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강의 중에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배달의 민족은 수평적인 조직문화를 가진 것 같다고 하셨다. 그런데 배민의 조직문화를 보니 ‘9시 1분은 9시가 아니다’라고 적혀있다. 그럼 수평적이 아니라 뭔가 강압적이고 딱딱한 분위기인 것 아닌가?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사람들이 몇 가지 개념을 혼동해서 사용하거나 헛갈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수평적 조직문화 vs. 수평적 조직구조
이전에 「수평적 조직문화가 꼭 좋은 걸까?」라는 글을 썼을 때에도 질문을 받았는데, 결론은 조직’문화’와 조직’구조’를 혼동한 것이었다. ‘수평적’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곧바로 조직의 계층이 없거나 단순화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물론 직급 상관없이 모두 ‘~님’ 혹은 영어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요즘 유행이기도 하다. 하지만 수평적 조직 ‘문화’와 수평적 조직 ‘구조’는 엄연히 다른 이야기다. 자꾸 우려먹어서 미안하지만, 송파구에서 일 잘하는 방법 2번째에 이렇게 적혀 있다.
업무는 수직적, 인간관계는 수평적
수평적 조직문화는 의사결정을 다수결로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착각하지 말자. 우리나라는 민주주의 국가지만, 회사의 의사결정은 민주주의를 따르다간 산으로 가기 십상이다. 나라도 가끔 산으로 가는데 하물며… ‘아’ 다르고 ‘어’ 다른 이야기지만, 수평적 조직문화란 그 의사결정의 과정에 여러 사람들의 의견들이 직급에 상관없이 충분히 논의되고 반대 의견도 묵살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 너희들은 깊게 알 필요 없고 일단 내가 하자는 대로 하자.
이런 게 아니라는 뜻이다. 팀의 의사결정 과정에 팀원도 충분히 참여할 수 있다. 팀원의 의견이 무조건 채택된다는 뜻이 아니라, 반대 의견을 말할 수 있고 반대했다는 이유로 불이익을 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결국 의사결정은 의사결정자가 내린다. 왜냐하면 그가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민주주의가 불가능한 이유는, 여러 사람들이 민주적으로 책임을 나눠서 질 수 없기 때문이다.
조직’구조’의 층이 몇 단계 없는 경우에도 충분히 수직적 조직’문화’일 수 있다. 창업자 한 명과 팀원 4~5명이 있는 조직을 생각해 보자. 직급이 두 단계밖에 없는 얼핏 보면 (상대적으로) 수평적 조직구조로 보일 수 있지만 창업자의 일하는 스타일(성격)에 따라 조직문화는 한없이 수직적일 수 있다.
반면에 수직적 조직’구조’를 가지고 있더라도 충분히 수평적 조직’문화’를 가질 수 있다. 수평적 조직문화를 가진 것 같다고 생각하는 회사들을 떠올려보고 그 회사들 조직도를 한번 찾아보라. 회사에 따라 찾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막상 찾고 나면 조직도 자체는 일반적인 조직과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실제로 직급 단계가 없는 수평적 조직’구조’의 회사들도 물론 존재한다. 팀장, 심지어 사장을 매년 직원 투표로 뽑는 곳도 존재한다.
하지만 수평적 조직’문화’라는 단어는 그런 회사를 생각하며 쓰는 용어는 아니다. ‘수평적’까지만 듣고 곧바로 ‘위아래 없음’을 떠올리지는 말자. 그럼 어떤 문화가 자율적인 조직문화일까? 자율적 조직문화는 크게 두 가지 요소에서 판가름난다.
1. 우선 ‘원칙’의 문제다
많은 사람들이 원칙이 엄격한 회사를 자율적이지 않은 회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의 많은 회사들이 자율적이지 않은 이유가 회사에 원칙이 너무 많고 엄격해서라고 보는가? 우리 회사의 원칙이 무엇인지 제대로 기억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자율적이지 않은 회사의 특징은 원칙이 아닌데 지켜야 하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 상사가 퇴근하기 전에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 상사가 회식하자고 하면 선약을 취소하고 무조건 참석한다.
- 공식적인 팀 미팅 자리에선 절대 상사의 의견에 반박하지 않는다.
- 미팅할 때 임원분들은 생수병을 가져다 놓는다.
- 심지어 임원마다 생수 취향도 있다.
- 하다못해 점심 메뉴도 상사 눈치를 보며 고른다.
