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마지막 밤, 딸의 이야기
네팔을 떠나기 전 마지막 밤, 네팔에 오면서 아는 분께 소개를 받았던 네팔 사람 ‘니마’의 집에 초대를 받았다. 현지에서 여행사를 운영하고 있는 니마는 우리가 여행을 준비할 때 도움을 주셨는데, 오늘이 네팔의 축제 마지막 날이라 가족들이 모두 함께 모여 저녁을 먹는다고 감사하게도 집으로 초대해주셨다.
니마와 니마의 부인 소리는 네팔의 한국어 학원에서 처음 만났다고 했다. 니마도 한국어를 아주 잘했는데, 니마의 부인 역시 한국의 네팔영사관에서 근무했기에 한국어가 아주 유창했다.
“저는 한국에서, 이 사람은 일본에서 일을 하고 있었어요. 아무것도 없이 일본에서 양가 부모님만 모시고 간단하게 식을 올렸어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지만 해외 곳곳을 오가며 신혼생활을 시작했다는 니마와 소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까지 기분이 좋아졌다. 둘이 얼마나 사랑해서 결혼했고 아직까지도 서로를 아끼며 예쁜 두 아이와 알콩달콩 살고 있는지 그대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결혼을 고민하는 때가 되어 이미 결혼한 사람들을 만나면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있다.
“결혼은 정말 신중해야 해. 연애와는 달라.”
과연 그들은 결혼하기 전 어떻게 신중했을까? 궁금하여 더 자세히 물어보면 결국 대부분은 내가 한 번쯤은 들어봤거나 이미 생각해본 적 있는 것들이다. 사람마다 각자 경험에 기반하여 만들어놓은 기준들이 각양각색인 데다, 꽤나 큰 부분이 내가 평생 함께 살 그 사람에 대한 것보다는 그 사람의 주변에 대한 것이다.
가정환경이나 주변 사람들을 통해 그 사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내 입장에서는 ‘결혼 선배’들의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대부분의 것들이 결혼을 하거나, 적어도 결혼날짜를 잡고 실제 진행해야지만 알 수 있는 것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내가 결혼하기 전에 그 모든 것을 알기 위해 노력한다고 해도, 실제 함께 살았을 때 알게 되는 깊이는 천지 차이일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맞는 말이다. 한 사람과 한 사람이 만나서 하나의 인생을 만들어가는 굉장한 결정을 해야 하는데 신중해야 하고 모든 경우의 수를 따져야 하는 것도 맞다. 나이가 들면 더욱 결혼이 어려워진다는 말도 그런 이유에서인 것 같다. 이렇게 주변에서 결혼을 했거나 혹은 결혼에 실패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모든 기준에 부합하는 사람은 도저히 찾을 수 없겠다는 생각도 든다.
미국에서 유학하던 시절 만났던 같은 과 친구 둘이 있었다. 줄리아는 이혼하고 혼자 4살 된 아이를 키우며 학교를 다녔다. 로버트는 줄리아보다 나이가 좀 더 어렸었는데 학교생활 중 둘이 연애를 시작하더니 결국 졸업하고 결혼을 해서 줄리아의 아이를 본인의 아들처럼 사랑하며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다.
스스로를 보수적이라 생각하지 않았건만, 처음 이 결혼 소식을 듣고 놀랐던 내가 참 싫었다. 어찌 감히 내가 남의 연애와 결혼에 나의 잣대를 들이대면서 판단할 수 있을까.
“결혼식에 우리 부모님도 초대했어.”
둘의 결혼 이야기를 듣던 중 로버트가 내게 말했다. 친구들에게 결혼 소식을 전하듯 부모님께 청첩장을 보내 초대를 하다니. 한국에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대학을 갈 때부터 독립적인 생활을 하는 미국식 문화에서는 부모에게 성인이 된 후 특별히 경제적 지원을 받지 않기에 서로의 생활이 독립적이고 개인적이다. 물론 결혼도 부모의 의사와 큰 관계없이 본인의 선택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결혼적령기의 청년이 현실적으로 부모의 지원 없이 신혼생활을 시작하기도 어렵고, 결혼식은 부모들의 잔치라는 통념상 양가 부모의 의사가 중요하다. 그렇기에 부모님께 결혼 소식을 청첩장으로 전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연애를 하다가 ‘이 사람이다!’라는 확신이 들어서 결혼을 생각하게 되느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잘 모르겠다. 결혼은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보다 내가 얼마나 내 자신을 이해하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나와 다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통해 내 욕심을 채우려고 하다 보면 결혼은 물론, 연애에서부터 성공할 수 없다. 혼자 여행을 하면서 충분히 ‘나’라는 사람을 이해했다고 생각했을 때는 내가 누구하고 결혼해도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이런 나를 있는 그대로 존중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이왕이면 함께 있을 때 행복하고, 미래가 기대되는 사람이라면 말할 것도 없이 좋겠다.
네팔에서의 마지막 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신혼생활을 시작했다는 니마와 소리 부부가 존경스러웠다. 나 역시 이들처럼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없이 시작할지라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을 선택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무엇보다도 극한의 환경 속에서 함께했을 때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혼여행은 아무것도 없는 무인도나, 혹한의 겨울왕국이나, 산소가 희박한 고산지대로 떠나봐야겠다.
