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청소를 일주일에 한 번 하는데 그게 바로 주말 오전이다. 샤워하고 나와서 옷 입고 창문을 여는 것으로 시작한다. 가장 먼저 들어가는 곳이 화장실이다. 아직 화장실에 물기가 남아있을 때 락스와 세제를 뿌리고 솔로 타일 바닥과 변기를 닦은 후 마지막으로 물을 뿌리고 마무리를 한다.
본격적인 방 청소는 지금부터다. 먼저 세탁기를 돌리고 전날 불금이랍시고 ‘어차피 내일 청소할 거니까!’라는 마음으로 탁자 위에 벌려 놓은 빈 맥주캔과 안주 접시를 치우면서 이 일을 오늘로 미뤄 둔 어제의 나를 원망한다. 그런 후 청소기를 돌려 먼지와 머리카락을 빨아들이고 한 주 동안 마구잡이로 벌려놓은 것들을 ‘적당히’ 정리한다.
일주일 동안 밥을 해 먹었으니 인버터 주변도 아주 난장판이다. 기름을 많이 쓰는 만큼 기름때도 많고 조리의 흔적들로 지저분하다. 물티슈를 몇 장 꺼내어 인버터와 그 주변을 닦아낸다. 인버터가 썩 마음에 들진 않지만 청소가 이렇게 편하다는 건 좋다. 아마 일반 가스레인지였으면 다 들어내고 여기도 락스 칠을 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어제 미뤄 둔 설거지를 한다. 고무장갑 같은 것은 없다. 고무장갑을 끼면 일단 손의 감각이 둔해질 뿐만 아니라 그릇이 정말 제대로 닦였는지 확인하기 힘들어서다. 고무장갑을 낀 채로는 그릇에 기름기가 아직 남아 있는지 확인하기 어렵지만 맨손으로 만져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다.
이제 거의 끝이다. 이제 일주일 동안 쌓아둔 재활용 쓰레기들을 밖에 내다 버리기만 하면 된다. 만약 주 중에 장을 못 봤다면 보통 이때 쓰레기를 내다 버리러 나가면서 장을 보러 마트까지 걸어간다. 이렇게 하면 주말 오전이 금방 지나간다.
이렇게 써놓으니 내가 부지런하게 청소 열심히 하고 사는 거로 보이겠지만 사실 그렇진 않다. 독거인으로 오래 살다 보니 생활의 지향점 자체가 ‘적당히’로 잡혀 있다. 그래서 청소 또한 적당히 더러운 수준으로의 회복을 목표점으로 두고 있다.
청소는 정말 비효율적 노동이다. 투입 노동 시간을 늘리면 그만큼 집이 깨끗해지긴 하지만 1시간 청소를 하던 것을 2시간 청소한다 해서 집이 2배 깨끗해지진 않는다. 2배는 고사하고 1.2배 깨끗해지는 정도에 불과한 데다가 사실 이거 티도 잘 안난다. 경제학으로 치면 한계효율이 낮은 셈이다. 그러다 보니 시간을 들여도 별로 티도 안 날 거, 그냥 적당히 지저분한 정도를 유지하는 수준으로만 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밖에 안 했는데도 시간 금방 간다. 이걸 안 하고 살 수는 없다. 일반적으로 ‘노동’하면 ‘생산을 위한 노동’만 보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다 보니 ‘생산을 하기 위한 노동을 충전하기 위한 노동(짧게 줄여 재생산 노동이라 하자)’은 여기에서 보이지 않는 뒤편으로 밀려난다. 이것이 가사다. 이 가사 노동은 어마어마한 노동이다.
예를 들어 식사를 보자. 사람들은 매 끼니 밥을 먹고 살며 이 식사를 위해 노동을 투입하며 산다. ‘오늘은 간단하게 XX 해 먹자’라고 할 때의 이 간단한 식사는 보통 만드는데 30분 이내로 걸리는 요리를 말한다. 대부분은 이 식사를 위한 노동을 ‘요리에 걸리는 시간’으로 생각한다. 그러면 정말로 그런지를 살펴보자.
