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를 타락시킨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가 ‘기복신앙’이라고들 한다. 흔히 ‘5중 복음 3박자 축복’으로 대표되는 기복신앙으로 한국교회가 양적으로 엄청나게 성장했지만, 그와 함께 많은 부작용과 복음의 변질이 있었다고 본다. 그런데 정말 기복신앙이 나쁜 걸까. 모든 종교에는 고통과 질병에서 벗어나 자기가 원하는 바를 간구하고 복 받기 바라는 ‘기복’적인 면이 있다. 성경 이야기도 예외는 아니다. 성경 속 많은 인물이 하나님께 축복받고 고통에서 벗어나길 간구하며 기도한다.
난 솔직히 신앙의 여러 다양한 모습 가운데 ‘기복적인’ 측면을 없애 버리고 쫓아내야 할 부정적인 것으로만 생각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종교성과 신을 의지하려고 하는 마음 중심에는 축복을 기원하고 현세의 문제가 해결되기 바라는 뿌리 깊은 의식이 있다. 종교성을 가진 인간에게 기복적인 모습 자체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한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서 아들이 빵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으며,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 마태복음 7:9-11(새번역)
그러므로 난 기복신앙 자체가 나쁜 게 아니라 기복신앙의 ‘복 받는 주체’가 항상 자기 자신에게 머물러 있는 상태로 굳어져 버린 것이 문제라 생각한다. 성도와 하나님의 관계를 자녀와 아버지의 관계로 비유하자면 갓난아기는 온 우주가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오직 자기 필요, 자기 욕망, 자기 꿈과 관련된 것들을 구한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서도 오직 자기 필요, 자기 욕망, 자기 꿈만을 위해 모든 것을 구한다면, 그것은 어른이 아니라 아직도 갓난아기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증거가 된다. 마찬가지로 한국교회의 기복신앙에는 타인과 이웃을 위한 필요와 축복이 별로 없다. 오로지 자기 성공, 자기 교회 부흥, 자기 교단 교세를 늘리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사회의 아픔과 그늘을 돌아볼 생각이 없으므로 비판받는 것이다.
내가 아는 아프리카 선교사님은 열악한 환경과 재정 가운데서 긴급한 필요를 간절히 구하는 중보 기도 메일과 카톡을 주신다. 그런 선교사님의 메일과 중보 기도 요청을 받으면서 그 누구도 ‘기복신앙’이라고 비난하지 않는다. 그 선교사님은 자신의 필요가 아니라 그가 돕고 있는 아프리카인들의 필요를 위해 기도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기복신앙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이렇듯 기복신앙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닐 수 있다. 그가 구하는 복이 자기만을 위한 복이 아니라 타인과 이웃의 필요, 공동체의 필요를 위해 구하는 기복신앙이라면 그런 기복신앙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아름다운 밑거름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기복신앙에는 신앙을 변질시킬 수 있는 위험한 요소가 있다. 그것은 모두 기도 응답과 관련된 문제이다.
첫 번째는 오래된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고 싶어 하는 욕심이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문제가 누적된 시간이 10년이라면, 회복되는 데 걸리는 시간도 그쯤 된다고 봐야 한다. 건강을 잃게 만든 잘못된 습관이 10년째 누적되어 있다면 그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기 위해서는 족히 10년간은 바른 습관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간사하고 어리석어서 문제가 누적된 기간만큼 회복의 시간을 투자하는 것을 아까워하고 주저한다. 그리고는 하나님을 원망한다. 인생을 살아가는 태도에서 겸손함이란 아무리 늦었다고 생각될 때도 다시 한 걸음부터 ‘회복의 시간을 차근차근 걸어가리라’ 다짐하며 한 걸음을 내딛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편법과 지름길은 없다는 걸 명심하면서 말이다.
가짜 신앙, 가짜 치유, 무당과 돌팔이는 바로 그 지점에서 기복신앙의 탈을 쓰고 우리를 유혹해 온다. ‘당신의 문제나 당신의 병이 10년째 누적되어 온 것이지만 나만 믿으면 (내 말대로만 하면) 단번에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속이면서 종교적 헌신을 강요한다. 이렇게 말하고 유혹하는 사람들, 종교와 책들을 조심해야 한다. 그들은 십중팔구 당신의 간절함을 이용해 자기의 배를 채우려는 사기꾼일 테니까.
