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태극기 집회를 분석해보기
그들은 지금 매우 당황한 상태이다. 그들의 말은 거칠고, 그들의 행태는 위험하지만 당혹스럽기에 그러는 것이다. 그들은 황급히 집회를 조직했고, 각양 국기를 들고 나왔고, 군복을 입고, 쇠파이프를 들고, 계엄령을 부르짖는다. 일당을 얼마를 받았느니, 왜 3.1절에 성조기를 들고 나왔느니를 분석하는 것은 하등 의미가 없다.
“박근혜는 무척이나 깨끗하며 유일무이하게 청렴한 대통령이다!”
“군대는 뭐하는가, 계엄령을 선포하라!”
“자유 대한을 공산주의의 위협 가운데 분쇄하겠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단지 손석희와 Jtbc 그리고 국회의 악랄한 합작품에 불과하며 모든 죄는 최순실에게만 있다고 주장한다. 숱한 의혹과 숱한 증거와 숱한 합리적 기소 이유에 대한 정상적인 답변을 찾아보긴 힘들다. 대통령 변호인단은 헌법재판소에서 합리적인 논증을 하기보다는 태극기를 몸에 걸치는 퍼포먼스에 집중하거나 집회 현장에 나와서 본인을 혁명가로 소개하면서 책을 파는데 열심이다.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외치면서 군대의 개입을 요구하거나 김정남 피살을 두고 흥분하는 것 역시 인과 관계 따윈 깡그리 무시되어 있다. 논리적이거나 합리적이지 못한 것은 원래 그랬다 치자. 심지어 이들은 계산적이지도 못하다. 집회 현장에서는 이명박과 새누리당을 욕하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데 그나마 연단을 채우는 국회의원들은 모조리 자유한국당 출신들이다.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사람들조차 거리를 둘 수밖에 없는 행태를 무차별적으로 벌이고, 집회가 있는 주말이면 서울 중심부 곳곳의 도서관과 편의점을 쓰레기장으로 만들면서도 무엇으로 인해 스스로가 고립되고 있는지 판단조차 서지 않는 모양새다. 이 현상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반이성적이며 합리적이지 못한 ‘광기’?
그럴듯해 보이지만 결국 현상을 뭉뚱그린 표현에 불과하다. 해석하지 못했음을 자인하는 꼴이다. 태극기 집회와 같은 현상은 역사를 돌아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빈번하다. 프랑스 혁명 당시 왕당파의 편을 들며 반혁명의 결사대 노릇을 하던 농민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작금의 상황에서 끝내 박근혜 대통령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박정희 시대에 청춘을 보냈으며, 박정희 시대를 유토피아로 알고 있는 조국 근대화의 세대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 ‘부득이하게’ 헌법을 뜯어고쳐서 ‘한 번만 더하겠다’라며 삼선개헌(1969)을 시도할 때도 그들은 65.1%가 찬성표를 던졌다. 몇 년 후 기존 헌법과 정상적인 정치 활동이 중단된 유신체제를 만들 때도 무려 91.5%가 찬성표를 던지지 않았던가. 그들의 청춘은 투표를 통해 독재를 승인했고, 그들의 노년은 역시 투표를 통해 구시대의 유산을 현재의 권력으로 부활시키지 않았던가.
그들이 보기에 대통령이 꼼짝할 수 없고, 김기춘이 끌려 들어가며, 심지어 자신들이 이룬 조국 근대화의 상징인 재벌 3세의 구속이 벌어지고 있으니 어찌 감당할 수준이겠느냐는 말이다. 오늘 보편 다수 대중이 보기에 태극기 집회가 매우 기형적일지 모르겠으나 그들의 역사적 맥락에서는 지극히 합리적인 결론이며 긴급 상황에 걸맞은 결단이리라.
애초에 인간은 합리적이지 않고 군중은 맹목적이다
사람은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맹목, 절반의 진실, 환상, 합리화로 스스로를 포장한다. (중략) 사회의 입장에서는, 그 사람이 공식적 사회통제에 따르기만 한다면, 즉 어떤 처지인지를 알려주는 암시와 단서를 그가 알아차리고 지키기만 한다면, 성원들이 안락함, 우아함, 고결함으로 스스로를 재량껏 치장하는 데 아무런 이의가 없다.
- 심용환, 『헌법의 상상력』, 228쪽 간접인용 ‘어빙 고프만의 상호작용 의례’
사회학자 어빙 고프만(Erving Goffman)이 보기에 모든 인간은 ‘사회적 만남(social encounters)’ 가운데 존재한다. 따라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처신’이며 동시에 ‘평가’다. 모두가 타인을 통해 자신을 본다. 타인이 자신을 긍정적으로 봐주기 위해 모범적으로 처신하며 이를 통해 좋은 평가를 얻고자 한다.
개인이 그렇듯 사회도 마찬가지다. 포장되지 않은 독재 권력은 존재하지 않으며 합리화되지 않은 순응은 없다. ‘조국 근대화’, ‘한국적 민주주의’는 박정희 정권의 입장에서는 장기집권을 위한 가장 중요한 명분이었을 것이고 동시에 그 시대를 지지한 청춘들에게는 자신들을 합리화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가치일 것이다.
