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동 앨리스>의 질문 : 한세경(문근영 분)의 질문
차승조 : 그럼, 내가 운좋게 얻어걸려서 운으로 여기까지 왔다는거야?
한세경 : 타고난 운을 이어간거겠죠…
차승조 : 타고나? 내가 혼자 힘으로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알잖아!
한세경 : 승조씬 행운을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니깐요. 근데 난 행운 같은거 쉽게 믿을 수 없는 사람이에요.
차승조 : 그런 루저들이 하는 소리 그만해!!!
한세경 : 그럼 승조씨도…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가난한 건 자기 잘못이라고 생각해요? 아무리 노력해도 가난한건, 그냥 어리석어서 그런것이라고 생각해요? 아무리 발버둥쳐도 가난한건, 내가 내 인생을 잘못살았기 때문이라는 거네요…?
<청담동 앨리스> 15회 中
재벌총수 아버지를 떠난 뒤 유럽에서 무일푼으로 지냈던 차승조(박시후 분). 그는 자신이 그린 그림이 3만 유로에 팔린 이후 승승장구의 길을 걷고, 명품유통회사의 한국지사 회장이 되어 돌아온다. 차승조는 스스로의 “능력과 노력”이 자신의 성공을 만들었다고 굳게 믿고 있다. 차승조의 성공은 스스로의 “능력과 노력” 덕분일까? 아니면 “(타고난) 행운을 이어간” 덕분일까?
오른쪽 그래프를 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다. 실업상태에 빠져있던 기간이 길었던 사람일수록 1차 서류심사에 통과할 확률이 낮다. 즉, 장기실업자는 재취업에 성공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노동시장 혹은 구직시장은 구직자와 인사담당자 간의 정보비대칭이 발생하는 공간이다. 인사담당자는 구직자의 능력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다. 능력이 뛰어나고 생산성이 높은 구직자를 선발해야 하지만, 인사담당자가 수많은 구직자들 개개인의 능력과 생산성을 온전히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인사담당자는 다른 인사담당자들의 행동을 참고하여 구직자를 선발한다. 쉽게 말해, “다른 많은 회사들이 오랜 기간동안 뽑지 않았던 구직자는 능력이 없을 것이다” 라고 추정하는 것이다. 단기실업자에 비해 장기실업자가 능력이 실제로 뒤떨어지는가는 중요치 않다. 다른 인사담당자들이 오랫동안 뽑지 않았다는 그 사실이 중요할 뿐이다.
정보의 비대칭 속에서 남을 따라하는 것은 오히려 합리적인 행동
경제학자 아비지트 배너지(Abhijit Banerjee)는 인사담당자의 이같은 행동을 표현하는 합리적 군집 모델(Rational Herding Model)을 고안했다. 이 모델에서 인사담당자는 구직자를 선택할 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보보다 다른 사람의 행동을 참고한다.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편승 효과(Bandwagon Effect)는 상황을 악화시킨다. 인사담당자가 ‘다른 인사담당자들의 행동을 참고’하여 구직자를 선발하기 때문에, 한 인사담당자들의 선택을 받은 구직자가 다른 인사담당자들의 선택도 받을 가능성이 높다. 다르게 말하면, 노동시장 첫 진입에 실패한 구직자는 계속해서 선택을 받지 못하고, 장기실업 상태에 머물러 있을 가능성이 높다.
어떤 이유로든 단지 노동시장 첫 진입에 실패했을 뿐인데,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장기실업이 되는 것이다.
작은 운의 차이가 평생의 소득을 좌우할 수 있다
단지 어떠한 불운으로 인해 일자리를 잃은 실업자는 갈수록 재취업의 기회가 줄어들게 된다. 반대로, 운좋게도 경제가 호황이고 실업율이 낮을때 졸업한 구직자는 첫 직장을 구하기도 쉬울 것이다. 노동시장에 성공적으로 첫 진입한 구직자는 합리적 군집 모델과 편승 효과가 일으킨 선순환 덕분에, 일생동안 풍족한 생활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10년 전, 리먼 브라더스와 J.P. 모건을 사이에 놓고 진로를 고심하고 있는 한 구직자를 생각해보자. 이 구직자는 5년 뒤에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하는 일이 일어날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약에 집에서 조금 더 가깝다는 이유로 리먼 브라더스를 선택했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단 한 번의 결정으로 인해 그의 생애소득 자체가 변하게 될 것이다.
