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여러 가지 갑질들이 보도되고 있고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들고 있다. 그런데 그런 갑질의 만연에 기여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우리의 직업윤리다. 사람들은 대개, 일이니까 라는 말을 붙이면 뭐든지 참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다. 그리고 공식적으로 내밀 직업이 없다는 것에 대해 매우 큰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같은 사람이라도 자기 집에서 설거지를 하라고 하면 매우 기분 나빠할 사람이 직장에 가서 설거지를 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사적인 자리에서는 매우 불손한 사람인데도 직장에서는 일이니까 라는 말로 비굴하게 굴고 아부하는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대기업 감투라도 하나 씌워주면 뭐든지 할 사람은 꽤 있어 보인다.
그러니까 똥을 치우는 일을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삼성의 이름을 붙여주고 심지어 월급조차 적게 준다 해도 똥을 치울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이다.
그건 일이니까 그렇다. 우리는 일이라면 뭐든지 참아야 한다는 생각을 거의 상식처럼 가지고 있다. 사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소위 갑질 사태라고 불리는 일들을 일으키곤 한다.
이들은 직업을 가진 사람은 뭐든지 참아야 한다는 잘못된 견해를 가진 나머지, 반대로 자기가 고객이나 상사의 입장에 서게 되면 뭐든지 해도 된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갑질은 재벌 3세만 하는 것이 아니다. 동남아 관광지에 가서 나라 망신을 시킬 정도로 현지 점원이나 유흥업소 직원들에게 갑질을 해댔다는 사람들은 결코 모두 재벌 3세들이 아니다.
이런 직업윤리가 정당화되는 기제는 이렇다. 일단 직업의 세계는 힘든 것이라는 강조가 나온다. 따라서 참을성이 없으면 그 어떤 직업도 계속해 나갈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지적은 옳은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전제 다음에는 그러니까 그것이 일이라면 뭐든지 참아야 한다는 결론이 덧붙여진다.
상사나 고객의 갑질이나 추행이나 비리도 참는 것이 ‘일’의 일부로 둔갑하고 마는 것이다. 일이란 어떤 계약 속에서 노동과 대가를 교환하는 행위로 여겨지기보다는 우리 자신의 삶 그 자체로 이해된다.
이런 극단적 직업윤리는 궁극적으로 인간을 어떤 시스템의 생각 없는 부속품으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따라서 사석에서는 강아지 한 마리 건드리지 못하는 사람이 일이라는 명분만 주어지면 죄 없는 사람들에게 몽둥이를 휘두르거나 간첩으로 누명을 씌우는 일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게 되는 것이다.
마치 그건 “일이니까 하는 것입니다.”라는 말이 모든 일에 대해 면죄부라도 될 수 있는 것 같다. 지금의 탄핵정국에서도 나는 그저 일이니까 했을 뿐이라는 말로 자신에게 면죄부를 주는 사람은 얼마나 많은가.
이런 직업윤리가 유지되기 위해서 전제되는 것은 그것이 설혹 어떤 직업이라 할지라도 남에게 “나의 직업은 이런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 매우 가치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다.
우리는 직함에 매우 민감해서 그런 것을 가질 수 있기를 갈망한다. 한국은 모두가 모두를 되도록 직함으로 부르는 사회라는 것이 이 갈망을 잘 보여준다. 우리는 회사에서는 물론 사석에서도 서로를 무슨 부장님, 무슨 이사님이라고 서로를 부르지 않는가.
서구에서는 사석에는 물론 직장 내부에서도 꼬박꼬박 자기를 직책으로 부르라고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대개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된다.
직업이 중요하다는 말이 틀리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특히 요즘 세상에서 자신의 직업이 뭐다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이 그렇게나 중요한 것일까? 또 말단직원은 24시간 자신이 말단직원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하는가?
이런 태도 때문에 전업주부들은 한국에서 매우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
아무리 조건이 열악하고 힘들며 보람을 느끼지 않아도 사무실에 나가서 일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그를 일하는 사람으로 말하고, 집에서 가정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으면 ‘노는’ 사람이 된다.
심지어 직업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말기도 한다. 같은 사람이 집에서 빨래하고 청소하고 아이를 돌보고 있으면 노는 것이고 그 사람이 유아원에 가거나 호텔에 가서 빨래하고 청소하고 남의 시중을 들고 있으면 그것은 일하는 것이 된다.
이런 한국에서 사람들이 점점 더 결혼도 안 하고 애도 안 낳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회가 그런 것을 수치스러운 것이라고 계속 말하고 있으니, 집에서 일하고 육아를 하는 사람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여자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직업윤리 때문에 남자가 전업주부로 산다고 하면 더더욱 큰 화제가 된다.
그래서 어떤 직업이라도 가져야겠다는 생각으로 무리하게 사업을 시작하거나 직장에서 험한 꼴을 당하거나 사적으로 비윤리적인 요구를 당해도 억지로 참는 남자들이 많다.
직장은 물론 돈에 관련된 것이지만 그것은 ‘돈에만’ 관련된 것이 절대 아니다. 한국에서 그것은 체면과 큰 관련이 있다. 그래서 무급으로 일하거나 자기 돈을 쓰면서 다니더라도 대학교수 같은 직함을 얻어보겠다는 사람은 한국에 아주 많다.
직업에 대한 경직된 태도는 사회의 발전을 막기도 한다. 왜냐면 선구자적인 직종이란 결국 그런 산업이 발달하기 전에는 직업으로 여겨지지 않는 일이었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델컴퓨터가 창고에서 시작했다.’ 같은 말을 듣는다. 하버드를 다니던 주커버그가 페이스북을 만든 이야기도 듣는다.
그들이 성공하기 전에 폼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사회로부터 그런 압력을 강하게 받았다면 그들은 새로운 기업을 일으킬 수 없었을 것이다. 번듯한 직장에 대한 관념은 어디까지나 현재의 관점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결국, 크게 보면 직업에 대한 이런 태도는 사회 전체를 윤리적으로 타락시키고 사람들이 살기 나쁜 곳으로 만드는 효과를 가진다. 그것은 결국 시민들을 직장을 제공하는 재벌회사들이나 자본가들의 노예로 만든다.
그리고 종국에는 사회 전체가 그렇게 된다. 모두가 한 개인으로서 인간으로 살아가기보다는 직장의 노예와 부속품에 머무른다면 점점 더 그렇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명함 주고 월급 주면 법이고 윤리고 상관없이 뭐든지 하겠다는 사람으로 넘쳐나는 사회가 과연 어떤 곳으로 나아갈 것인가.
우리는 어떤 것이 가치 있게 사는 것인가에 대해 여러 가지 견해들을 가질 수 있다.
전통적인 선입견 때문에 이미 낡은 것이 되어버린 가치를 서로에게 강요하는 일을 지속하고 그로 인해 사회 전체가 썩어가게 되는 그런 일은 없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의 낡은 직업윤리는 그런 것의 예가 되는 것이 아닐까?
원문 :나를 지키는 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