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라이트’는 따지고 보면 (첫)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주인공 샤이론과 그의 유일한 친구 케빈. 어느 날 달빛 푸른 바닷가에서 여느 때처럼 장난치고 소소한 대화를 나눈다. 약 기운 때문일까. 둘은 평소에 느끼지 못한 감정에 젖고 순간 선(?)을 넘는다.
그것은 충동이었을까? 장난이었을까?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기댈 곳 없고, 갈 곳 없는 사춘기 두 소년이 서로에게 건넨 잠깐의 위로였을까? 그날 밤 샤이론은 케빈에게 쓸쓸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난 너무 많이 울어서 어쩔 땐 눈물로 변할 것 같아.”
항상 그렇진 않지만, 사랑은 가끔 그렇게 찾아온다. 거창한 전주곡도 없고, 예고도 없다. 정해진 시간도, 장소도, 정해진 사람도 없다. 때로는 피할 수 없는 천둥처럼, 때로는 가벼운 장난처럼 온다. 푸른 달빛 아래, 그날의 샤이론과 케빈처럼.
그래서 모든 사랑은 ‘과거형’일지도 모른다. 미래는 말할 것 없고, 현재의 사랑을 과연 누가 확신할 수 있단 말인가. 돌아봐야 비로소 안다. 사랑이 과거형이 아니라면, 겨우 옷긴 한번 스친 인연을 어떻게 평생 간직할 수 있단 말인가.
샤이론 역시 마찬가지다. 그 한 번의 ‘관계’를 마음속에 간직한다. 그리고 어른이 된다. 어느 날 우연히 걸려온 케빈의 전화. 그날 밤 샤이론의 몸이 먼저 케빈을 기억한다. 케빈을 다시 만난 샤이론은 달뜬 표정으로 고백한다.
“그날 이후로 아무도 없었어.”
그들은 그렇게 다시 만난다
성장 영화라고들 한다. 맞다. 성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라고도 한다. 맞다. 인종 문제를 다룬 영화라고도 한다. 이 역시 맞다. 종합하면 흑인, 동성연애자의, 성장 영화인 셈이다. 그런데 채워지지 않는 공백이 느껴진다. 그 공백은 바로 ‘사랑’이다.
영화는 3분의 1 이상, 혹은 절반 가까이 샤이론과 케빈이 다시 만나는 과정에 할애한다. 케빈을 만나러 가는 길, 차에서는 음악이 흘러나온다. 샤이론의 표정에는 기대감과 망설임이 교차한다. 차에서 내린 샤이론은 옷매무새를 다듬는다. 손님이 뜸한 식당. 둘은 어색하게 다시 만난다. 그리고 케빈은 샤이론을 위해 음식을 만든다. 샤이론의 표정과 몸짓에서 눈길을 떼지 말길.
케빈을 바라보는 샤이론의 표정에서, 어릴 때 샤이론을 돌봐줬던 후안 아저씨의 표정이 읽힌다. 친구 케빈과 함께 유일하게 샤이론의 말벗이 되어주었던 후안. 그는 케빈의 미래(그 동네에서 마약중독자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흑인 소년의 미래)를 알았던 것일까? 수영을 가르쳐주며 샤이론에게 이렇게 말한다.
“언젠가는 뭐가 될지 스스로 결정해야 돼. 그 결정을 남에게 맡기지 마.”
샤이론을 바라보던 후안 아저씨의 훈훈한 표정, 10년 만에 만난 케빈을 바라보는 샤이론의 애틋한 표정. 영화에서 그토록 따뜻하고 섬세하며 부드러운 흑인의 표정을 그려내고 포착한 적이 있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영화에서 그토록 따뜻하고 섬세하고 부드러운 흑인의 대사를 들려줬던 적이 있던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영화는 성 정체성에 관한 영화이자 성장에 관한 영화인 동시에 사랑에 관한 영화지만, 무엇보다 인종 문제를(어떤 흑백갈등도 등장하지 않지만, 흑인을 백인과 똑같은 주인공으로 그려냄으로써) 다룬 영화이기도 하다.
어느 할머니가 말했다는 이 말 한마디는 영화의 메시지를 함축한다.
“흑인은 세상 어디에나 있단다. (…) 달빛 속에선 흑인 아이들도 파랗게 보이지.”
세월은 흐른다. 소년 샤이론(리틀)은 청소년(샤이론)이 되고, 어른(블랙)이 된다. ‘너무 많이 울어서 눈물로 변할 것 같았던’ 샤이론은 이제는 울지 않는 어른이 된다. 영화의 마지막. 샤이론의 눈가에는 다시 이슬 같은 눈물이 맺힌다. 하지만 더는 어릴 때 흘린 눈물이 아니다.
샤이론은 그렇게 진짜 어른이 된다. 비로소 ‘뭐가 될지 스스로 결정할 때’가 된 것이다. 그 결정을 남에게 맡기지는 않을 것이다.
흑인은 세상 어디에나 있다. 모든 사람이 어디에나 있듯. 누구나 상처와 사랑도 있으며 때로는 고통의 시간을 통과한다. 그것을 견뎌내고 기억하면서 어른이 된다. 외롭고 지친 영혼을 위해 잔잔하게 들려주는 ‘달빛 소나타’ 같은 영화다.
원문: 책방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