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봤던 일본 영화 몇 가지를 뒤적거렸다. 〈노래혼〉이라는 영화를 틀어보니 계속 보기에 오글거릴 정도로 과장된 행동을 계속하는 여고생 역의 카호가 나온다. 그러고 보니 〈워터보이즈〉나 〈스윙걸즈〉 같은 영화가 생각난다.
물론 서로 매우 다른 영화로 사람마다 호불호가 다를 테지만 고등학생들을 주인공으로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렇게 일본에는 고등학생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가 많다. 그것은 일본인들이 그만큼 그 시절을 평생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시절로 여긴다는, 혹은 여겼다는 증거가 아닐까?
우리도 과거의 추억에 젖을 때는 종종 같은 시절로 돌아가는 때가 많다. 자기가 좋아하던 대학시절이라던가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다. 장동건은 하이틴 스타였고, 〈학교〉 시리즈처럼 고교 시절을 주제로 한 드라마나 영화가 많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 한국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진정한 고교생 이야기가 실종된 지 오래다.
고등학생이 나온다고 해도 고등학생들이 주가 되어 극이 진행하는 게 아니다. 작년에 매우 큰 인기를 모았던 드라마 〈도깨비〉에서도 여자 주인공은 고등학생이지만 40세에 가까운 공유와 연애한다. 〈응답하라〉 시리즈에 나오는 사람들은 주로 고등학생들이지만 시대가 옛날이다. 문화 콘텐츠를 통해 보이는 20세기 후반이나 21세기의 한국 고교 교실에는 그야말로 조금의 낭만도 남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들은 꿈이 없고 그저 고통스럽고 단조롭기만 한 시대를 사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그들은 시대의 주체가 아니다. 고교 시절이 청춘영화의 꽃처럼 다뤄졌던 것은 다른 무엇보다 어른이 되기 일보 직전이면서 학문적으로, 직업적으로, 사교적으로 미래의 불확실성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초등학생의 첫사랑은 나름 애틋할 수는 있지만 그 사랑이 진짜 연애로 이어지기에는 너무 미래가 멀다. 대학생이나 직장인의 경우에는 이미 인생이 상당부분 결정되어서 어떤 만남이나 결정이 큰 결과로 이어지는 상상력을 펼치기가 어렵다(적어도 전에는 그랬다). 반면 고등학생은 마치 복권 번호를 맞춰보기 직전처럼 과연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흘러갈지 확인하는 때다.
그런데 매체를 통해 보이는 세상에서는 그런 고등학생들의 모습에 요즘 사람들이 별 관심 없다. 이런 현실은 물론 ‘누가 문화 콘텐츠를 소비하는가’에 영향을 받기도 했을 것이다. 베이비붐 세대가 인구적으로 많기 때문에 요즘은 직장인의 희노애락을 묘사하는 영화나 드라마가 더 인기 있는 것이다. 음악만 해도 20세기 음악이 다시 인기를 얻는 복고풍의 프로그램이 많다.
그게 전부는 아니다. 냉정하게 말하면 오늘의 한국 사회는 지금의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걸지 않는다고 말해야 한다. 즉 젊은이 스스로는 물론이고 장년층이나 노년층도 그들이 뭔가 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 것 같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관심이 없는 것이다. 숫자로 작더라도 한국 사회를 완전히 바꿔버릴 그룹이라면 사람들은 기꺼이 그들에게 주목할 것이다.
과거 고교생을 다루는 청춘 영화가 인기를 얻었던 시절 사람들은 세상이 바뀔 수 있으며, 젊은 세대에 의해서 그렇게 된다고 믿었다고 봐야 한다. 서양에서는 1960년대, 한국에서는 1980년대에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대학생들이 데모를 많이 했던 1980년대는 인력부족으로 대학생들이 매우 대접받던 시기이기도 했다. 귀한 몸이니까 세상 보고 이렇게 저렇게 바꾸라고 요구도 했던 것이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매우 무력해 보인다. 어리지만 그다지 큰 꿈을 꾸지 않으며 세상을 확 뒤집어 버릴 의지도 힘도 없는 것 같다. 그저 기성 시스템이 만들어 낸 일자리를 얻어 내고자 긴 줄을 서서는 서로 경쟁하고 싸울 뿐이다. 닭과 달걀처럼 인과문제가 얽혀있지만 이렇게 된 원인 중 하나는 한국 사회의 보수화다.
한국 사회를 나이 든 사람이 꽉 잡고는 젊은 사람을 꼼짤달싹하지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젊은이의 가치가 낮아 보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김대중-노무현 시대가 이명박-박근혜 시대로 전환된 것이 이런 현실을 만든 큰 이유 중의 하나로 봐야 한다. 1987년 6월 항쟁세대의 일부는 세상에게 문을 열라고 요구하고서 자신의 뒤에서 문을 닫아버렸다. 그렇지 않다면 비도덕적 인물이 대통령씩이나 하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사회가 큰 개혁을 거부할 때 가난한 청년이 아무리 일해봐야 아파트 한채를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친구를 절대 이길 수 없다고 할 때 젊은이들은 무기력을 느낄 수 밖에 없다. 한국 사회는 여러모로 일본도 미국도 아니면서 양쪽에서 젊은이들에게 불리한 것만을 모두 짜깁기한 형태가 아닌가 한다.