그 어느 회사도 이런 것을 원칙으로 지정해 놓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 어떤 문구로 적혀있는 원칙보다도 훨씬 더 칼같이 지켜진다. 원칙도 아닌데 눈치껏 지켜야 하는 것이 너무 많다 보니 당연히 자율적이지 않고 회사생활이 하루종일 눈치만 보다가 끝난다.
이런 분위기가 더 심해지면 과다한 의전으로 흐른다. 높으신 분들의 편의를 위해 아랫사람이 무슨 집사처럼 상사의 동선부터 시작해서 온갖 것들을 챙긴다. 군대에서는 원스타 아들 과외 시켜 줬다는 병사도 심심찮게 찾을 수 있는데 회사에는 없는지 모르겠다. 의전 또한 회사의 원칙으로 박혀있지 않다. 의전을 받는 사람, 하는 사람 모두 늘 그렇게 하다 보니 당연한 듯 생각할 뿐이다.
그래서 ‘상사가 원하는 것을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하는 사람’이 무섭다. 물론 상사가 챙기지 못한 일들을 알아서 챙겨주는 부하는 상사에게 이쁨받고 실제로 팀의 업무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업무에 필요하지만, 미처 챙기지 못한 일이 아니라 ‘상사가 차마 말은 못 하지만 부하가 알아서 해줬으면 하는 일들’은 어떨까?
그룹의 비리가 적발되어 총수가 수사를 받는다고 하자. 총수는 백 프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모르고, 경영진들이 알아서 한 일’이라고. 그럼 국민들은 ‘그럴 리가 있나?’ 생각하지만, 나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미 ‘총수가 말하지 않아도 총수가 원할만한 일들을 하는 사람들’이 경영진까지 올라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총수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시킨 적도 없다. 과도한 충성이 그렇게 했을 뿐.
실적이 안 좋아지면 회장이 시키지 않아도 인사담당 인원이 알아서 임금을 동결(혹은 삭감)하고 구조조정을 실시하겠다고 보고한다.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회장은 시킨 적 없다고 발뺌한다. 윗사람의 눈에 들기 위한 과도한 충성은 조직 전체를 병들게 한다. 그리고 그 칼은 언젠가 그런 조직문화를 만든 바로 그 윗사람에게 돌아가게 되어있다.
흥분해서 잠시 옆으로 샜지만, 자율적인 회사는 원칙을 느슨하게 지켜도 되는 회사가 아니라 원칙은 반드시 지키되 원칙으로 정해지지 않은 부분에서 눈치 볼 필요가 없는 회사다. 원칙을 대충 지켜도 되는 곳은 회사가 아니라 동아리다.
그런데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만 보면 이런 생각으로 빠지기 쉽다. ‘서로 호칭을 님(혹은 영어 이름)으로 통일한다 → 회사에서 반바지를 입어도 된다 → 출퇴근 시간이 자유롭다 → …’ 이렇게 하다 보면 점점 ‘회사에서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로 생각이 수렴한다.
‘원칙은 있지만 나는 이러이러한 사정이 있으니까 이번엔 이렇게 해도 되겠지’ 생각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원칙이 있는 것이고, 원칙이 있어야 최소한의 조직이라는 것이 유지되는 것이다. ‘회사에서 내 마음대로 한다’는 자율적인 회사가 아니라 개판 오 분 전 회사다. 아님 회장 아들이거나… (회장 아들이 아니라 회장 본인도 그렇게 하면 안 된다!)
2. 두 번째는 ‘권한’의 문제다
규모가 있는 대부분의 조직은 피라미드형으로 생겼고, 여러 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단순하게 생각해봐도 제일 아래층 (사원~대리급)이 있고 중간관리자 (과장~부장급), 그리고 경영진 (임원 이상)이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포지션마다 ‘권한과 책임(R&R, Roles and Responsibility)’이 명확하지 않은 편이다. 비교하고 싶다면 링크드인에 들어가서 미국의 채용공고를 보면 된다. 같은 ‘마케터’를 뽑는다고 해도 우리나라는 주로 어떤 경력이 있고 무엇을 할 줄 알아야 하는지 ‘스펙’을 위주로 채용공고를 한다면, 미국의 채용공고는 이 사람이 무슨 ‘역할’을 해야 하고 무엇을 결정할 ‘권한’이 있는지가 주로 적혀있다.
