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우울증일까 의심하곤 하는 사람은 실제로 경미한 우울증을 앓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비록 의학적으로 인정되는 우울증의 수준은 아니라 해도, 무기력, 입맛 없음, 집중하기 어려움, 일상에의 흥미 감소는 모두 우울증의 전조다. 평소에 아무런 힘 들이지 않고 하던 일상이 버겁게 느껴진다면, 당신은 우울증의 입구에 들어섰다고 봐도 좋다.
놀랄 것은 없다. 경미한 우울감과 아슬아슬하게 통제를 벗어나지 않는 감정의 기복은 현대인들 모두의 질병이다. 나의 경우는 나라는 인간의 쓸모에 대해 생각할 때 우울해진다. 나를 다독이고 위로할 방법을 찾아낼 때가 가끔 있다. 작지만 의미 있는 일들을 끝냈을 때 나는 쉽게 나를 위로한다. 이렇게 눈앞에 닥친 일들을 조금씩 헤쳐 나가자고, 인생이란 게 그보다 더 거대하고 위대한 무엇이 아니라고, 성실하게 한 발 한 발 걸어나가는 일의 중요함을 마음에 새긴다.
그러나 이 냉혹한 상대평가의 세계에서 그런 낙관은 오래가지 않는다. 우울은 다시 찾아오고, 나는 나의 모자람에 골몰한다. 이 우울과 기복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만이 위로가 되던 어느 날, 우연히 읽게 된 기사 하나가 우울의 늪에서 빠져나갈 실마리를 던져주었다.
어느 암 환자의 ‘마지막 잎새’
기사는 페이스북에 자신의 암 투병기를 올렸다가 유명해진 한 여성의 이야기였다. 유방암 2기 판정을 받고 유방절제술을 받았던 그녀는 그로부터 1년 뒤, 그간 받은 항암 치료가 효과가 없었으며 앞으로 살날이 2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선고를 받는다.
그런 선고를 받는 암 환자들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절망을 그녀 역시 맛보지만, 그녀는 조금 다른 선택을 하기로 한다. 절망을 껴안고 남은 시간을 이제까지와 마찬가지로 평범하면서 행복하게 살아가기로 한 것이다.
죽음을 준비하는 그 여정이 생각보다 정적이지 않다는 게 많은 사람의 이목을 끌었다. 매해 해오던 파티를 그대로 강행하고, 술 좋아하는 사람답게 매일 조금씩 술을 마셨으며, 부상의 위험이 있는 격렬한 로데오도 마다하지 않았다. 문신을 하는가 하면 친구들을 모아 삭발식을 열기도 하고, 항암 치료 일정을 조정해 좋아하는 밴드의 콘서트와 풋볼 경기에도 갔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그녀를 유명하게 만들었던 건 네 살짜리 딸을 위해 그녀가 쓰고 있던 카드였다. 그녀는 그녀 없이 맞을 딸의 생일날과 첫 생리일, 반려동물이 죽었을 때와 학교에 처음 등교하는 날처럼 특별한 날 딸에게 전달될 스무 장의 카드를 썼고, 그 이야기가 SNS를 통해 알려지며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헤더의 딸이 스물한 번째 생일에 받게 될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드디어 술을 마실 수 있게 되었구나. 부디 술 때문에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지 않았으면 좋겠어. 하지만 오늘만큼은 마음껏 축하하고 술집 카운터 위에 올라가 춤도 춰보렴.”
죽음을 앞두고 절망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으며 딸에게 편지를 남기는 그녀의 사연은 미국은 물론 세계 언론들에 대서특필됐다. 언론의 관심은 책 작업으로 이어졌다. 이 책을 쓰는 것이 그녀의 삶을 지탱하게 한 ‘마지막 잎새’였을까. 그녀는 49일 만에 원고를 탈고했고, 출판사에 원고를 보낸 다음 날 눈을 감았다고 한다.
죽음과 마주하는 순간 진짜 삶이 시작된다
죽어가는 암 환자가 주었다는 ‘우울에서 빠져나갈 실마리’란 무엇일까.