미국은 훨씬 자유주의적이라서 젊은이들이 어려워도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이 좀 더 있는 나라다. 지금 미국에서 부호로 이름을 날리는 사람들이 대개 자수성가한 사람들이라는 것만 봐도 이점을 알 수가 있다. 굳이 34세인 마크 저커버그를 말하지 않더라도 작가든 연구자든 한 건의 성공으로 인생을 바꿀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은 남아 있다. 적어도 한국보다는 말이다.
미국은 독점을 무섭게 벌하고 징벌적 배상제도를 통해서 대중의 도덕적 감성을 건드리는 기업을 징계한다. 그런데 한국은 대기업이 망하면 한국이 망한다는 이야기만 반복한다. 그러므로 미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갑질이 만연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일본처럼 강한 사회적 융합력을 가진 것도 아니다. 일본은 강한 공동체 때문에 보수성이 비판받지만 굉장히 안락한 국가인 것도 사실이다. 즉 변화할 수 없기에 답답할지는 몰라도 공동체 속 개인이 보호받는 나라인 것이다. 그런 나라에서 젊은이들은 답답해도 안전하다. 마치 이것저것 간섭하지만 그래도 돌봐주기는 하는 고집 센 부모를 둔 느낌이랄까.
사실 미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살아본 나 같은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미국에서 일본으로 옮기는 것은 마치 야만적 사회에서 문명국가로 이사 가는 느낌이 드는 면이 있다. 미국은 자유롭지만 보호받는 느낌이 없고 시스템이 엉망으로 엉켜있다는 느낌이 강하다. 대표적으로 의료체계가 그렇다. 식당의 웨이터나 택시운전사는 매우 불친절해서 일본의 그것과 비교하면 너무 격차가 크다. 한국은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
젊은이들에게는 미국식의 자유주의를 말하지만 여기저기에서 혈연을 강조하고 인맥을 강조하는 것이 한국이다. 저 일본조차 한국의 재벌처럼 세습으로 거대회사가 운영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강력한 사회적 공동체가 새로운 젊은이들을 돌봐주지도 않는다. 명문대학에 들어갈 정도로 자기 재능을 보였는데도 취업과 학비를 걱정하는 일이 대부분이라는 것은 사회적 공동체가 무너졌다는 증거로 봐야 한다.
최순실의 딸 정유라를 보라. 그녀 하나 제대로 키우겠다고 나라가 무너질 정도다. 반면에 애들이 태어나질 않아서 큰 문제라고 난리가 나도 겨우 애들 급식문제 가지고 나라 망한다고 집권당에서 난리를 피웠다. 최순실 집안 하나 먹여살리는 돈의 극히 일부만 있어도 다 하고도 남을 것 같은데 말이다.
4대강 공사하면서 쓰고 그 후속조치 한다고 쓰는 돈이 엄청나다는 것만 봐도 그렇다. 돈은 엄청나게 쓴다. 박근혜 정권 들어와서 만들어진 재정 적자가 이미 100조를 훨씬 넘었다. 그런데도 한국은 젊은이들이 공부해서 어느 정도 자신이 재능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도 빚까지 내가면서 공부해야 한다.
이제는 젊은이들이 약간 생기가 돈다고 느낀다. 이유는 간단하다. 정권 교체 때문이다. 촛불집회에 중·고등학생들까지 나와서 구호를 외치자 사람들은 고등학생이 새삼스레 존재감 있게 느껴졌다. 기성시스템이 무너지고 젊은이들이 모여서 힘을 내면 젊은이들을 무력하게 만들어 왔던 벽이 무너질 것도 같이 보였다.
그 모든 정국을 만들어 낸 큰 원동력 중 하나가 이화여대 부정입학 문제였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 나라에 중장년층만 있었다면 탄핵정국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런 현실이 안타까웠다. 아이들이 꿈과 이상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구질구질한 것과 싸워야 한다는 게. 제발 그 구태가 전부 사라지고 꿈꾸는 것이 아름답게 그려지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다시금 청춘영화를 즐기는 시대로 돌아가지 않을까? 반드시 젊은이만 위한 것이 아니다. 노인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젊은이들이 일찍 노인처럼 행동하는 사회에서 노인들은 자신의 늙음을 감당할 수가 없다. 젊은이들은 노인들의 보배다. 그걸 잊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보수라면 보수라도 젊은이들을 사랑한다.
원문 : 나를 지키는 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