인간은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으로 사고하지 않는다. 다만 이성적으로 보이길 원하고, 합리적인 척할 뿐이다. 따라서 진정성을 갖고 삶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적당한 범위 내에서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면 그만일 뿐이다. 그것이 독재 권력이든 정경유착이든 말이다.
그런데 심각한 위기가 생겼다. 본인들을 지탱할 수 있는 근거가 송두리째 뽑혀나가고 있지 않은가.
인간은 고립되어 있을 때는 교양 있는 개인일지 모르나, 군중 속에서는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야만인이다. 그는 자발성, 폭력성, 잔인성 및 원시인들의 영웅주의와 열광을 갖고 있다. 그는 말과 이미지에 의해 쉽게 감동을 받아 원시인들을 더욱더 닮아가는 경향을 띠고, 그의 가장 분명한 이해관계에도 피해를 입히는 행동을 하게 된다.
- 앞의 책, 230쪽 간접인용 ‘귀스타브 르 봉의 군중심리학’
문장의 요지를 오독하면 안된다. 귀스타브 르 봉(Gustave Le Bon)은 원시인들을 무시하기 위해 이 글을 쓴 것이 아니며 또한 촛불 혁명을 이끄는 시민적 역량을 폄하하고자 함도 아니다. 중요한 사실은 19세기 프랑스의 혁명적 분위기와 대중사회의 위험성을 경고한 르 봉의 통찰이 태극기 집회가 절정에 달한 한국사회와 직접적으로 맞닿아있다는 점이다.
르 봉이 보기에 인간은 치명적인 결함을 가진 존재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개인으로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언제나 집단적인 힘으로 등장하는데 집단화된 인간인 ‘군중’은 안타깝게도 ‘맹목적인 집단’이다. 르봉이 보기에 군중은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의 말을 경청’하며 이에 본능적으로 순종한다.
더구나 르 봉이 살았던 19세기와 같은 시대. 급격한 사회 변동의 과정 한가운데서 군중은 극적으로 맹목성을 드러낸다. 혁명의 이상을 추구하건, 왕당파가 되던 중요한 사실은 이제 사람들은 흥분했고 무엇인가를 숨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며 보다 정확하게 스스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차이가 하나 있다. 이상주의자들은 이념과 가치라는 방향성에 의해 규제를 받는다면 그렇지 않은 이들은 다만 의도한 결과만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소 추하고, 다소 폭력적이더라도 그들은 스스로 기뻐하며 만족감에 도취될 것이다.
빈 공간에 많은 것을 채워 넣을 때 태극기 집회는 사라진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집시법이나 도로교통법 혹은 경찰의 적극적인 행정 조치를 통해서 태극기 집회의 거친 분위기는 충분히 수습 가능하다. 적어도 당장의 수준에서는 그렇기 때문에 경찰에 대한 적극적 요구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은 군부를 두려워하고 기득권 세력의 조직적인 반동에 대해 겁내지만 너무나 오랜 기간 정치권력과 군대는 별도로 존재했고, 한국의 기득권 세력은 유착에는 적극적일지 모르겠지만 그 이상의 유능함은 없다. 더구나 그들에게는 방향도 미래도 그럴싸한 차기 정치지도자도 없다. 이 지점에서 그들의 정치적 입장을 존중하거나 연정을 제안하는 것은 참으로 쓸모없는 정치수이다.
방향은 어디인가. 탄핵과 처벌은 시작에 불과하며 정권교체 역시 보다 장대한 시작에 불과하다. 무엇을 꽉 채워서 태극기 집회 같은 야만스러운 현상을 소멸시킬 수 있을까. 그들과 반대편에 있는 대통령 하나를 뽑는 것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재벌해체 다음은 무엇일까. 스웨덴 같은 타협구조를 만들 것인가, 타이완 같은 독립모델을 구축할 것인가. 경제민주화의 궁극적 목표는 무엇인가. 고도의 복지국가 건설? 아니면 구체적인 경제 모순 타파? 단죄가 아닌 대안 사회를 향한 각종 민주주의적 요구들이 세상을 꽉 채워야 할 것이다. 그것을 민주주의의 질적 실현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며, 헌법적 가치의 진정한 실현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지금의 강경한 대립구도를 근본적으로 해소하기 위해서는 전혀 다른 단계로 뚜렷하게 이행을 해야만 한다는 점이다.
19세기 중반 루이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제3공화정이 들어설 당시 왕당파는 마지막 모험을 시도한다. 최소한 입헌군주정이라도 달성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도부는 분열되어 있었고, 내부 갈등은 극에 달했으며, 왕위 계승자였던 샹보르 백작은 최소한의 의회주의조차 받아들이지 못하는 완고한 인물이었다.
이때 공화파가 도전한다. 입헌군주정에 개방적이던 보다 근대적인 왕당파인 오를레앙파와 제휴를 시도한 것이다.
“국왕이 아니라 대통령을 선출하자, 권위와 전통은 유지될 것이다!”
결국 오를레앙파는 공화파와 합세하여 역사적 타협은 성공하였으며 프랑스는 영원히 왕정제를 벗어버렸다.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비약이 감행되어야만 하는 때이다.