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해방촌 나눔의집에서 맞이하는 2017년 사순 2주일. ‘거듭남’이란 무엇일까? 성서와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거듭남은, 시대와 사회에 따라 여러 의미를 지니며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그래서 2017년 한국 사회와 교회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거듭남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미와 해석을 우선적으로 받아들인다.
‘거듭남이란, 주류 사회와 교회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에 대해, 다시 한번 다르게 질문하고 도전하는 태도와 용기를 갖게 되는 것이다.’
다양한 맥락에서 가난하게 사는 ‘사회적 소수자 길벗들’에게 우선적으로 ‘정의롭고 평등한 세상’이 되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 세상을 위해서 우리가 나누는 밥상부터 정의롭고 평등하며 풍성한 밥상이길 소망한다.
우리는 다시 한 번 다르게 질문하고 도전하며 응답하는 태도로 살아갈 것이다. 이것이 이 땅의 왜곡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권력들에 의해 비뚤어지고 물들어 가는 우리들의 꿈과 일상에서 그리스도를 따라 싸우는, 또 하나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사순절기. 우리는 왜 무엇을 질문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하는가?
- 2017년 3월 12일, 사순 2주일(Second Sunday in Lent)
- 1독서, 창세 12:1-4상 / 2독서, 로마 4:1-5, 13-17 / 복음, 요한 3:1-17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립니다. 아멘.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알고 계시듯이, 지난 금요일에 우리는 ‘대통령 파면’이라는 사건을 경험했습니다.
이제는 파면된 전직 대통령인 박근혜씨가 ‘하야’해야 하는 이유를 나눔의집 입간판에 적은 게 작년 10월 말입니다. 그가 탄핵되고 이 땅의 여러 가지 문제들이 혁파되어야 한다는 ‘우리 동네 시국선언문’에 연대 서명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선언문을 나눔의집 출입구 유리문에 붙여놓은 게 작년 11월 말입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우리는 참으로 많은 일들을 겪었습니다. 그 일들은 이 땅에 머물러 사는 사람들이라면 모두에게 영향을 주는 큰 사건들이었습니다. 그 수많은 갈등과 분노 그리고 끝까지 책임을 회피하고 더 가진 자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몸부림은, 상대적으로 작고 연약한 자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더 힘들게 만들었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 이주 노동자와 이주 여성 그리고 그 식구들의 일상은 직간접적으로 더 불안하고 어려워졌습니다.
불안과 갈등 그리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사회 지도자들의 행태는 사회를 더 보수적이고 닫힌 구조와 분위기로 만듭니다. 그 가운데 더 작고 연약한 자리에서 몫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더 많은 위협과 불안에 노출됩니다. 그들과 함께 동행하는 사람들의 삶도 더 힘들어집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이번 탄핵 심판은 끝이 아닌 시작이라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이 땅에서 다양한 모습과 방식으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이주민 식구들은 물론, 이 땅의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의 삶이 더 나아지고 평등해지기 위해서 여러 변화가 시작되어야 한다는 걸 놓쳐서는 안 됩니다. 그런 변화 없는 평화나 통합은, 오히려 상대적으로 더 작고 연약한 자리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삶을 착취하는 선택이란 걸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2017년 오늘, 사순절기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한 것’이라고 얘기되는 것들에 대해서 다시 한번 질문하고 도전하는 태도와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저는 오늘 성서 말씀이 우리에게 ‘당연한 것들에 대해 다시 한번 다르게 질문하며 도전하는 태도와 용기’를 준다고 생각합니다.
성서와 그리스도교 교회가 말하는 ‘거듭남’이란, 이렇게 ‘당연한 것들에 대해 다시 한 번 다르게 질문하고 도전하는 태도와 용기를 갖게 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1독서는 우리가 신앙의 조상 아브라함으로 알고 있는 아브람이 야훼 하느님의 은총으로 ‘새로운 복’을 약속받았고, 그 약속의 길로 떠났다는 걸 말해주고 있습니다. 2독서에서는 그런 아브라함이 ‘민족의 조상’이자 ‘하느님과 동행한 사람들의 선조’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런 복된 명칭을 받게 된 것은 아브라함 자신의 공로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은총에 응답하는 믿음 때문일 뿐이라고 강조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에 응답하는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저는 이것을 ‘방향 전환의 용기’라고 표현합니다. 좀 더 풀어서 말하자면, ‘우리들의 질문과 삶의 태도를 바꾸는 용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등장하는 니고데모와 예수 그리스도의 만남과 대화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당시 유대인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이었습니다. 다만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수군거리며 터부시하던 다른 이스라엘 지도자들과는 다른 부류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밤에 찾아오긴 했으나, 그는 예수님을 찾아와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고서야 누가 선생님처럼 그런 기적들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요한 3:2).
예수님을 의심하거나 적대시하던 다른 이스라엘 지도자들과 니고데모는 달랐습니다. 최소한 그는 예수님을 ‘하느님이 보내신 선지자이자 랍비’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이스라엘이 믿고 따르던 야훼의 가르침을 잘 해석하고 인도해줄 사람 중 한 명’으로 대했을 뿐입니다. 예수님을 ‘이스라엘이 믿고 따르던 야훼의 가르침, 그 가르침의 핵심을 만나게 할 새로운 길’로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야훼 하느님을 만나기 전에 아브람은 ‘큰 아비’로 불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야훼 하느님이 그를 선택하여 부르시고 그가 믿음으로 응답하자, 그는 ‘온 세상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되었습니다.
니고데모도 비슷한 기회를 얻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유대인들의 지도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이제 예수님을 찾아와 문답을 주고받으며 새로운 길로 나아갈 기회를 얻습니다. 모든 사람들을 영원한 생명의 길이자 구원의 길로 안내하는 은총의 사람이 되도록 초대받았습니다.
이제 그도 다른 제자들처럼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을 넘어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르는 사람들”이 되는 길에 합류하도록 초대받았습니다(로마 4:16). 야훼 하느님은 아브람에게 ‘네가 이해하던 복, 그 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던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라. 그래야만 내가 네게 베풀 새로운 복과 은총을 얻을 수 있다’라고 말하셨습니다(창세 12:1). 아브람은 그 야훼 하느님의 초대에 응했고, 아브라함으로 바뀐 이름으로 그 은총의 길에서 야훼 하느님과 동행하며 살았습니다.
니고데모도 비슷한 초대를 받습니다. 그는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와의 문답에서, 지금까지 그가 생각하던 율법과 그 율법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 전혀 다른 이해와 약속을 듣습니다. 그 가운데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질문과 태도를 바꾸라고 요청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나라에 들어가고 그 생명과 구원의 길로 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질문과 태도를 바꿔야만 합니다.
아브라함처럼 하느님의 은총에 응답하는 믿음을 갖는 사람이 되는 길은 ‘순응하는 사람’이 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제대로 된 질문을 하며, 그 질문에 응답하는 태도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사순절기에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 질문해야 합니다. 그 하느님의 나라로 가는 길에 대해 제대로 질문해야 합니다. 그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어떤 질문과 태도로 살아야 하는지 묻고 답하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 2017년 사순절기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교회와 사회에 대해 질문 없이 순응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계속 질문하며 그 질문에 답하는 태도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이런 성서의 가르침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잠시 묵상합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아멘.
본기도(Collet)
자애로우신 하느님, 지극한 사랑과 인내로 보살피시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하느님의 진실한 자녀가 되어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함께 한 분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