오바마행정부에서 경제자문위원회의장을 맡은 앨런 크루거(Alan Krueger)는 음악시장을 예로 들며 행운의 중요성을 설명한다. 크루거는 사회학자 매트 살가닉(Matt Salganik)과 던컨 와츠(Duncan Watts)의 연구를 소개하는데, 그 내용은 간단하다.
진짜 1위곡과 48위곡이 뒤바뀌어 제시된다면?
연구참가자들에게 음악 다운로드 순위를 보여준채 무료 다운로드 이용권을 부여한다. 이때, 750번째 참가자들까지는 진짜 다운로드 순위를 보여주고, 이후 참가들에게는 거꾸로 작성된 순위를 보여준다. 48위 곡이 1위 곡으로 제시되고, 47위 곡이 2위 곡으로 제시되는 식이다. 그 결과, 놀라운 현상이 벌어졌다.
다운로드 순위가 정확하게 제시됐더라면, 1위 곡은 500회 이상 · 48위 곡은 29회의 다운로드를 기록했을 것이다. 그런데 연구참가자들에게 단지 다운로드 순위를 거꾸로 제시했을 뿐인데 (실제) 48위 곡의 다운로드 횟수가 급격히 증가한 반면에, (실제) 1위 곡의 다운로드 횟수 증가세는 (다운로드 순위가 정확하게 제시됐을 경우에 비해) 완만한 모습을 띄었다.
이러한 연구결과는 능력뿐 아니라 (행운과 같은) 임의적인 요소가 성공과 실패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보여준다. 당신의 밴드가 곡을 출시했는데, 같은 시점에 인기가 더 많은 다른 밴드가 곡을 출시한다고 생각해보자. 음원이용자에게 보여지는 다운로드 순위권에서 당신의 곡은 아래에 위치할 수도 있다. 음원이용자에게 제시될 다운로드 순위 그 자체로 인해, 당신 밴드의 노래 다운로드 횟수가 (크게) 달라질 것이다.
물론, 개인의 성공을 온전히 행운 덕분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앞서 언급한 연구결과들은 경제적 불균등을 해소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시사한다. 사회의 낙오자들에게 “다시 학교로 돌아가서 행운을 쟁취하렴!” 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다시 <청담동 앨리스>로 : 차승조(박시후 분)의 깨달음
한세경의 충고를 들은 차승조는 “타고난 행운”이 자신의 성공에 큰 기여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까? 차승조의 前 여자친구 서윤주(소이현 분)는 3만 유로를 주고 그림을 사준 사람은 바로 재벌회장인 “차승조의 아버지” 일 것이라고 말한다. 차승조 아버지는 말한다. “이런 애비 타고난 게 네 능력이야! 다 타고난 네 능력이라고!”
차승조 : 왜 그러셨어요. 왜 샀냐구요! 내 그림 왜 샀어요!
차승조 아버지 : 네 놈 거지꼴로 사는거 못보겠어서 그림 하나 사준거야. 대놓고 돈 줬으면 안 받았을거 아니야.
차승조 : 이게 그림 하나에요? 이 그림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데? 결국 나.. 아버지 때문에 여기까지 온거에요.
차승조 아버지 : 이런 애비 타고난 게 네 능력이야! 다 타고난 네 능력이라고! 남들은 못가져서 난리인데, 너는 가졌다고 이 난리냐!
차승조 : 타고난 행운… 결국 그거였네요. 난 아무리 날고 기어도 아버지 없인…. 아무것도 못하는 놈이었어요.
<청담동 앨리스> 16회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