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가 희끗희끗한 두 분이 상담을 하러 오셨다. 그중 한 분은 오른쪽 발에 의족을 착용하고 계셨고, 조금 의기소침 해 보였다. 그 옆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비슷한 연배의 다른 분이 함께 오셨더랬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서 법률지원을 요청해 온 사건이었는데, 의족을 착용하신 지체장애인분이 사건의 당사자였다.
머뭇머뭇하시면서 며칠 전 있었던 일을 말씀해주셨다.
제가 제법 좋은 직장을 다니다가 한 십 년쯤 전에 직장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퇴근하는 길에 택시랑 부딪혔어요. 그 사고로 제 오른쪽 무릎 윗부분을 잘라냈죠.
말씀하시면서 오른쪽 다리에 착용 되어 있는 의족을 보여주셨다. 허리에 띠를 하고 남아있는 다리 부분에 의족을 단단히 고정시킨 모습이었다. 그 끈에는 소켓형의 의족을 볼트와 너트처럼 끼워서 착용하고 계셨다.
한순간에 중증지체장애인이 되다니 정말 속상했지요. 그래도 살아야 하니 의족이 좀 익숙해지고 다시 새 직장을 알아보면서 여기 취직하게 됐어요.
새 직장은 서울의 한 아파트 종합관리 주식회사였다. 그 회사에서는 이 분을 서울 소재 어떤 아파트의 경비원으로 근무하도록 했다.
2010년도 연말인데 눈이 엄청나게 오더라고요. 통상 경비원은 눈이 그렇게 많이 오면 아파트 어린이 놀이터에 눈이 쌓이지 않도록 구석구석 쓸어 놓습니다. 애들이 놀다가 다치면 안 되니까요. 그런데 어찌나 미끄럽던지 놀이터에서 그만 넘어진 거예요. 피가 나더라고요. 그것까진 괜찮았는데 하필 이 의족도 부서지지 뭡니까.
그러니까 당사자는 경비원으로 제설작업을 하던 중 미끄러져 넘어지는 사고를 당했는데, 왼쪽 무릎은 다쳐서 피가 나고, 오른쪽 무릎의 의족은 부서진 것이었다.
의족이 생각보다 많이 비싸서 제 월급으로 고치지를 못해요. 그래서 일하다 다친 것이니 사고 나고 한 달쯤 있다가 근로복지공단에 양쪽 무릎에 대한 산재신청(요양급여신청)을 했죠.
보름 정도 지났나? 근로복지공단에서 연락이 왔더라고요. 황당하게도 ‘살이 붙어있는 멀쩡한 무릎만 산재’라는 거에요. 이쪽은 살이 아니고 기계니까 알아서 제 돈 주고 고치라는 거죠.
나란히 붙어있는 무릎을 ‘피부가 덮고 있냐? 아니냐?’고 이렇게 차별하다니 어이가 없고 억울했다고 한다. 그때, 옆에 함께 오신 분이 강한 어투로 입을 여신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게 어디 있습니까? 일하다가 다친 거면 잘 치료받게 해줘야지 살갗이 없다고 의족은 알아서 고치라니. 이런 건 차별 아닙니까?
알고 보니 그분은 당사자와는 아무 관계도 아닌 같은 아파트 주민이셨다. 오며 가며 얼굴 보고 인사하던 사이인데, 이런 일을 당했다는 것을 알고 나서 같이 분기탱천하여 소송이라도 불사하자고 계속 힘을 실어주신 분인 것이다.
같이 ‘분기탱천’하던, 오지랖 넓을 뿐인 그 사람
법무법인 태평양과 재단법인 동천은 이 사건을 공익사건으로 수임했다. 법적으로 산업재해로 인정받으려면 ‘신체’에 ‘부상’을 입어야 한다. 결국 이 소송은 ‘의족 파손’이 ‘신체 부상’으로 법해석 될 수 있냐의 문제였다. 이미 1심과 2심에서 모두 패소한 상태였기에 더욱 치밀한 고민이 필요한 사건이었다.
일단 앞선 판결문을 검토해 보았다. 1심은 ‘의족’이란 것이 뺐다 끼웠다(탈부착)할 수 있는 것이기에 신체 일부라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2심 판결문에는 한술 더 떠서 ‘부상을 수반하지 않는 의족만의 파손’은 부상이 아니라고 했다.
당사자와 함께 오신 분은 이 내용을 설명하면서 한껏 열을 내셨다.
아니, 변호사님! 무슨 판결이 이렇습니까? 2심 판결에 의하면 의족이 부서지면서 그 주변 살이라도 같이 까졌다면 산업재해이고, 의족만 부서진 거면 산업재해가 아니라는 건가요? 정말 이해가 안 가요.
그렇다. 이런 판결은 꼭 바꿔야 한다! 용기가 났다. 출산예정일을 이틀 남기고 책상에서 꼬박 16시간 동안 공들인 상고이유보충서를 제출하면서 이분들의 용기가 재판부에 꼭 전해지기를 간절히 바랐다.
한 사람의 ‘오지랖’이 수많은 지체장애인의 권리를 지켰다
그렇게 1년을 넘게 기다려 마침내 대법원은 이 사건 원심판결을 파기환송했다.
대법원은 원심판결의 근거를 대부분 배척하며 ① 산업재해보상보험법상 ‘신체’를 반드시 생래적 신체에 한정할 필요는 없고, ② ‘의족 파손’을 업무상 재해로 보지 않을 경우 장애인 근로자에 대한 보상과 재활에 상당한 공백을 초래하며, ③ 신체 탈부착 여부를 기준으로 요양급여 대상을 가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할 수 없고, ④ 의족 파손을 업무상 재해에서 제외한다면, 사업자들로 하여금 의족 착용 장애인들의 고용을 더욱 소극적으로 만들 우려가 있으며, ⑤ 의족은 단순히 신체를 보조하는 기구가 아니라 신체의 일부인 다리를 기능적. 물리적. 실질적으로 대체하는 장치로 봐야 한다고 판결한 것이다.
이 대법원 판결은 2015년 최우수 판례에 여러 차례 꼽힐 만큼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감격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가슴이 철렁했다. 이 사건은 애초에 당사자가 소송까지는 생각하지 않은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사건 초기 당사자 주변의 대부분 사람들이 ‘재수가 없으려니 하고 잊어!’ ‘더 안 다친 게 어디야?’라는 식으로 반응했다고 한다.
그런데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보던 한동네 주민의 ‘오지랖’이 당사자에게는 소송으로 나서는 용기가 되었고, 그 결과 수많은 다른 지체장애인의 권리도 신장될 수 있었던 것이다.
오지랖은 귀찮고 피곤하다. 나 살기 바쁘고 빡빡한 세상이라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가끔 내 마음속에 ‘이건 아닌데’ 싶을 때 발동하는 ‘동조와 협력의 오지랖’이, 상대방에게는 의외로 큰 용기와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갈수록 개인이 파편화되어 ‘각자도생’이라는 슬픈 화두가 관통하는 요즘, 내 주변 누군가에게 헌사할 ‘연대의 오지랖’은 무엇일지 잠시 생각해 보는 것도 꽤나 즐거운 상상일 것이다.
원문: 조우성 변호사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