭게 던지는 것의 연속이다.
만약 박정희를 추종하는 누군가에게 내가 “반공이 전부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치자. 그러면 그들은 십중팔구 나를 종북이라고 부를 것이다. 혹은, “그러면 당신은 공산주의를 찬성하는가?”라고 물을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그들은 “반공이냐 아니냐?” 이 질문에만 빠져있다. 그래서 모든 것이 그에 관한 것이며 세상에는 반공주의자와 빨갱이 혹은 종북주의자 두 가지 종류의 사람만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종북으로 부름으로써 사람들을 아주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있다. 21세기 대한민국에 종북이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들이 광화문을 채울 정도로 많다고 믿는 사람들은 세계에서 그들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반공을 외치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종북이라고 불러서 우리는 뭘 얻게 되었나? 우리가 잘살게 되었나? 경제든 외교든 문화든 교육이든, 한국은 다 사면초가의 상태다. 그들이 장악한 한국은 마치 몇 치 앞밖에 못 보는 짐승처럼 행동했다. 우리는 어느새 몇조의 손실이 났다는 뉴스에 둔감해졌고 몇백 명이 죽었다고 하는데도 그런가 보다 하는 식으로 반응한다.
인간성이 파괴된 인간과 그렇지 않은 인간의 차이는, 촛불집회와 태극기 집회의 모습을 보면 안다. 단순히 폭력이 문제가 아니다. 박근혜를 지지하는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인간이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감수성이 없다. 세월호 피해자들의 부모들에게 폭언과 폭력을 행하는 것이 이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을 끝낼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세상을 풍요롭게 보는 법을 다수의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익히는 것밖에는 없다. 그렇지 못할 때에는, 설사 지금의 막장드라마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다수가 된다고 해도, 우리는 또다른 막장드라마를 보게 될 것이다.
마무리하며
촛불집회를 하는 사람들 중에도 폭력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도 어떤 하나의 가치와 아이디어에 몰두하는 사람들이다. 온 세상의 문제를 단 한 수에 해결할 수 있다는 사람은 진보건 보수건 넘쳐난다.
나는 자발적으로 행동하고 쓰레기를 줍고 줄을 서는 시민이 우리의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주체적으로 행동하며 인간미를 보여준다. ‘인간은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몸소 보여주며 보는 사람을 감화시킨다.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그렇게 보여주는 사람들이 있다. 오직 스스로 생각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만이 희망이다. 그들만이 이 막장드라마를 끝장낼 수 있다.
원문: 나를 지키는 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