40일을 굶은 예수께서도 지금 당장 당신의 능력을 이용하여 이 돌을 떡으로 변하게 하여 배고픔을 해결하라는 마귀의 지극히 설득력 있는 유혹을 물리치셨다. 왜 그러셨을까.
그즈음에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셔서, 악마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예수께서 밤낮 사십 일을 금식하시니, 시장하셨다. 그런데 시험하는 자가 와서, 예수께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말해 보아라.’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 하였다.
- 마태복음 4:1-4(새번역)
난 그 모습에서 예수의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라고 선포하신 데는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셨듯(창 3:17), 땀 흘려 열매 맺어 먹고 살아가는 삶의 원리로 살리라는 예수의 의지가 담긴 고백이 아니었을까. 즉 예수가 성육신하여 이 땅에 인간으로 태어난 이유는 전지전능한 신의 권능으로 편하게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리 배고프고 힘들어도 밥 한 끼 먹기 위해서는 땀 흘리고 수고해야 하는 인간들 삶의 고단함을 편법이나 지름길로 지나치지 않고 온전히 살아 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예수께서는 충분히 가능한 능력을 가지고서도 인생의 지름길로 가지 않으셨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꾸 ‘단번에 해결 가능한’ 가짜 해결책을 제시하는 종교와 사기꾼들에게 농락당한다. 이런 현실이 안타깝다. 간절히 구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 주실 거라는 생각은 기복신앙이 변질하여 나타날 수 있는 가장 흔한 부작용이다.
문제가 오래되었으면 회복에도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지름길을 알려 주겠다고 유혹하는 것은 참된 신앙이 아니다. 우상숭배와 샤머니즘의 길이다. 참된 신앙은 지름길이 아니라 옳은 길을 알려 주는 것이다. 지름길은 없다. 이제부터 바른길로 차근차근 걸어가는 수밖에. 그게 진짜 믿음을 가지고 ‘회개’하는 자의 삶일 것이다. 그리고 올바른 신앙은 그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주지만, 기도하면 모든 문제가 단번에 해결될 거라고 속이지 않는다.
두 번째는 기도 응답 여부에 따라 하나님의 사랑과 부재를 느끼는 미숙한 신앙의 위험성이다. 기복신앙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보면 기도 응답 여부에 따라 하나님의 사랑을 평가하거나 의심하는 경향이 생긴다. 하나님이 내 기도에 얼마나 자주 응답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사랑이 측정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고 미숙한 신앙인가.
그러나 실제로는 이런 미숙한 사고방식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헤아리려는 신앙인이 너무 많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간구하는 기도는 하나님과 지속적인 교제를 하기에 좋은 첫걸음일 수는 있다. 그러나 내 기도에 얼마나 자주 응답하느냐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드러내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 때로 우리 신앙을 성장시키기 위해 그분은 상당 기간 침묵하시거나 응답하지 않으실 수도 있다.
이렇게 기도하고 간절히 구하다 보면, 결국은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우리 믿음을 배반하는 현실의 실패와 낙담을 경험할 때도 많다. 아무리 신앙이 좋아도 원하는 기도 응답을 못 받을 때가 있다. 사업에 실패할 때도 있고, 건강을 잃어 암에 걸릴 때도 있으며, 사랑하는 사람이 불의의 사고로 죽을 수도 있다.
기도 응답 여부에 따라 하나님의 사랑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성경의 대표적인 예를 ‘욥’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다. 욥은 하나님 앞에 흠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이 사탄과 내기를 하는 바람에 졸지에 모든 것을 잃고 만다. 사랑하는 자식도 죽고 건강도 잃어버린다. 욥기 이야기는 난해하며 해석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욥을 통해 한 가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은 축복받는 삶의 인과관계가 그렇게 단순하지마는 않다는 것이다.