혼자 사는 내 경우엔 ‘오늘 저녁에 뭐 먹지’가 늘 고민이다. 밥상 받는 사람이야 그런 고민 별로 안 하겠지만 만드는 사람은 이 고민을 늘 한다. 이런 고민의 시간이 있다. 그리고 냉장고에 있는 재료를 떠올려보고 없으면 사러 간다. 마트에 들러 장을 보고 돌아오는 시간은 보는데 이동시간, 여기에 물건을 고르고 결제하는 시간 포함해서 내 경우 1시간 정도가 소요된다.
집에 와서 조리 시간 말고 재료를 다듬는데 들어가는 시간도 또 따로 있다. 나는 시간 오래 들어가는 음식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 30분 이내에 완성되는 걸로만 해 먹는다. 이 모든 노동 시간을 투입해서 겨우 밥 한 끼 먹는 것이다.
밥 다 먹었다고 끝인가 하면 설거지가 남았다. 요리할 때 벌여 놓은 것들을 그 자리에서 치우는 편이긴 하지만 가끔 하루가 힘들 때는 아예 미뤄두게 된다. 설거지하고 정리까지 하면 또 30분 정도가 소요된다.
이렇게 겨우 밥 한 끼 먹는 데 많은 시간이 들어가는 것이다. 이게 귀찮으면 라면이나 끓여 먹고 사는 건데 그러고 살면 사람이 병든다. 독거인이 병까지 들면 답이 없다. 병이 드는 순간 가사 노동이 사실상 올스탑이 되기 때문에 집안의 환경은 더 나빠진다.
이렇게 중요한 노동임에도 이렇게 과소평가 받는 노동이 또 있을까? 위에서 내가 예를 든 식사만 하더라도 밥 한 끼 먹는데 2시간+a의 많은 노동을 투입했지만 남 보기에 내가 들인 노동은 겨우 30분에 불과하다. 회사에서 야근할 때 이런 식으로 후려치기 당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래서 다들 매우 분노하지 않는가? 그게 집안일에서도 벌어지는 것이다.
가사를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옛날 세계관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의 경우는 남자가 가사 노동을 하는 것을 ‘남성의 수치’로 여기기도 한다. 비천한 일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노동이 없다면 우리는 결코 생산을 위한 노동을 할 수 없다. 이 노동은 절대 무시할 수 없는 노동이다.
소스타인 베블런은 『유한계급론』에서 “유한계급들은 생산을 위한 노동은 비천한 노동이며 비천한 자들이 하는 것이라고 규정짓고 자신들은 그러한 비천한 노동에서 면제받았다는 것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과시한다”고 이야기했다. 베블런이 책에서 이야기하지 않았고, 본인도 아마 자각 못 했겠지만 생산을 위한 노동을 하는 계급도 자신들의 노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한 노동을 비천한 노동으로 여겨왔다.
이제 시대가 흘러 생산을 위한 노동이 과거처럼 비천한 노동 취급을 받고 있진 않다. 그러나 아직 재생산을 위한 노동에 대한 시선은 큰 진전이 없는 것 같기도 하다. 가사 노동을 무시하는 사람들을 참 많이 본다. 가사 노동을 무시하지 말자. 그 노동이 없다면 당신이 자랑하는 그 잘난 노동은 하지도 못할 테니까.
혹시나 가사 노동을 여전히 특정 계층이 해야 할 일로 여기고 있다면, 축하한다. 당신은 화석이다. 계급제가 사라진 지가 언젠데 아직도 노동에 따라 계급을 나누고 가사 노동을 하는 사람을 자신의 아래 계급으로 본단 말인가? 그렇다고 당신이 19세기 근대 귀족도 아닌데 말이다.
덧붙임. 가끔 ‘우리 어머니는 더 힘들게 살았는데 그것보다 편하게 하면서 그게 뭐 대수냐’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본다. 어머니 등골 뽑아 먹고 자란 것은 자랑이 아니다. 본인이 평생 마음속 부끄러움으로 여겨도 모자랄 마당에 그걸 자랑스레 떠드는 것은 문제가 있다.
원문: Second Com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