아빠의 이야기
대학생을 가르치다 보면 거의 매년 졸업생들의 주례부탁이 들어온다. ‘나 자신이 완벽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주례라니?’ 하면서 처음에는 거절도 많이 했지만, 결혼을 목전에 두고 주례선생을 찾아야 하는 제자들의 어려움이 느껴져서 언젠가부터 주례를 서기 시작했다.
첫 주례사를 준비하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하니 주례사만을 모아 놓은 책이 있었다. 소위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주옥같은 주례사를 보면서 내가 동감하는 키워드와 예문을 찾아 나만의 주례사를 만들었다.
“바다에 나가려거든 한 번 기도하고, 전쟁터에 나가려거든 두 번 기도하고, 결혼을 하려거든 세 번 기도하라.”
러시아의 속담이다. 세 번 기도할 정도로 결혼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임을 의미한다.
결혼은 당사자들만의 결합이 아니라 두 집안의 결합이다. 결혼 전에는 둘이서 모든 문제를 슬기롭게 헤쳐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 속에서 결혼하지만, 실제 상황은 그렇게 녹록지 않다. 아직도 많은 인도의 처녀들이 지참금 문제로 인한 가족 간의 갈등 속에 목숨을 잃는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비극적 사랑은 집안의 문제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연인 사이의 사랑은 세 달을 넘기기 어렵다고 한다. 그렇게 재미있다는 한국드라마도 세 달이면 끝나는 것은 아무리 좋아도 그 관심이 세 달을 넘기긴 어렵기 때문이다. 평생을 연인처럼 살 수는 없다. 결국, 부부 사이도 친구처럼 되어야 한다. 서로 존중하고 격려하며 자기 속을 다 보일 수 있는 친한 친구 사이. 누가 누굴 일방적으로 끌고 가는 사이도 아니고 일방적으로 돌보는 사이도 아니다. 간섭하거나 의심하는 사이는 더욱 아니다.
주례사는 이미 결혼을 정한 한 쌍에게 당부하는 말이지만, 지금 결혼 적령기에 들어선 내 딸에게는 무엇인가 결정적인 말을 해주고 싶었다. 여행을 시작하면서 무엇이 결혼에서 제일 중요한 것인가를 틈만 나면 생각해 내려고 애썼다. 과연 무슨 말이 결혼을 생각하는 지민이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연애와 결혼은 별개라고 생각한다. 연애는 떨어져 있으면 보고 싶고 설레고 만나면 엄청 재미있는 것이다. 그러나 결혼은 재미보다는 책임감이 더 중요하다. 경제적 책임을 포함한 모든 책임을 함께 질 수 있다는 자신감 말이다. 결혼하면 대부분 아이를 낳고 양육의 책임을 져야 한다. 잘못될 경우 자신들과 아이들의 인생까지도 힘들게 만든다. 아이들의 인생을 생각하면 선택에 따른 그 책임은 평생 지고 살아야 한다.
하객으로 결혼식장에 있다 보면 신랑이 아깝다거나 신부가 아깝다는 소리를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자본주의 시대에 결혼도 하나의 거래로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우울했다. 누구나 “집안 좋고, 학벌 좋고, 잘 생긴” 조건을 찾는다. 생긴 거야 지 눈에 안경이니 빼고, 학벌이 좋다는 것은 소위 좋은 대학을 나온 것이다.
예전에는 학벌과 수입이 어느 정도 비례했다. 하지만 지금도 그렇다는 보장은 없다. 집안이 좋은 상대를 얻으려면 자신의 집안이 좋아야 한다. 소위 재벌가들은 재벌가와 혼사를 맺는다. 사법연수원에서 연수생들은 연수원 안에서 짝을 찾으려 한다. 의전원이나 병원에서도 마찬가지다.
지민아, 부모들의 이기심과 노파심에서 나오는 충고나 조언에 연연할 것 없다. 돌이켜보면 아빠는 세 번 기도하라는 의미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결혼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들었던 많은 충고와 조언이 대부분 손해 보지 않는 거래를 위한 것이었다. 낳고 기른 부모라고 자신의 가치관과 인생관이 동일할 수 없다. 살아온 세상이 다르고 앞으로 살아갈 세상 또한 다르다. 선배나 친구들의 조언도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선배와 친구들이 나와 조건이 비슷할 수는 있어도 살고 싶은 인생도, 살아가야 하는 인생도 다르다. 또한 아직 그들 결혼의 끝도 알 수가 없다.
인생이 다른데 어떻게 선택의 기준이 같을 수 있겠니? 어차피 본인의 인생은 본인이 정하고 사는 것이다. 그 누구보다도 자신의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고 싶을 테니 말이다.
너의 본능적인 직관을 믿어라. 본능대로 결정하고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여라. 결국 너도 누구와 결혼하든지 마지막 세 번째 기도는 이렇게 하게 될 것이다.
“주의 뜻대로 이루옵소서.”
원문: 윤지민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