우리나라 조직들도 물론 중간관리자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중간관리자의 상사가 그 결정에 간섭한다면 어떻게 될까? 예를 들어, 당신이 마케팅팀장이고 주어진 마케팅 예산 안에서 뭔가 안을 구상했는데 당신 위의 임원이 그 안에 반대한다면? 물론 타당한 이유가 있다면 당신의 안에 반대를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정도 수준이 아니라 애초에 당신이 안을 만들기도 전에 그 임원이 매번 당신에게 이렇게 이렇게 하라고 사전 지시를 한다면 어떡하겠는가?
이와 같이 피라미드의 수평적 관점에서 업무의 영역과 권한이 어디까지인가의 문제와 별도로, 피라미드의 수직적 관점에서 어디까지 결정에 간섭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있다. 이 수직적인 범위를 관리의 폭(span of control)이라 한다.
어떻게 보면 위임의 문제 같기도 한데, 위임과 관리의 폭이 다른 점은 위임은 ‘원래 팀장의 업무인 것을 아랫사람에게 맡긴다’는 의미에 가깝고 관리의 폭은 ‘원래 아랫사람의 권한인 것을 스스로 결정 내릴 수 있도록 존중하는가’의 문제이다. 보통 관리의 폭은 자기보다 한두 레벨 정도 아래까지가 정상이다.
그런데 이 폭이 비정상적으로 넓은 조직이 많다. 임원이 주임, 대리를 앉혀다 놓고 깨는 회사가 바로 그런 곳이다. 관리의 폭이 비정상적으로 넓은 경우를 마이크로 매니지먼트(micromanagement)라고 하는데,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의 아티클 중 마이크로 매니지먼트를 조직의 암으로 규정한 글이 있다. 왜 마이크로 매니지먼트가 좋지 않을까?
- 일을 주도적으로 하지 못하고 시키는 일만 하다 보니 조직원의 사기를 떨어뜨린다.
- 일이 잘못되었을 때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시킨대로 한 것일 뿐 vs. 제대로 시켰는데 실행을 잘 못해서)
- 그래서 작은 일부터 결정을 내리고 책임지는 연습을 할 기회를 박탈하기 때문에 리더를 키워낼 수 없다는 점이다.
수평적 조직문화에서는 물론 관리의 폭이 좁아야 한다. 폭이 넓어지면 실무와 거리가 있고, 전문성이 떨어지는 저 윗사람이 가장 전문성이 필요한 일들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수평적으로 무엇이 옳은지만 놓고 판단한다면 윗사람이 이길 리가 없지만, 직급으로 붙으면 반대로 윗사람이 질 리가 없다.
관리의 폭을 줄이자는 것은 너무나 상식적인 말인데, 어느 순간부터 잡스 때문에 CEO가 디테일에 집착하는 것이 쿨해 보이게 되었다. 물론 CEO가 디테일에 집착하는 것이 필요하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은 잡스만 한 전문성과 인사이트를 CEO가 갖췄을 때의 이야기다. ‘실행의 속도’를 강조하는 린 스타트업 이야기는 꺼낼 것도 없이, 디자이너가 무슨 차를 그려도 결국엔 크롬 장식이 덕지덕지 붙어서 출시되던 모 자동차를 떠올려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자율적 조직문화를 위해서는 관리의 폭을 좁혀야 하는데, 문제는 이건 윗사람의 스타일에 의해 좌우된다. 임원이 와서 내 일에 터치하는데, ‘이건 제 업무인데 왜 간섭하십니까?’ 할 수 있는 대리는 거의 없다. 온 회사를 들쑤시며 다니는 경영진이 있다면 반드시 조직 차원에서 조율(경고)해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은 자기가 회사의 모든 것을 챙기고 있고, 자기가 없이는 회사가 제대로 안 돌아가는 영웅이라고 스스로 생각할 것이다.
마무리하며
다소 두서없던 글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 수평적 조직문화는 수직적 조직구조에서도 가능하다. 단, 그러기 위해선 조직 차원에서 관리의 폭을 잘 관리하고 위임의 조직문화를 만들어야 하며, 의사결정 과정에서 충분히 팀원들의 의견을 들어주는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한다.
- 수평적 조직은 원칙이 없는 곳이 아니다. 반대로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는 곳이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이 조직의 원칙이고 무엇이 ‘눈치’인지 구분하고, ‘눈치’로 지켜야 하는 것들을 하나씩 없애 나가야 수평적 조직문화에 다가갈 수 있다.
원문: 장영학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