기도 열심히 한다고 만사형통하고, 신앙이 좋다고 삶의 비극을 모두 피해 가며, 교회에 열심히 헌신하고 봉사한다고 무병장수하고 행복하기만 한 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이상하게도 착하고 신앙 좋고 이웃을 사랑하는 데 헌신적인 사람인데도 삶의 비극과 아픔이 끊이지 않게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우린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미숙한 기복신앙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에게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이 땅의 삶에서는 허다하다.
기복신앙의 위험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너무 단순하게 조율된 인과관계의 원리로 바라보려 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원인을 알 수 없는 비극을 겪거나, 불행하고, 사업에 실패하고 우울증에 걸린 것에 대해 ‘충분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부족하거나 ‘충분히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다 설명하는 것이다.
진짜 현실 세계에서는 그런 단순한 신앙의 인과관계로 설명이 되지 않는 일이 너무 많다. 하나님 뜻을 알려고 발버둥 치지만 끝내 그 뜻을 알 수 없어 낙담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교회 설교 시간에 많은 목사가 인생의 문제와 고난의 문제를 너무나 쉽고 안일하게 기계적으로 다루곤 한다. 해결할 수 없는 인생의 난제 앞에서 벼랑 끝에 선 교인들은 그런 설교를 들으며 삶을 자책하며 낙심에 빠진다.
기복신앙의 가장 큰 문제는 지나치게 단순한 인과관계의 신앙으로 인생 모든 문제를 해석해 내려는 데 있다. 그것을 극복하려면 한 걸음 더 성숙한 신앙의 세계로 나가야 한다. 이유를 알 수 없고 원인을 알 수 없는 고난 가운데서도 나를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그분의 임재에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기는 믿음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려 줘야 한다.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인과관계와 그분의 뜻과 섭리를 알 수 없을지라도 막막한 광야 같은 삶 가운데 여전히 곁에서 그분이 동행하고 계시다는 그 믿음을 가르치는 교회와 신앙인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런 신앙인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신앙적으로 봤을 때, 결국 실패하고 결핍된 삶을 충분히 살아 본 교회와 교인들만이 그런 신앙을 갖고 있지 않을까. 원하고 기도하던 것에 응답받지 못했어도 변함없이 자신을 사랑하시는 예수를 체험한 사람만이 그런 신앙을 가르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기도 응답을 받았다는 고백으로만 넘쳐나는 교회가 좀 불편하다.
역설적이게도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고백을 공유하는 교회와 교인들을 통해 하나님은 ‘필요한 것’을 채워 주는 ‘램프의 요정’이 아니라 삶의 모순과 부조리 속에서도 변함없이 사랑하시고 동행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으로 명확히 드러난다.
고통은 고집스럽게 우리의 주목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은 쾌락 속에서 우리에게 속삭이시고, 양심 속에서 말씀하시며, 고통 속에서 소리치십니다. 고통은 귀먹은 세상을 불러 깨우는 하나님의 메가폰입니다.
- C.S. 루이스 『고통의 문제』 중에서
C.S. 루이스의 이 말처럼, 어쩌면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지 않고 침묵하는 시간을 통해 타인의 삶을 이해하고 타인의 고통을 체험할 기회를 우리 모두에게 주는 것일지 모른다. 너무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인간은 고통스러운 깨어짐의 시간이 없이는 오로지 자기의 필요, 자기의 욕망에만 집중하고 기도할 테니까. 기복신앙의 자기 중심성은 기도 응답의 부재와 신의 침묵으로 비로소 벗어나게 된다.
이제 한국교회에는 믿음 안에서 무엇이든 가능하며 풍족하게 살 수 있다는 ‘5중 복음 3박자 축복’을 외치는 선지자가 아니라 하박국의 노래를 들려줄 선지자가 필요하다. 비록 기도 응답이 없는 실패와 낙담의 현장에서도 변함없이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고통받는 이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들을 위로하는 신앙인이 더욱 많아지면 좋겠다.
무화과나무에 과일이 없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을지라도, 올리브 나무에서 딸 것이 없고 밭에서 거두어들일 것이 없을지라도,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련다.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련다.
주 하나님은 나의 힘이시다. 나의 발을 사슴의 발과 같게 하셔서, 산등성이를 마구 치닫게 하신다.
- 하박국 3:17-19(새번역)
원문: 뉴스앤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