우선 암이라는 병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들이 주는 강렬함이 있다. 이를테면 유방암이 조기 발견만 하면 완치가 어렵지 않은 암이라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전이성 유방암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헤더는 암을 비교적 일찍 발견했고 발견 당시의 예후도 나쁘지 않았지만 그녀의 암은 온몸으로 퍼졌다. 심지어 그녀는 가족력도 없었다.
그야말로 불운은 이렇게 예고 없이 삶에 찾아든다. 항암 치료에 대한 그녀의 발랄한 언급들(“그러나 암에게도 나름의 계획이 있었다.”)도 글로 쓰인 이면의 고통이 짐작되어 날카롭게 다가왔다. 이 모든 담담하고도 희망을 잃지 않는 기록들을 남긴 뒤에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 역시 독서를 독서에 머물지 않게 했다.
현재 헤더의 페이스북에 들어가면 볼 수 있는 첫 번째 글. 남편인 제프가 남긴 이 글은
“헤더가 우리 곁을 떠난 지 365일이 되었다”는 내용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이 책이 우울을 경감시킨다면 그건 무엇보다 시간에 대한 우리들의 감각, 별 특별한 일 없는 오늘과 같은 하루가 무한히 반복되리라는, 그 익숙한 감각을 흔들어놓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솔직히 나는 암에 의해 아직 죽지 않은 내 몸의 모든 세포만큼이나 암을 증오한다. 그러나 암에 걸리지 않았다면 이 광란의 주행이 완전히 멈추는 날까지 매 순간 치열하게 살고, 웃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암 환자답지 않은 그녀의 발랄하고 씩씩한 태도의 기저에 이 문장이 있다. 이 문장은 책 속에서 여러 번 변주된다. 그녀는 암 선고를 받고 삶이 강렬해졌다고 말한다. 암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치열하게 살 수 없었을 거라고, 암이 선사한 삶에 대한 독특한 관점이 자신을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입장으로 데려다주었다고 말한다.
암이 자신의 삶을 앗아가는 대신 무언가를 선사하기도 했다는 그녀의 깨달음은 공허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삶이 끝났는데 암이 무언가를 주었든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에게조차 삶은 무한하지 않다. 죽음은 모두를 평등하게 기다리고 있으며 우리는 그 죽음을 의식하게 된 후에야 겨우 삶을 되돌아보지만 이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거의 없기 마련이다.
그녀 역시 암에 걸리기 전까지는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암에 걸리고 난 뒤 남은 삶을 스스로 온 힘을 다해 치열하게 살아냈다. 이러한 그녀의 결단과 실행은 타성에 젖어 있는 우리에게 많은 깨달음을 준다. 오늘은 결코 무한히 반복되지 않는다. 무한이란 없다.
오늘도 우울한 당신에게 이 책을 권하는 이유
우울할 때 최악의 수는 과거를 되짚는 것이라 생각한다. 자기 서사는 원래 만질수록 매끈해지는 법이어서 근원을 파헤쳐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우울의 기원은 끝도 없이 뻗어 나간다.
이 우울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안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내가 바라보는 나와, 나의 삶만이 전부로 보이는 그 상황을 벗어나 나란히 선 타인과 세계의 모습을 끊임없이 지켜보면서 나의 삶을 최대한 객관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럴 때 이 책을 읽는 것이 작은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삶이란 죽음 앞에서 비로소 그 의미가 드러나는 것이지만 매일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삶이란 지속 불가능하다. 하지만 우리는 타인의 경험을 반추함으로써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내게 주어진 삶의 무게와 가치에 대해 다시금 돌아볼 수는 있다.
물론 책 한 권 읽었다고 시시각각 죽음을 강렬하게 느끼는 죽어가는 이의 감각을 유지할 수는 없다. ‘무한히’가 아닐 뿐 일상은 사실 반복된다. 우리는 그 반복 속에서 사치를 사치라 느끼지 못하고 다시 우울에 빠질 것이다.
그럼에도 간혹 그로부터 깨어나는 것은 중요하다. 그 순간은 우리의 잊힌 감각들을 다시 일깨워주며 새로 살아갈 용기를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